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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빈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눌러가며 문장을 만들어내는 이 행위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본다. 밥을 주지도,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않는 이 일이 왜 이렇 게 간절한가. 그런데 이상하다. 이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카페에서 들리는 대화의 조각, 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도 모든 것이 잠재적인 이야기의 씨앗처럼 느껴진다. 마치 세상 전체가 거대한 원고지가 된 것 같다. 양다솔의 편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쓰는 사람은 정말 다르게 산다. 조금 더 살금살금 걷고, 시선이 더 오래 머물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한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마트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항 상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겪은 실패의 맛, 내가 느낀 상실의 무게, 내가 스쳐간 순간들의 온도까지도 모두 나만의 것이다. 어제 오래된 친구와 통화를 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시절을 보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간은 전혀 달랐다. 그녀에게는 찬란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나에게는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같은 교실, 같은 선생님, 같은 급식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그 외로움도, 복도 끝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던 그 시간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내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실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삶에서의 실패는 여전히 아프고 견디기 힘들지만, 글 속의 실패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의 좌절처럼, 소설 속 인물의 넘어짐처럼, 거리감이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난해 준비했던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경험을 글로 쓰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절망적이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지면서, 동시에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낸 나 자신, 포기하지 않았던 작은 희망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배운 것 들이다. 글을 쓰는 것은 실패를 가지고 노는 것 같다. 조물주가 점토를 빚듯이, 나의 좌절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고, 다른 각도에 서 조명을 비춰보고, 때로는 유머로 포장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된다.
가장 쓰기 어려운 것이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떠나간 사람들, 잃어버린 시간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들. 그런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하면 먼저 내 마음이 먹먹해진다. 정말 이런 사적인 아픔을 남들이 읽어도 되는 걸까, 하는 주저함도 든다. 하지만 써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거대했던 상실이 글자 수만큼 작아진다. 마치 어둠 속의 괴물이 불을 켜면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처럼. 글로 쓰인 상실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쉼터가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 그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아파서.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할머니의 손등에 있던 검은 점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갔다. 그 작은 점에서 시작해서 할머니의 일생으로, 그리고 나와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그렇게 쓰고 나니 할머니가 떠나신 게 아니라 글 속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빈 문서 앞에 앉으면 막막하다. 하얀 화면과 깜빡이는 커서가 주는 압박감은 언제나 똑같다. '오늘은 뭘 써야 하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혹시 쓸 만한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닐 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 때, 양다솔의 말이 떠오른다. 막막한 만큼 좋은 이야기가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가장 쓰기 싫은 날에 쓴 글이 의외 로 좋을 때가 있다. 아무 영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어디선가 문장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지하수처럼, 보이 지 않는 곳에서 계속 흐르고 있던 이야기들이 말이다.
양다솔님이 상상하는 그 도서관을 나도 그려본다. 우리가 쓴 이야기들로 가득 찬 공간. 거기서는 결코 귀를 막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누구의 이야기든 환영받는 곳, 어떤 목소리든 들을 수 있는 곳. 내가 쓴 글들도 언젠가 그 도서관의 한 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조금 더 경건해진다. 글쓰기는 끝이 있으면서도 없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면 끝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삶이 계속되는 한 쓸 이야기도 계속 생겨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빈 문서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나처럼 막막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첫 문장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 양다솔의 편지가 닿기를, 그리고 내 이야기도 작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 빈 문서의 깜빡임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그것은 곧 시작될 이야기의 신호등이다. 초록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오늘도 그 깜 빡임을 바라보며 첫 문장을 준비한다. 양다솔님께 받은 정말 좋은 편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