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기엔 별거 아니겠지만
내겐 그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말입니다.
엘리너 파전
- P5

많이변한 걸까. 요즘 나는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것 같다.
- P7

처음 보는 사람의 눈길에서 사심 없이 우호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왠지 그 다정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 P9

그래요, 당신이 갖고 있어요. 당신 소쿠리에만 소복이 내려 담기던 함박눈.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지 말고 혼자서 다 가지는 하얀 눈 소쿠리. 예뻤겠지만 막상 내가 건네받아도 어떻게 간직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테니까.
- P24

아니, 수안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평균이 있다면 나도 그 정도이길 바랐다. 혼자서 더 행복한 건 어쩐지 불안하고, 남의 행복에서 덜어온 듯해 편치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 P51

그리고 수안이의 아편은, 그 아이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함께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올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수안이는 나를 놓지 않아도 내가 그아이를 놓을 것 같았습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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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자라서 똑같이 파시스트를 낳을 거라구요...."
"우린 같은 사람이잖아.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라고."
- P39

헤인츠는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에바가 보기에 아들은 정말 끔찍하고 두려웠던 일들은 입에 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밤마다 그리고 한겨울 타국의 숲에서 얼마나 춥고 배고팠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 입에 담지 않았다. 
- P45

죽은 채 누워있는 사람들 옆을 무관심하게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죽은 이들은 그냥 차갑게 식어서 고통을 모르는 물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력감, 타협,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본능적 의지 같은 것들만 사람들을 사로잡고, 이런 무관심과 노예들이나 보일 만한 절망감 등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을 누군들 믿을 수 있었을까. 
- P49

무관심이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걸 두고볼 수만은 없다. 자기 자신이 냉담해지게 놔둘 수는 없다.
- P52

마침내 문이 열리더니 러시아 여자가 현관 계단에 모습을 드러내고 독일어로 말했다.
"우리 잘못이 아니야."
그러고는 신문에 둘둘 말린 빵 조각과 병을 건네주었다.
보아하니 보드카 병인 것 같다. 그 병에는 보드카가 아닌 우유가 들어 있다.
- P94

헬무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왜 울어요?"
"너희들 독일 사람이라고 어디 가서 자랑하면 안 돼. 하지만 기억하고 있어야 돼."
- P101

그렇게 소리 지르며 욕하는 모습을 보니 엄마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절망에 빠진 엄마가 눈물을 보였다. 로테가 그러지 말라고 말리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두려운 짐승을 내쫓기라도 하려는 듯 침대에 똬리 튼 뱀처럼 웅크려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 괴물은 며칠을 굶은 배 속에서 생기는 것인가 보다.
- P129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다.
헤인츠는 중얼거렸다. 불도 지폈으니 이제 세상의 모든눈이 녹아내릴 거야.
- P170

담배에 찌든 늙은이처럼 평온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꿈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좋은 날이 올 것이란 기대도 없다.
- P172

하느님, 저에게 벌을 내려 주세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무심하게 살았으니 전 벌을 받아 마땅해요. 하루하루 제게 주어진 인생의 기쁨에 감사하지 못하고 일상의 행복을 가볍게 여겨서 죄송해요. 어떤 벌이든괜찮아요. 이 꿈에서 깨게만 해 주세요. 이 축축하고 생명 없는 겨울에서 저를 꺼내어 주세요. 제 눈을 생명수로 씻어 이전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죽음의 악마들이 스쳐 간 공포가 산산이 흩어지게 해 주세요.... 주님, 전 지금 어디로 가야해요? 전 뭘 해야 하나요......
- P177

그 마음 좋은 사람들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떠돌이 방랑자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시절이다. 러시아 아이들, 독일 아이들, 리투아니아 애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아가 마을과 도시를 떠돈다. 
- P242

전쟁은 흔히 전장에 나가서 싸운 어른들만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지만 엄연히 전쟁으로 희생당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사람들도 있다. (옮긴이의 말)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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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지도 않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작가인 에릭와이너는 저 멀리 있던 철학자들을 내 옆에 친구로,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끌고왔다. 그들의 철학을 깊이 알고 싶게 만들었다. 부제인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이란 표현이 꽤나 적절하다. 기차를 타고 특별한 여행지에서 문득 얻은 그런 깨달음 이랄까.

🛤 작가인 에릭와이너가 따뜻하고 상당히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작가의 시선으로 보고 생각하니, 더 여기서 만나는 철학자들이 가깝게도 느껴졌다. 새삼 왜 이 책이 마음에 들었을까란 이유를, 간디편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과 철학이 같이 있어서였다라는 걸 문득 알게 되었다.

🛤 소크라테스 편은 유쾌했다.

헨리 소로의 월든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나온 표현대로, 나는 다소 헨리 소로가 미니멀리즘이나 자연주의가 조금은 쪼잔하고 비겁하게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만의 월든이라니. 이런 생각은 못했었다.

쇼펜하우어는 참 우울하고 신경질적인데,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에피쿠로스는.. 이 책을 읽은 시점은 작년에 에피쿠로스 책을 읽기 전이었다. 절제를 하고, 넘치는 게 아닌 내게 필요한만큼의 충분한 정도의 행복이라니. 뭔가 내가 원하는 그 철학이었다!

시몬 베유는... 시몬 베유는 가장 마음이 간다. 진정한 관심은 배려이고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한없이 해맑은 사람도 좋지만, 상처가 있고 다른 상처받은 자를 볼 수 있는 자에게 마음이 간다. 나도 상처받은 너그러운 도시에 가보싶다

간디에 대해서는 비폭력이란 것과 엇갈리는 평가들이 있다는 정도의 막연함이 내가 알던 전부였다. 이기고 지고의 결과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는, 요즘 현대에서는 더 순진한 얘기 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지향해 보고 싶다.

🛤 ​마지막 부분이 노인이나 적어도 애늙은이? 같은 느낌의 스토아 학파에, 나이듦의 철학, 죽음의 철학이라니. 이 책의 순서가 잘 되어있단 생각이 든다. 최근 몇 년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일이 많아졌다. 철학에서 이런 부분이 있다니. 좀 더 알고싶다. 그리고 그 대단해보이는 철학자들도 같은 고민을 했다니, 많이도 위로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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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희망도서 대출을 신청하려 던 중 신간중에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내 냥냥 키워드인 연민과 연대를 느낄 수 있을 듯한 제목 이었고, 유명한 주디스 버틀러 교수가 저자였다(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이런 거 모름). 그래서 신청하고 받고 읽었는데... 어렵다. 많이 어렵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걸 남기기 위해 완독하자마자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 책은 미국과 프랑스의 두 정치철학 교수의 2018년과 2022년 대담을 엮은 내용이다. 버틀러는 개인들의 주관적 견해의 공통분모에서 살 만한 삶과 아닌 삶을 구분하고, 보름스 교수는 죽음과 대비한 객관적 조건을 통해 구분한다. 두 교수의 대담은 출발점은 다르지만, 결국 인간의 상호의존성이 필요하고 (그나마?) 민주주의로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합치한다. 마침 작년 12월 미쳤던 그 날 오후, 주디스 버틀러는 경희대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고...참 기가막힌 타이밍. 그리고 12/7 한겨레와 한국민주주의를 위협한 건 윤대통령 자신이라는 인터뷰를 한다.

🫂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일까, 생존 이상일까? 당연히(?) 두 번의 대담 모두 생존 이상이라고 진행된다. 이 책은 끊임없이 두 교수가 서로에게 묻고, (그리고 내 생각엔) 독자에게 묻는다. 단순히 생존을 넘는 사항이라면, 무엇이 필요한 거냐고.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냐고. 그래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겠지. 나도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보았다. 요즘 나의 관심사와도 겹치는 거라. 완전히 다른 얘기지만 나는 삶은 의미가 없어 보여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요 근래 몇 년째 하고 있다.

🫂 나중에 두 교수님들이 큰 방향은 합치가 되나...대담에서 나온 의견의 차이때마다, 보름스 교수 의견에 조금 더 마음이 갔다. 내 마음이 더 가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냥 주디스 버틀러 교수는 좀 무섭다🥲 보름스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런데 뭐든 명확하게 경계를 지을 수 있을까? 책 읽는 내내 끄덕거렸음에도 보름스 교수의 살만하다vs그렇지않다를 나누는 객관적 요인은 그냥 심적으로 아닌 듯 하다. 무지개를 정확하게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물론 이 대담에서 나의 허접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 최근 읽은 소설, 에세이에서 말하는 걸 여기서도 보았다. 물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위해 고른 책이긴 하지만. 두 분의 대담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발견했다. 작년 가을 읽었던 인문학서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지금 사회구조는 서로에게 의존하는 공통의 것이 많다. 결국 다른 이들의 삶이 살 만해야 내 삶도 그렇다. 좀 더 감성적이고 동양적으로 말한다면, 그래서 연민은 단지 연민이 아니고 연대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건 내가 작가 소개나 프로그램 소개 시 늘상 하는 멘트. 연대가 너무 과한 느낌이면 이 책에 나온대로 ‘돌봄‘정도로 하자. 어려우니 여기서 기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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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삶도 역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삶은 살 만하지 못한데도 살아 있는living 삶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했듯, "바로 이런 이중적 의미가 이런 삶도 아직 소멸되지 않았으며, 바로 살아있다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정식으로 요구하고 주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7

두 사상가는 자신들의 철학적 접근 방식을비교하며, 이런 중대한 비상사태를 전환해서 정치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하는 확실한 주장으로 바꿀 가능성을 환기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살 만한 삶의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P9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고, 어떤 애착 관계도 폭력과 침해의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모든 돌봄 실천은 권력의 역학관계에 스며들어 있다.
- P15

특히 캐럴 길리건 Carol Gilligan의 돌봄이론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 타인을 돕고 지원하려는의지가 정의justice에 관한 이론에서 주변적인 게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 P16

보름스는 돌봄을 "주체적이고, 나아가 주체성을 창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이런 관계가 없이 우리는 개인이 될 수 없다)라고 정의한다. 돌봄은 도덕적이면서 사회적인 관계이며, 그렇기에 이미 정치적인 관계이다. 즉 돌봄은 세상과의 관계이고, 똑같이 자연적이면서 문화적이고, 생태적이면서 정치적인 세상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 P17

버틀러는 젠더에 관한 초창기 저서에서부터 특정한 사회규범이 어떻게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사회적 인정의 가능성에서 배제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 만한 존재를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수단을 박탈하는지 보여주려 했다.
- P18

보름스와 버틀러는 서로 반대편에서 출발했지만, 두 사람의 사회정치적 성찰이 살아 있는 삶의 사회철학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 P23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삶이 진정으로 살 만한 것이 되려면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 P31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 P33

궁극적으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즉살만하지 않음과 죽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 P37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의 삶이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 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 P39

인간의 삶이 죽음에 맞서 살아 있는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듯, 그것은 또한 모든 의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모든 생기적 차원에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준비하면서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맞서 살 만한 삶을 돌보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 P42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어 하죠. 삶의 모든 차원(생물학적, 상호주체적, 창조적, 상징적 차원 등)이 통합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 P46

그들이 삶을계속 살아간다 해도,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계속 산다는 것은 회복탄력성과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니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사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회복탄력성"이라는 용어가 현실을 부정하고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작용을 해서,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너무 급히 회복의 가능성을 보고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 P56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 P59

제가 맞다면, 살 만한 삶의 상호주체적 조건은 타인의 삶에 대한 나의 일종의 의무를 암시하며, 그 타인 역시 나에게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 의무는 개인을 정의하고, 개인의 주장을 탈중심화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조건을 명시한 계약서가 없더라도 나의 삶은 당신의 삶과 묶여있습니다. 
- P60

이런 기독교적 가치는 경제적 황폐화와 궁핍을보상하기 위해서 매우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 여성의 돌봄노동 개념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돌봄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P69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단지 "여기에 무언가 살 만하지 않은것이 있다고 느껴져"라고 말하고 나서 상황을 분석하고, 그다음에 누군가가 "그래, 이것이 그들에게 살 만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바로잡고 도와주고 돌봐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는 것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P89

제가 보기에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양가적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바깥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 P91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을 재개할 때,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 면역이 약한 사람들, 신체적 조건이나 감염 민감성 때문에 아직 쉽게 세계를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수‘의 이름으로 버려지거나 희생되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잔인한 공리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 P91

우리는 마치 세계의 이런 지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눈길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 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 P99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함께하는 행동 속에서만 서로에게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계 저편의 어떤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이 내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요.  - P106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P109

하지만 적어도 살 만함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P111

그래서 제 생각에 개인의 자유라는 발상에는 일종의 죽음 충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죽음 충동은 대개 도망자처럼 행동합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것에 붙어서, 심지어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 P123

"이건 나의 삶이라고, 나는 원하는 대로 할 거야. 그 때문에 타인이 죽고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말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음 충동에 휘말려서, 삶의 이름으로 위해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삶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삶은 공통된 취약성과, 상호의존성과, 살만함에 필요한 최소치의 확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P124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순간, 그게 여러분의 죽음이건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죽음이건, 그것은 삶의 의미에 전반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저는 그것이일반적인 배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패배이기도 한 전반적인 침해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애도의 슬픔이나 애도 가능성이라고 부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재도입해볼 수 있을까요?  - P128

버틀러: 맞아요. 슬픔은 살아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 P129

반면 삶이라는것은 삶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살아 있는 것을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삶을 소유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소유의 삶인데 말이죠.
- P130

나는 내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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