2년전 독서모임을 같이 하는 분들과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한 여행을 했다. <서양미술사>를 같이 읽다가 모두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2년동안 매달 약간의 돈을 모아 드디어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고흐뮤지엄이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크뢸러뮐러 미술관이 있는 오테를로 그리고 고흐가 머물렀던 아를, 정신병원이 있던 생레미를 거쳐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있는 파리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3주동안 여행을 했다.
책에서만 보던 고흐의 그림을 직접 마주 하고 우리는 그림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두텁게 발라진 유화물감이 고흐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고, 어둡고 칙칙할 거라는 예측이 무색하게 너무나 밝고 아름다워 고흐가 정신병을 알았다는 말이 거짓처럼 들렸다. 고흐가 그렸던 여러 초상화의 인물들은 마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면서 <니체와 고흐>를 읽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니체의 여러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극의 탄생, 즐거운 학문, 도덕의 계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상의 황혼, 반시대적 고찰, 권력에의 의지, 이 사람을 보라, 선악의 저편-에 나온 문장과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 여러 자화상, 별이 빛나는 밤, 노란집, 오베르의 교회, 아를의 빈센트의 침실-을 잘 엮어 놓아 조금은 어려운 니체의 글과 눈마저 행복한 고흐의 그림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특히 니체의 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흐의 그림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왠지 모르게 이해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특히 이 글의 첫문장으로 쓴 인간은 길들인 공포를 과학으로 불렀다는 문장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닥친 코로나19가 떠올랐다. 인류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과학과 이성, 협력과 연대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폐쇄정책은 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혹시 길들인 공포를 과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나면 이 문장이 들어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봐야겠다.
이외에도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희생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직관하도록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자가 볼 때 모든 신자들은 너무 시끄럽고 뻔뻔스럽다. 그는 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라는 문장을 담고 있는 <선악의 저편>은 꼭 읽어보고 싶다.
지독히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앙을 볼 때 이 말은 너무도 타당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