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근린공원에 굴참나무 숲이 있었다. 지하철 역 부근의 마트로 가는 길은 근린공원 오솔길을 지났다. 겨울날 오솔길을 꾸며주는 것은 굴참나무의 호리호리해진 잎이었다. 잎이 마르면서 플라타너스 잎과 대조적일 만큼 갸름해지고 날씬해졌다. 날이 풀리고 어제는 겨울비가 흩뿌렸다. 잎을 떠나보내고 드러난 굴참나무 줄기도 비에 젖어서 검은빛을 띠었다. 장보기를 같이하는 모녀가 함께 보았다.
_나뭇줄기가 빗물에 축축해지고 보는 사람의 생각이 어떨까요?
_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파리 지하철역이 나오는 짧은 시로 이끌고 가네. 오래된 파리 지하철 역 안은 카타콩브(카타콤) 지하묘지에 묻혀 있는 죽은 이들의 유령이라도 스르륵 나타날 듯하여 으스스해.
_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명시죠.
IN A STATION OF THE METRO
The apparitions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_시의 'apparition'은 몸이 있는 유령이야. 예컨대 죽은 아무개의 유령, 이렇게 말이지.
_제 나름으로 풀어서 옮겨봐요.
지하철 역에서
칙칙하고 어둑한 플랫폼에 줄 지어 서 있는 승차 대기자 속에 허연 유령처럼 객차의 이 얼굴얼굴
뿌리는 비에 축축히 젖어 거뭇거뭇해진 원 나뭇줄기 위에 바람에 날려 하얗게 들어붙은 꽃잎꽃잎
에밀리 브론테 소설 제3장에 나오는 표현과 비교를 한번 해볼게요. 몸 없는 유령(specter/spectre)이 나타나지요.
어둠 속에서 허연 글자들이 몸 없는 유령처럼 뚜렷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a glare of white letters started from the dark, as vivid as spectres ...
_준비한 글귀를 보자.
_손으로 만지면 부서져내릴 것 같은 오래된 책들은 책등이 뒤로 꽂혀 있어 제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님 글에서요.
_독자도 주인공처럼 알 수가 없겠구나. 다들 궁금해지겠어. 에밀리 브론테 소설에 등장하는 책은 어떻더라?
_제3장에 나(I)라는 등장인물 록우드가 촛불을 놓은 선반 한 켠에 흰곰팡이가 핀 책 두어 권이 쌓여 있었어요.
The ledge, where I placed my candle, had a few mildewed books piled up in one corner;
_성경인가 하는 책 면지에 캐서린 언쇼 이름과 면지 뒷면에 약 사반세기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지.
a fly-leaf bore the inscription—‘Catherine Earnshaw, her book,’ and a date some quarter of a century back.
남편이 산자락 산신제터 약수터에서 생수 한모금 마시고 새 사진도 담아왔다. 굴참나무 가지가 어제 내린 비로 거뭇거뭇해졌고 오색딱따구리 한 마리가 어두운 빛깔의 나무줄기를 쪼아내는 부리 끝에 나무의 환한 색 속살이 드러나고 하얀 꽃무늬 문신이 음각되어 있는 듯했다. 나무가 비에 젖고 딱따구리 같은 새가 나무를 쪼아내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인 사진이었다.
_오색딱따구리 라틴어 학명이 덴드로코포스 마요르(Dendrocopos major)이군요.
_린네가 1758년 처음부터 이 종을 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