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윤재의 절친한 동무이자 동지였다. 죽은 친구의 아내와 결혼해 살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죽은 친구와늘 비교당하면서도 화 한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 P168

어머니의 옛 시동생 가족들이 아버지의 영정을 향해절을 올리는 모습을 나는 어쩐지 처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내 아버지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형수를 빼앗아간 사람만은 아닐 터였다. 형의 친구이고 동지였으며, 운명이 조금만 달랐다면 형과 친구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 P169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요. 사람의 도리제 그짝은순겡을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소. 글먼 된 것이오. 긍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개 앞가림이나 합시로잘사씨요."
- P180

 나도 아버지를 보았다. 고등학생 때따라가지 못했던 두 사람의 대화를 쉰 가까운 지금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 P181

우익 세상에서 공화당 삼선 의원을 지낸 제자는 은사의 당부를 잊지 않고 여러차례 아버지의 편의를 봐주었다. 교도소장의 방에서 특별면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도움 덕이었다. 워낙 혹독한 전쟁을 경험한 그 시절에는 이런 인간미가 흔했던 것인지, 아니면 소선생이 워낙 좋은 선생이라 좋은 제자를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 P186

그러나 묻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내 빚이 될까봐. 아버지는 누군가의목숨을 살리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덕으로 살기도 했다.
- P187

 아직 사회주의를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98

역시 세상은 모르는 일투성이다. 제대로 살아본 적도없는 작은아버지가 죽을 준비를 저렇게 야무지게 하고 있는지 몰랐다.
- P215

아버지는 누가 등쳐먹는 호구가 아니라 자원한 호구였다. 학수 또한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기탱천한 연기를 서슴지 않은학수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지만 표현해본 적이 없었다.
- P222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 P249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 P252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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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 P67

오크향은 달콤했고 목 넘김은 황홀했다. 마셔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을것이다. 한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사이 세상은 훌쩍 그한계를 뛰어넘었다.
- P70

큰집 마당에 홀로 서서 나는 예감했다. 오빠와 나의 시간들이 끝났다는 것을.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미안하고 무참했다. 나는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그대로밟으며 큰집을 나왔다. 순백의 마당에 더는 무슨 자국이라도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 P80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 P85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 P85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 P102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 P134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 P138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담배 친구라니.
- P139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 P141

친구를 볼 때마다 손가락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나는아버지 말에 밥을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친구는 느닷없이 박장대소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그랬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한 게 우리 아버지가 처음이라고. 어쩐지 아버지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설움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고.
- P141

몸을 일으킨 여자가 바람 없는 날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고요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부지를 빼박았다...……."
아버지 닮은 아이라도 낳고 싶었는지 여자는 아버지를보듯 나를 보았다. 깊고 그윽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서글프게.
- P162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 P165

‘아이고, 먼 놈의 남자가 형광등 한나도 못 갈아 낀대?
윤재는 그 옛날에도 혼차서 뚝딱 해치우등만, 멋 하나 윤재보담 낫을 것이 읎당게. 인물이 낫기를 해, 다정하기를해. 아이, 니가 전등 쪼까 비춰봐라."
"윤재가 누군데?"
- P166

 만담을 주고받듯 창호지 바른 방문을사이에 두고 콩닥콩닥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전남편말하는 어머니에게서도 아내의 전남편 칭찬 듣는 아버지에게서도 분노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런 집이었다. 걸핏하면 어머니는 우리 윤재, 했고, 아버지는 윤재가 우리 윤재먼 나는 넘의 상욱이나, 농담으로 받아쳤다. 나는 그런 말을 꺼내는 어머니도,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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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책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삶을 마감한 것이다.
- P7

물론 본인은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젠장.
- P16

"의식도 없는디 그거이 먼 사람이다요. 안 할라요."
쿨한 사회주의자의 쿨한 답변에 쿨한 서울 의사는 쿨하게 돌아섰다. 
- P28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 P27

나중에야 알았다. 그에게 동생이 하나뿐이었다는 걸일찍 어머니를 잃어 그가 업어 키운 아들 같은 동생이었다는 걸, 그 동생이 아버지 바로 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자기 몫까지 잘 살라는 동생의 유언을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는 걸.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 대신이었다. 그러니 나는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용돈 쥐여주며 귀여워했을 조카였던 셈이다. 그 마음 생깐 것이 늙어서야 마음에 걸렸다. 그래봤자 그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미욱하다. 아버지도 그랬다.
- P28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 P33

"신우형, 복례누이, 복희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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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니나는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당황한 눈빛이었으나 점차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물었다. 왜 당신은 할 수 있었다> <이었다> <하려고 했다라고 말하는 거죠? <할 수 있다> <이다> <하려고 한다>라고 하지 않고?
이 질문에 대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했다. 니나가 이 침묵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침묵이 어떤 심연의 끝에 있는지는 파악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갔다. 더 이상 얘기할 게 없었다. 나는 그녀의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니나는 길모퉁이를 돌아가기 바로 직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지상에서의 이별의 고통이 엄습해 왔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선사한 인생에 감사한다.
- P369

이것으로 이 수기는 끝이 났다. 끝부분이 나를 몹시 슬프게했기 때문에 나는 울어야만 했다. 니나는 곁에 없었다. 그래서나는 오랫동안 조용히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때문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그물에 얽혀 있듯 자신의 운명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것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그 그물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그 그물에서 벗어났다 해도 그것은 발치에 걸려 있으며 인간은 그것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 그물은 아무리 얇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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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나보다 자신을 좋게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얘기해야 할까? 그녀의 젊음과 순진함이 나를 감동시켰다고. 아니다. 감동이 아니다. 그것들은 나를유혹한 것이다. 그것은 가시와 같았다. 
- P71

나는 자기 배를항구에 매어둔 상인과 같다. 배를 내보내야 돈을 벌어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배를 바다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했으며, 나는 본래 모험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남자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 P75

그러나 이 날이 끝날 무렵 나는 내가 니나와 전혀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나에게는 고통이 엄습했다. 그랬다. 나는 이렇게 표현해야 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저녁이 오고 있었다. 나는 이때만큼 내 인생의 무의미함을 뚜렷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 P75

아, 그래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을 거야. 나는 항상 그를생각하면 화가 났어. 그때도,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야. 그는 내가 가는 길을 방해했어. 그는 이상했어. 그는 내게서 어떤 다른것을 만들어내려고 했어.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 그렇지만 내가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 P74

언니도 알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아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갑자기 다르게 걷고, 다른글을 쓰고, 다르게 말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은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혹은 전혀 다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과 게임을 할수 있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있는 이런저런 인물과 자기가비슷하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 다른 책을 읽으면 또다른 모습이 보이고, 끝없이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야. 
- P77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 P78

아, 라고 하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승복하는 투였다. 이것은 또한 더 이상 나쁜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는, 수많은 고통에 면역이 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이 목소리가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알았다.
- P83

그녀의 자존심은 그녀가 투항하는 것, 즉 여기에서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여기에 있는 것은 불행한 운명이긴 하지만 니나에게 이 운명은 또한 의미 있는 것, 도전해 볼만한 것이었다. 
- P92

인간들은 삶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면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몰라. 그러나 나는언니에게 다른 얘기를 해주고 싶어. 덜 딱딱한 얘기.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시적이기도 한 얘기. 나중에 이것이 윤리적인지아닌지 말해 줘.
- P101

아니야, 라고 니나는 생기 있게 말했다. 아니야, 이 점에서는 나는 슈타인 편이야. 생각해 봐. 내 시가 형편없다면, 정말로 형편없어서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도 감상적이고 싸구려라면, 나 자신의 내부에도 감상벽과 싸구려 경향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거야. 누구든 그가 쓴 것과 똑같아. 이걸 분리시킬 수는 없어. 만약 언니가 좀더 날카롭게 주의해 본다면, 모든 가짜를 꿰뚫어볼 수 있을 거야. 슈타인의 말이 전적으로 옳아.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 내 말이 너무 냉혹하고 이기적으로 들리지? 그럴 거야.
- P119

그래요, 나는 대답했다. 니나, 나도 고독이 필요해요. 그러나 나는 그걸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요, 너무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이었어요.
- P122

사람은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심에서나온 것이라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말없는 공감이 제일입니다. 
- P127

내 솔직한감정에 따르자면, 나는 그를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그는 나를 방문하는 낙으로 삽니다. 나에 대한 희망이 말 그대로 그의 목숨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서 이환상을 없앨 수가 있을까요? 부드럽고 자애로운 것과 가혹한 진실 중 어느 편이 나은 건지요? 나는 때로 인간은 타협 속에서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죠. 언젠가는 사실 그대로를 말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당연히 나에게물을 것입니다. 너는 왜 그것을 오래도록 이야기하지 않다가 이제야 이야기하느냐? 그러면 나는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약해서, 그리고 어리석은 동점심 때문이라고. 아마도 인간은 비밀 없이는 살 수 없을지 모릅니다. 
- P129

니나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몇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 P130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그것, 그러고는 또 저것, 그리고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말이 나야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깨끗하게 결말이 나야 해. 그러면서 사람들은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인생에는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홍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 P149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게 나는 싫어.
- P151

나는 니나의 본질에 있는 어떤 딱딱함 같은 것이 천성적으로 유약한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믿을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생각했다. 니나는 자기 자신에게 극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리라. 나는 니나와 함께 사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니나와 함께 사는 것은 쉬운 일은아니었다. 나는 그걸 감지했다.
- P155

 나는 텅 빈 방과 천천히 죽어가는 수종증을 앓는 노파, 작은 가게, 그리고 파리들을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니나는 거의 일년을 보냈다. 왜인가? 아버지의 빛을 갚기 위해서? 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사실은 <생>이 그녀에게 부과한 모든 과제를 자신이 수행할 수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망명지와 같은 곳에서 니나는 불행하지 않았을까? 아니, 하나의 난관을 극복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과연 불행할까? 
- P169

나는 니나의 그 쌀쌀맞게 변한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찌 생각을 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나는 생각을포기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접근한 데는 어떤 계산이, 미묘하고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계산이 작용했을지 모른다는생각도 나를 절망에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은 인간을 볼 줄 아는 나의 안목이 니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마녀적인 것 아니 어떤 요정 같은면모가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이런 알 수 없는 매력 때문에 나는 니나를 사랑하는 걸까.
- P181

다행히 아무도 니나의 이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다른 여학생 하나가 한 무리의 짐승을 역병에서 구하려면 병든짐승들은 죽여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토론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인간이 짐승처럼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불치의 정신병 환자가 아직 인간인지 아닌지, 그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사회를 보호할 수 있는데도 사회가 죽음을 요구할 수 있는지 등등.
- P198

당신은 지금 희생이니, 공동체니 하는 개념들을 사용했어요. 언뜻 보면 그럴 법한 말이죠. 전체 민족을 위해 병든 사람들을 박멸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것. 사람들은 말하죠. 이 사람은 가치가 없고, 저 사람은 가치가 있다고.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뭐죠? 집단 전체에 대한 이익 여부? 이것은 기준이 될 수 없어요. 결코요.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희생자들을 밟고 선 자들은 가치가 있는 자들인가요?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건강할지 몰라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건강한 육체에……… 그래요. 나도 알아요.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가치와 무가치를 판별하려고 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죠? 그들은 미쳤어요.
그들은 마치 병을 박멸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요. 항상 병은존재하게 마련인데, 건강과 병은 항상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있는데, 의학의 생물학적인 관점은 틀렸어요. 근본적으로 틀렸어요.

- P213

아니오. 나는 완고하게 소리쳤다. 나는 이성에서 떠나 있었다. 당신은 오직 위험을 사랑할 뿐이야. 모험을, 그리고 인생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니나는 나를 쳐다보았다. 인생.그래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통해서 그 인생을사랑해요.
- P217

그녀는 이때 나를 보았는데 이 눈길은 내가 사는 동안 평성잊지 못할 것이다. 이 눈길은 그가 내리기로 되어 있던 섬을 그냥 지나쳐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그 배는 계속 가고 있고, 그는슬픔을 가득 담은 채 지나쳐버린 섬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는선장에게 좋을 쳐서 배를 섬이 있는 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하지않는다. 보이지 않는 팔이 그를 잡고 있고 그는 순종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옳은 것이다. 배는 계속 가고 있고 섬은 대양 한가운데 있다. 그 섬으로 다시는 배가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 P228

이런 성격을 니나는 어디에서 획득한 것일까? 대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니나는 차갑지 않았으며, 메마르지 않았다.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열정이 있었으며 예민한 감각을 갖고있었다. 이런 여러 정신적 자세를 얻기까지 니나는 어떤 대가를치렀을까? 이제 나는 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강력한힘과 용기를 요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 앞에 있기란쉬운 일이 아니었다.
- P255

아, 언니는 모를걸. 내가 순종하는 것, 아주 부드럽게 구는것, 명령에 따르는 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이야.
아니야. 나는 부인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너는 꾸며대고 있을 뿐이야. 너는 고집이 세고 자립심이 강한데・・・・・・.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야. 단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모든 사람들은 말해. 니나 부슈만은 현대 여성이고해방된 여성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그녀는 스스로 벌고 아이들을 혼자 키운다. 남자가 필요 없다. 남자처럼 분명히 사고하고 생을 움켜쥐고 마치… 아, 모르겠어. 그러나 이것은 나의한 부분일 뿐이야. 나는 불가피한 것에 대해 현저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것은………. 니나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
- P257

 언니는 한 가지를 잊고 있어. 이 세상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 P267

마이트는 놀리는 얼굴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악의는 없었다. 이보게, 젊은이. 그는 말했다. 그는 나보다 10년위였다. 젊은이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군. 행동은 너무 조금하는 대신.
진부한 말이라 도움이 될 리는 없었으나 사실은 내 불행의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 P326

그녀는 내가 혼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것, 그녀에게 무관심해졌다는 것을 조금도 몰라. 친구여, 여자들은 우리를 항상 실망시킨다네. 그러나 그는 현명하게도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도 여자들을 실망시킨다네. 진정한 결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네. 체념만 있을 뿐이지.
- P327

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억누르면 별로얻을 게 없다고 확신한다. 나처럼 사는 게 틀린 것은 아닌 것이다. 약간은 게으르고, 무심하게, 자신과 타협하고, 특별히 마음 쏟는 일 없이.
- P332

이것은 그녀가 아무리 강력하고 단호하게 부인해도 할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그녀의 본질 중의 한 측면이다. 그녀의 대단한 인내와 참을성의능력으로 미루어 -이러한 특성은 그녀의 발랄한 마녀적인 기질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아마도 실제로는 이 기질과갈등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라 해도 물밑 연대감은 존재한다고 생각될 법하다. (니나의 나에 대한 놀랄 만한 신뢰감도 이러한 고집에서 근거한 것일까.)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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