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비혼 또는 미혼자들을 노처녀, 노총각으로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

제인 오스틴이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이름 앞에 자꾸 ‘노처녀’라는 낙인을 찍어 그녀가 ‘작가로서는 훌륭했지만, 인간으로서는 불행했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사고방식도 구태의연하고, 경험이 부족하면 묘사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고정관념이 아닌가. 위대한 작품들은 항상 작가 자신의 경험치를 뛰어넘었다. 경험한 것만 쓸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쓸 수 있다면, 예술의 다양성은 어마어마하게 축소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불혹’이란, 이렇듯 굳이 더 권위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내 의견을 그저 나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그러쥘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마흔을 넘어서며 내게 쏟아진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 어떤 권위의 힘도 빌리지 않기.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 더 멋지고 대단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내 나이 마흔의 힘이었다.
얼마 전 켄트 M. 키스의 시 〈역설적인 계명들〉을 읽다가 ‘그래도’라는 접속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을 자아내는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뭔가 이기적인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베풀라. / 성공하면, 가짜 친구 몇 명과 진짜 적 몇 명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 오늘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 (…) /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돕고 나서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도우라. / 세상에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내줘도 면박만 당할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것을 내줘라." 이 시를 읽다 보니, 내 마음속에 휴화산처럼 숨어 있던 수많은 ‘그래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 일제히 깨어나, 그동안 남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꼭꼭 숨겨오기만 했던 열정의 마그마를 폭발시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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