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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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만필仁淑慢筆》
황인숙 作 / 마음산책 出 

 

 

분문 중에 '가장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방금 휴가를 돌아온 사람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을 '가장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방금 마지막 책장을 넘긴 사람이다.' 고 쓰면 어떨까.

 

                     

 

'인숙만필'을 읽어 가는 내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질거렸다. 그 누군가는 이제 막 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추억을 공유하여 은근한 묵은내 나는 지인(知人)이다. 황인숙 시인의 속도 더딘 만담 같은 만필을 읽어 가면서 가끔 키득키득 거리기도 했고, '옳지' 맞장구 치기도 했다. 잠시 유년의 뒷골목에 되돌아 서서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라며 옛기억을 더듬었고, 생활 속에서 미처 챙기지 못 했던 소소한 것을 발견하는 놀라움도 맛보았다. '인숙만필'에는 마치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웃음 섞인 수다를 떨수 있는 친근함이 있었다. 또한 '무엇이 들었을까' 어린 가슴 조바심치며 설레게 하던 종합선물상자이기도 했다. 물론 '인숙만필'에는 여러가지 과자가 꿈처럼 담겨 있지는 않다. 그 대신에 특별할 것 없지만 사람 냄새, 웃음 냄새 나는 사람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소복히 담겨 있어 즐겨웠다.

                                                                                                                              

나만은 비켜 갈 것 같았던 세월이 어느새 일찍감치 나를 관통해 버린 쓸씁한 사실과 마닥들일 때, 사람은 서글펴진다. 인생을 구십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의 삼분의 일을 살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이다. 이 어중간한 시간을 살면서 그나마 알게된 사실 하나, '모든 세상사에는 주기가 있다.'다. 이런 인생의 주기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인숙만필'에서 작가는 자신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눈길은 분명 시인은 원숙의 단계에 발을 수줍게 디디고 있었다. 아직 한참 덜 익은 나에게 시인의 말들은 정신이 번쩍드는 회초리처럼 느껴졌다.

'울음, 눈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상비약처럼 아껴둬야 된다'는 말에 뜨끔했다. 평소 눈물에 대해 그닥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서 일까. '흐르면 흘리는 거지' 정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였다. 가슴 찡한 것들을 보고 곧잘 눈물을 흐리기 때문이기도 할테다.  왠지 내가 흘린 눈물을 보고 값었다 할까봐 눈치가 보였다.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아 남을 위해 흘릴 수 있도록 눈물에 가치있는 희소성을 부여해야겠다.

 

작가가 스승의 부친상에 갔을 때, 그 부친을 두고 사람들은 젊은 시절, 바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멋있는 평가인 것 같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지만, 구지 이름은 남기지 않아도 '그사람은 그랬었지.' 라는 따뜻한 회상과 안타까움은 남아야 한다. 먼훗날 세상을 등지게 되었을 때 남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까. 이것을 생각하니 느슨한 허리춤을 고쳐 메게 된다.

추억 속의 장소와 사람들은 세월이 가도 낡거나 늙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 속의 것들은 어제와 같은 것이 드물다. 이런 냉정한 사실과 부딪치는 것도 서글프다. 작가가 흔적만 남은 낯익은 장소와 잊혀져 가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언젠가 십년 전에 살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다. 제법 걸어야 건넜던 다리는 단 몇 걸음에 건널 수 있는 작고 좁은 다리였고, 대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웃어 줄 친구도, 그의 집도 흔적이 없었다. 추억은 현실 속에서 환영처럼, 환청처럼 그렇게 아득해져 있었다.

 

 

작가는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를 알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서 '아름답기'가 힘든 갑다. 그 나이에 맞게 잘 살지 못하는 나도 작가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부럽지만 가끔 나이를 망각한 채 살아가다 찌릿한 '나이듦'의 충격이 가져다 준 자극이 삶의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그것은 시인처럼 런닝머신 한 번 더 뛰게 하니 말이다.

작가가 풀어 낸 이야기 보따리 속에서 '사는 게 별거냐' 라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한 발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 딛고, 다른 한 발은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쌓이는 정(情)에 딛고 살아 가면 되지. 그러나 세상에 무디게 살지는 말아야지. 책을 덥고 오랫만에 시원하게 불어 오는 바람냄새를 맡는다. 시인의 말처럼 아주 먼 곳에 사는 인간들과 인간이 닿지 않는 먼 곳의 냄새를 듬뿍 지닌 바람이 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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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C. 라자고파라차리 지음, 허정 옮김 / 한얼미디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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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도 최고의 시di-kvya'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라마야나>는 7편, 2만 4000시절(詩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세계 최장편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학 작품의 저자는 BC 3세기 경의 시인 발미키(Vlmki)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수세기 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글로써 엮은 편자(編者)이다. 이 작품의 성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BC 1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모습을 갖춘 것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 전 7편 중 제1편과 제7편이 첨가되었다고 전해진다.

 

인도인들의 정서적, 종교적 생활에 토양과도 같다는 이 책은 얼핏 서양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빠진 이야기들, 아시아인들의 보편적 정서 같은 것이 <라마야나>에는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더 쉽게 받아 들여 졌는지 모른다. 올림푸스의 신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때론 인간보다 더 치졸하고 욕정에 쉽게 휩싸이는 그들을 보곤 기가 찼다. 

 

이번에 읽게 된 <라마야나>는 인도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였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C. 라자지(본명 : 차크라바르티 라자고 파라차리)가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라마야나>의 수많은 판본 가운데 '소박한 문체, 독창성, 긴장감을 잃지 않은 표현력에 있어서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구지 이러한 평가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라마야나>의 대표적인 판본으로 일컫어지는 발미키와 캄반의 <라마야나>를 비교해가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 C.라자지의 <라마야나>는 쉽고 재미있는 한 편의 소설이다. 그가 이처럼 <라마야나>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쓴 데에는 인도의 문화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한 민족의 문화는 아이들에 의해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처럼 민족의 태반이 되는 그 이야기들은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전해져 그들의 무의식 깊이 뿌리내리고 그렇게 다음 세대의 피 속으로 이어진다.

 

                                            

산스크리스트어로 <라마야나>는 '라마가 걸어간 길'을 뜻한다. <라마야나>는 힌두교 3대 신(神) 중의 한 명인 비슈누(섭리의 신)신의 아바타(화신)인 라마의 이야기이다. 라마는 코살라 왕국의 제왕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다사라타 왕의 부당한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복 동생 바라타에게 왕위를 넘겨 주고 그의 아내, 시타와 또다른 이복동생 략슈라마와 함께 14년간 변방의 숲 속으로 추방당한다. 라마는 아버지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모두가 그것을 바랬고 그의 아버지, 다사라타왕조차도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된 자신의 명령에 라마가 그렇게 하기를 바랬지만, 라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이것은 옳은 부모의 말씀조차도 한낱 비웃음으로 무시해버리는 요즘 세태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어떨결에 왕위를 물려 받게 된 바라타 역시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말하며 라마에게 그의 자리였던 코살라 유바라자(왕세자)가 되기를 간구하며 숲 속의 라마를  찾아 간다. 힘든 추방 생활에서 파수꾼을 자처하며 함께 떠난 략슈라마나 부당한 권력을 사양할 줄 아는 겸양을 지닌 바라타의 행동은 형제간의 우의나 신의를 생각케 한다. 고행자들은 괴롭히던 략샤사(마귀, 악마)들을 처치하며 숲 속에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라마 일행은 13년 째 되던 해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된다. 란카(스리랑카)의 마왕 라바나(Ravana)에게 아내 시타(Seetha)가 납치된 것이다. 라마(Rama)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 원숭이들의 왕 수그리바와 동맹을 맺고 특히 수그리바의 원숭이 장군 '하누만'의 큰 도움으로  마왕 라바나를 무찌른다. 마침내 라마는 온갖 고초 끝에 시타를 구한다. 한마디로 <라마야나>는 신들까지도 벌벌 떨게 하던 마귀의 제왕 라바나를 무찌르기 위해 비슈누 신이 여섯번째 아바타(화신)으로 환생한 인간 라마가 라바나를 처치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스릴넘치게 적은 대서사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라마야나> 속 라마의 일생과 행적을 좇아가다 보면, 언제부터이고 우리게게 잊혀져 버린 君臣之義, 부자 간 지켜야 할 도리, 형제간의 우의, 부부 간의 애정과 정절, 善惡 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의무이자 힌두교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를 깨우치기에 최고의 교과서이다. 이 다르마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책무'이다.

 

일설에 의하면 <라마야나>를 읽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죄와 슬픔으로부터 구제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재난을 피하고 싶거나 어떤 일의 성공을 기원할 때 인도인들은 '하누만'이 란카에서 겪은 탐혐을 다룬 시편인 <순다라 칸다>를 읽는다고 한다. 하누만이 란카에서 되돌아 올 때까지 발생한 모든 것을 적은 이 장을 읽으면 하누만이 성공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냐며 피식거릴 수도 있지만. 기적이란 그것을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법이니 <라마야나>의 부적 같은 효험을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그런 인도인들의 소박한 믿음이 되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소박한 믿음은 단순한 흥미꺼리가 아닌 종교적 단계까지 심화 되었다고 하니 <라마야나>의 영향력은 가히 놀랄 만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예수에게도 인간적 고뇌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라마 또한 화신이었으나 <라마야나> 곳곳에 인간적인 고뇌가 눈에 띤다. 그들이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신이지만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면서 그 인간적 고뇌가 최고조에 달했고, 라마는 라바나로부터 시타를 구하고 그녀와 마주하면서 인간적인 회의를 품었다. 혹시나 라바나에게 잡혀 있는 동안 정절을 잃지 않았는지...라마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온갖 고행과 유혹을 견뎌왔던 시타에게 라마의 그와 같은 행동은 더없는 모욕이었으리라. 시타의 자신의 결백을 중명하기위해 급기야 훨훨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보통 이즈음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오해를 뉘우치며 아내의 옷깃을 잡아야 마땅하지만 라마는 끝내 묵묵부답이다. 라마의 회의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시타를 장작더미에서 구해내며 라마가 비슈누신의 화신이며 시타는 락슈미 여신(복락의 여신, 비뉴수의 부인)의 화신임을 알려 준다. 그 뒷이야기는 대충 그렇고 그런 해피엔딩이다.  

 

라마는 다르마(Dharma : 종교의 가르침, 법, 정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의 모델로서 신성과 천국을 얻는 방법을 보여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인도인들은 이런 그를 경애한다.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닌 인도인들의 생활 속 깊이 들어 앉은 라마,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은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쳐 줄 때, '라무 라무' 라고 가르쳐 준다고 한다.

 

<라마야나>의 그 방대한 이야기를 딱 두 단어로 추려내라면, 바로 '다르마'와 '사랑' 이리라. 이 보편적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보통의 인간에게도 있다는 신성(神性)이 자주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신성이 드러난다고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동물처럼 본능대로만 살아 가려는 사람들이 점점 들어가는 세상에 이것은 효과적인 하나의 예방약이자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라지푸트회화...

16∼19세기 전반에 걸쳐 북서인도에서 라지푸트 여러 왕후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회화.

비슈누신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발달한 서민적인 종교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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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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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PHOTOCOPIES》

존 버거 John Berger 作/ 열화당 出

 

 

가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키워드 가운데 이것만은 꼭 챙겨야 한다는 것, 이것이 빠지면 미처 챙겨 오지 못한 준비물 같을 것은 뭘까. 바로 여행과 책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의 동반자로서 선택사항 일 순위에 안톤 체홉의 단편집을 놓았다. '진정 마음이 맞는 여행길의 동무가 없다면, 차라리 홀로 여행을 떠나라.' 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이 구절은 자주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나에게 하나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난 그 길에서 완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내 옆구리에 앉아 부담주지않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책'과 '음악'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가끔은 단조로운 여행길에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말없는 친구들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성실하게 볼 수 있도록 눈까지 맑게 닦아 준다면, 이것은 더없이 멋진 여행의 동반자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읽은 존 버거의 '포토카피'가 꼭 그런 친구였다.

 

 

'포토카피'...이 책에는 존 버거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문체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그들을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글로써 복사된 장면이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면 마치 직접 사진을 들고 클로즈업 시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그 만큼 성실한 자세로 장면들을 치밀하게 표현해 냈다.

 

작가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런던 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는 사프카를 쓴 노숙자 여인, 팔리지 않는 부랑아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명성에 무관심한 채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오로지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무명 화가, 따뜻한 한 끼의 식사 초대에 생애 처음 받아 본 대접이라며 뜨거운 눈물을 흐리던 늙은 목동, 인도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향하며 라이플총을 빗겨 매고 결국 혁명군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열 세살의 인도 소년, 1993년 러시아 유혈 사태 속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사프카를 눌러 쓴 한 소녀, 개인적 양심을 끝까지 지키며 '민중에게 권력을, 꽃을, 따뜻한 빵과 불꽃과 사랑을!'을 외치다 외롭게 죽어간 안티고네를 닮은 환한 검은 빛의 시몬 베유, 총과 펜을 메고 멕시코 민중을 위해 싸우는 사바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 문장과 문장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존 버거의 애정어린 눈길을 만났다.

 

작가는 스스로를 나름대로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고질적으로 유행에 뒤진 사람이라 말했지만, 먼지를 뒤집어 쓴 중고품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을 얘기을 읽어 낼 줄 아는 존 버거의 시선은 이 가을, 청량함 그 이상을 것을 보게 한 좋은 길동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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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행복한 오기사의 스페인 체류기
오영욱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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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

         글 ㆍ그림 ㆍ사진  오영욱 _ 예담

 

 

 
 
 
 

                 

한 손에 쏙 들어 오는 크기, 깔끔한 그림과 곁들어진 잘막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부록으로 끼어 있던 여행 다이어리가 재미있다.

꼭 부록인 여행 다이어리가 아니더라도 책 자체가 산뜻해 다이어리로 써도 무방할 듯 싶다.

  

이 책은 바르셀로나(까딸루냐 지방) 체험기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ㆍ공간의 한계 쯤은 거뜬히 뛰어 넘는다.

오기사의 걸음을 따라 나도 바르셀로나의 후미지고 음침한(?) 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나

식당을 들어섰다 나선다.

 

깊이 있는 고민보다 툭 던지는 가벼운 말에  잠시나마 일상의 푹푹한 공기를 환기시킬수 있는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감각적인 책의 디자인은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다. 그만큼 비주얼이 강한 책이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은 읽는다기보다 본다는 쪽이 더 맞는 말 같다.

  

모든 선택에는 그에 상응하는 기회비용이란 게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오기사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안정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했고

대신 자유와 불확실성에 오는 만만찮은 불안감을 얻었다.

 

오기사의 선택은 자칫 무모해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 팔십을 산다쳐도 고작 삼만 일도 채 못 사는데,

이리 재고 저리 재다 보면 정작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는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를 행동으로 푼 오기사의 열정에, 청춘에  브라보!

 
  

                                       

                                                     무지한 오만과

                                                     그로인한 편견.

                                                     그리고

                                                     정작 나일지도 모르는,

                                                     그 당사자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 본문p. 212

 
 
 

기다림은

어쩌다 저질러 버린

키스의

뒷감당 같은 것.

 

아쉬움은

인색했던 사랑 고백처럼

멀어져 갈 뿐.     

  

... 본문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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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 - 언젠가 저 길을 가보리라!
이지상 지음 / 북하우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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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歌》 

이지상 지음 _ 북하우스    

 

 

 

 

 

 

 

 

 

 

 

 

 

 

 

 

 

 

 

 

 

이 책은 '여행'을 테마로 한 그의 자서전 같은 책이다.

 

제목이 표지에 큼지막하게 쓰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읽고서야 제목이 '여행'가 아닌 '여행'임을 깨달았다. 비록 잘못 본 제목이었지만, 책은 동음이의어인 이 두 단어의 미묘함을 모두 갖고 있었다.

 

<여행가>는 애환의 노래, '아리랑' 의 개인버전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노래도 떠올랐다.

그것은 재일교포 출신의 블루스 가수 아라이 에이이치(新井英一)의 <청하의 길>이란 앨범의 노래들이다.

이 노래들은 재일 교포로서 아라이 자신의 '뿌리 찾기의 실화'를 엮은 것들이다.

 

목적이야 다르겠지만, 현실의 삶 속에서 오는 공허함의 근원을 찾아 떠난 작가와 아라이는 공통분모를 지녔다. 단지 작가는 '자유' 라는 분자를, 아라이는 '고향' 이란 분자를 업고 길을 떠났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행가>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던가.

작가의 유년시절은 마치 ' 떠날 수 밖에 운명 ' 이란 앞으로의 삶의 복선인 듯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던 아찔하지만 싱싱한 풋내 나던 청소년기, 시대의 경계인으로서 방황하던 청년기의 이야기들 또한 그가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괜찮은 대학을 나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까지 다니던 그가 보장된 안락함을 던져 버리고, 기꺼이 'flying bee'가 되어 버린 이유는 뭘까. 그 이유야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라며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실 누구든 가둬 놓은 적은 없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갈 뿐이다. 노예로 깨어 난 좀비처럼 끝없이 삶에 복종하며, 이유 모를 갈증에 허덕이다 삶에 별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 채 가버린다는 자체가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낀다고 쉽게 그것을 박차고 뛰쳐 나올 용기도 없다.

'자유'를 손에 쥔 동시에 지불해야 할 대가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와 같은 '자유인'은 참으로 용기있는 자들이다. 

난 그런 용기가 부러워 요즘들어 손에서 '여행기'를 놓치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는 분명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힘이 있다.

작가가 떠나기 전에 바다에 놓아 주었던 거북이, 호프만처럼 말이다.

(거의 다 죽어가던 거북이가 바다를 만나자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 났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만 들어도 흥분되고 의지가 불타오르는 것은 아닐까. 

 

 

물론 '여행'이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도, 꿈꾸던 로망의 실현일 수도 없다.

세상과 완전히 '바이, 바이' 하기 전까지는 현실과 철저히 담을 쌓고 죽림칠현처럼 살 수도 없다.

이래서 이상과 현실은 서로 삐거덕거린다.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이 책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권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흥분, 첫 여행에서의 환희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가시고 난 뒤 찾아 온 문제와 고민들이 알알이 막혀 있다.

 

여행에 대한 몽환적 환상을 심어 주는 책은 많다.

하지만 길 위에서 던지는 화두 같은 질문에 고민케 하는 책은 드물다.

작가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행형의 고뇌를 안고 사는 인간의 노래인 이 여행 위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어지럽게 몇 자씩 느낌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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