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스트 - 뜻대로 풀리지 않는 보통의 삶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아사프 하누카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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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일러스트레이터∙만화가인 아사프 하누카가 일간지에 연재한 만화를 한데 묶어 낸 책이다. 작가는 아내, 자녀와 함께 텔아비브에 거주 중인데 만화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코믹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정치적 상황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기도 한다. 프리랜서 만화가로서, 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묘사하곤 하는데 웃픈 상황들이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매 페이지가 한 편의 만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페이지에 아홉 컷을 쓰기도 하고 단 한 컷으로 한 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유머도 있지만 늘 생계와 자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삶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육아 부분은 경험이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장면 구성이나 데생, 색채 모두 훌륭해 그림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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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목적의 연대 안에서 균열이 생기는 이유. 차별과 혐오를 지적하는 것을 ‘갈라치기‘ 라는 말로 뭉개도 될까?

 - 광장에서 차별과 혐오가 먼저 발생했어요.
 여성과 소수자, 청소년에 대한 차별을 담은 구호가 외쳐졌어요. 한자리에 모여서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떤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보지 않는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윤리적인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들에서조차 성폭력과 노동 착취,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연장자의 하대 같은 일이 숱하게 발생했어요.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였는데, 너무 자유롭고 느슨해서, 그 자유와 느슨함 사이사이에 폭력이 숨겨져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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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족함을 돌아보기

마흔은 그렇다. 나 자신의 결핍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한 사람이거나, 자신을 너무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태생적인 결핍과 고쳐지지 않는 단점과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을 완전히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용기만이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흔은 그렇게 나 자신의 모든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완전한 수용(total acceptance)’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 심리적 대전환의 기회를 놓치면 나쁜 성격과 습관은 더욱 화석처럼 굳어져버리고, 나이 들수록 더욱 옹졸하고 타인이 기피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 40대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고, 비로소 ‘그동안 잘못 살아온 시간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흔 즈음은 저마다가 지닌 성격적인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평생의 습관을 기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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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비혼 또는 미혼자들을 노처녀, 노총각으로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




제인 오스틴이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이름 앞에 자꾸 ‘노처녀’라는 낙인을 찍어 그녀가 ‘작가로서는 훌륭했지만, 인간으로서는 불행했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사고방식도 구태의연하고, 경험이 부족하면 묘사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고정관념이 아닌가. 위대한 작품들은 항상 작가 자신의 경험치를 뛰어넘었다. 경험한 것만 쓸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쓸 수 있다면, 예술의 다양성은 어마어마하게 축소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불혹’이란, 이렇듯 굳이 더 권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내 의견을 그저 나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그러쥘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마흔을 넘어서며 내게 쏟아진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 어떤 권위의 힘도 빌리지 않기.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 더 멋지고 대단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내 나이 마흔의 힘이었다.

얼마 전 켄트 M. 키스의 시 〈역설적인 계명들〉을 읽다가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을 자아내는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뭔가 이기적인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베풀라. / 성공하면, 가짜 친구 몇 명과 진짜 적 몇 명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 오늘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 (…) /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돕고 나서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도우라. / 세상에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내줘도 면박만 당할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것을 내줘라." 이 시를 읽다 보니, 내 마음속에 휴화산처럼 숨어 있던 수많은 ‘그래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 일제히 깨어나, 그동안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꼭꼭 숨겨오기만 했던 열정의 마그마를 폭발시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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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피아노를 향한 열정이 다시금 되살아나 심장이 따끔거렸다. 나는 어린 시절 내 삶의 소중한 일부였던 피아노를 내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다고 피아노마저 포기한 것은 아님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이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가장 깊은 울림을 갈구한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지금도 너무 많은 것들을 마음속에 구겨 넣느라 배운 걸 복습할 시간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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