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지만 이론은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제 이 책을읽는 동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내면에 갇혀 있는 창조적인 힘이 마음껏 움직이도록 의식 속에 길을 터주는 것이다. 그런 길을 만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창조성은 모습을 드러낸다. - P24

창조자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당신은 아티스트 대 아티스트로서 위대한 창조주와 창조성 동맹을맺으려는 것이다. 이 생각을 받아들이면 당신의 창조적 가능성은 한없이 확대될 수 있다. - P33

창조성을 회복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의 일상적 삶의 군더더기로부터 진정한 자신을 끄집어내는 ‘분리‘ 과정에 들어간다.
이것은 우리를 매몰된 일상에서 높이, 멀리 들어올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영화용어로 말하면 초점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 전체 조망은 창조적인 선택을 하는 데 아주효과적이다. 그것은 험난하기는 하지만 볼 것이 많고 멋진 곳을여행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는것이다. - P38

모닝 페이지를 쓰면 기분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걸 배울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쓸데없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가장 창조적인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모닝 페이지는 심판을 멈추고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피곤하든,
심술이 났든, 마음이 산만해졌든, 스트레스를 받았든,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아티스트는 아직 어린아이이고 더 키워져야 한다. 모닝 페이지가 당신의 어린 아티스트를키워줄 것이다. 그러니 매일 모닝 페이지를 쓰는 걸 잊지 말자.
무엇이든 생각나는 것을 세 쪽에 걸쳐 쓴다.  - P49

당신의 창조성은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와 함께보내는 시간이 좋은 물건을 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는 고물상에 가보기, 해변에 혼자 가기, 옛날영화 보러 가기, 수족관이나 미술관에 가기 등의 일을 하는 데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 꼭 지켜야 할 것은 시간을 낸다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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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에 발행된 주간지 <주 세 투Je Sais Tout>의기자 앙드레 아르니벨데는 ‘빛의 화가의 집에서‘라는 글에서 모네가 편하게 그림들을 둘러보라며 작업실로 안내하던 일을 회상했다. 앙드레를 작업실로 안내한 모네는 잠시 후 유리문이 달린 캐비넷 안의 조그만 이젤 위에 놓인 누렇게 바랜 봉투를 보여주었다. 봉투에는 주소 대신 시가 쓰여 있었다.
겨울도 여름도 속일 수 없는 눈을 가진모네 선생,
베르농과 가까운 외르의 지베르니에서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네. - P163

모네도 꽃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했겠지만 자신에게 예술과 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네는 비평가 프랑수아 티에보시손과 대화하면서 "화가가 된 것은 꽃 덕분인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모네는 그림에서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빛과 물, 고향 노르망디의 다채로운 지형 등 자연의 모든 측면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매년사그라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정원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자연의 순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초기에 색채와 빛을 연구할 때 꽃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침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생명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에도 지베르니의 정원을 가꾸면서 작품에 대한 창조력을 되살릴 수 있었다. - P167

화가 마을이 형성되면서 지베르니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정원사들의 마을이 되어갔다. 1889년에 꽃을 그리는 화가 마리키타 길이 처음 지베르니로 왔다. 길과 그녀의 어머니는 작품 활동의 모티프가 되는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서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살았다. 그녀의 조그만 정원은 젊은 미국인 화가들이 오후에 모여 차를 마시는 휴식 장소가 되었다. 모네의 사위인 시어도어 버틀러도 정원을 좋아했으며 모네에게 정원 일을 배웠다. - P173

 세월이 흐르고 모네는 자기 정원의 은신처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졸라의 예측을 실현했다. 그는 예술이란 자연 앞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간단히 정의했으며 말보다는 자신의 작품에서 경이로운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네는 이 세계를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으로 좁혀서 정의하려는 모든 철학을 거부하고 자신이 예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에 대해서 클레망소에게 설명했던 적이 있다. 그는 자연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감각과 세계를 조화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우주가 내 앞에 펼쳐 보이는 광경을보고 붓이 그것을 증언하도록 했을 뿐이다."
모네의 마지막 작품 <수련> 대장식화는 평생에 걸친 관찰을 아우른다는 의미가 있다. "잔잔한 연못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는 모네가 평생에 걸쳐 찾다가 마침내 자신의 정원을 그리면서 발견한 예술과 자연 간의 공명이 잘 드러나 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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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Water Lilles, 1905년 보스턴 미술관1905년 수련 그림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가 물에 비친 어렴풋한 실루엣은 모네가단일한 시점에서 관찰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빛나는 물 위로 수련이미끄러져가는 모습을 그렸으며, 물감을 극도로 정제하여 초록과 분홍의 섬세한 색조로 표현했다. 연못을 둘러싼 모든 지형지물이 사라지고 오로지 물만이 풍경에 남아 있다. - P109

모네가 그해 여름에 그렸다고 기록된 작품은 없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그를매혹시킨 모티프를 다룰 창의적인 작업 방식, 즉 그림에 착수하기 전에 신중하게 관찰하는 습관과 날씨가 궂어 야외 작업이 어려울 때는 작업실에서 마무리하는 방식 등은 1902년 여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모네는 말년에 그 순간을즐겁게 추억한다. "나는 빛과 반사에 심취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시력이 망가졌지만 말이다." - P110

몇 년 동안 연작을 작업하면서 모네는 끈질긴 관찰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1886년에 브르타뉴의 바위투성이 해변에 있는 벨 섬에서 작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다를 제대로 그리려면 매일 매 시간 같은 장소에서 대상을 관찰해야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에는 찰나의 시각 경험을 잡아내는 데 집착하는 화가의 불안이 반영되어 있다. - P117

전시회가 열렸을 때 비평가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수련> 연작은 만장일치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로저 마르크스는 예술 잡지 <가제트 데보자르(Gazett des Beaux-Arts>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평단이 가장 대담하다고 평가한 요소를 소개했다. 모네는 <수련> 연작을 그리면서 지상의 닻에 얽매여 있던 풍경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땅도 하늘도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비옥한 물이 캔버스의 들판을 완전히 덮고 있으며 빛이 넘쳐흘러 녹청색 잎의 표면에서 활기차게 뛰논다. 화가는 원근법의 피라미드식 선이나 단일 초점을 추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규칙에서 벗어났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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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점차 지베르니에서 그림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봄꽃의 아름다움에푹 빠진 그는 과일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면 과수원에 이젤을 설치했다. 1887년에는 습지 근처에서 자라는 야생 아이리스에 관심을 돌렸다. 모네는제한된 색조와 순수한 물감, 짧은 붓놀림 등 튤립 들판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때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동원했다. 아이리스 들판을 그린 작품을 보면 안개 낀 보랏빛 언덕과 구름이 흩뿌려진 하늘을 배경으로 따뜻한 색감을 지닌 노란색 꽃이 차가운 느낌의 초록색 이파리 위에 솟아나 자연스럽게 밝은 색상의 띠를 이룬다(60~61쪽).  - P63

모네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자연에 투영하여 정원을 직접 설계하고 가꾸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초기의 야외 회화처럼 생생하면서도 즉흥적으로 지극히자연스럽게 표현했다.  - P65

그는 정원과 관련한 서적을 열심히 찾아읽었다. 지베르니를 방문했던 기자 모리스 기예모는 모네가 "미학 서적보다 원예 카달로그를 더 많이 본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는 카유보트와 소설가 옥티브 미르보, 비평가 귀스티브 프루아 등 자기처럼 정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원예 지식이나 씨앗, 모종 등을 교환했다. 그는 온실을 두 개만들었고 정원사를 여섯 명 고용했으며 "돈을 버는 족족 모두 정원으로 들어간다"라고 웃으며 인정했다. - P71

모네는 1893년 2월 초 지베르니 집 근처의 땅을 약간 구입했다. 1200평이 채안 되는 그 땅에는 초지와 예전에 농장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던 조그만 연못이있었다. 이곳을 경계로 한쪽에는 철로가 다른 쪽에는 그의 정원 울타리와 나란히 놓인 간선도로가 있고 또 한쪽으로는 엡트 강의 작은 지류인 루강이 흐른다.
의붓아들 장-피에르의 말을 빌리면 거의 습지나 다름없었던 그 땅으로 인해 모네는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네는 이곳을 밝은 색수련이 잔잔한 수면에 떠 있고 주위에는 갈대와 버드나무, 아이리스가 자라는연못정원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했다. - P75

만년에 모네는 연못을 그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때를 돌아보았다. 그는 ‘수련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모네는 수련을 심은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관상용으로 수련을 심었을 뿐이다. 전혀 그럴 생각은하지 않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명상하면서 이 풍경을 단 하루 만에 습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풍경에 친숙해지고 나서야 연못을 이해하게 되었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포착해냈다. "어느순간 갑자기 연못에서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바로 팔레트를 집어들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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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모네는 지베르니로 이사온후 자연과 원예에 심취했으며 원예전문서적도 읽고 원예전뭔가를 고용하고,정원을 각꾸기 시작했습니다.자연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으며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모네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연과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고, 관찰력에 의존하여 시선이 가는 대로 붓을 움직였다. 그에게 인상파 화가라는 명성을 부여해준 초기 야외 회화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대장식화까지, 빛의 움직임 속에서 포착한 자연의 ‘인상들‘을 화폭에 담아내려 했다. 그는 매일순환하는 태양과 1년 동안 바뀌는 계절 등 변화하는 세계를 관찰하면서 순간을포착하여 무한하고 다채로운 영속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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