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묘한 한국사
김재완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언제나 무겁고 딱딱한 학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연도를 외우고, 왕조의 순서를 암기하며, 중요한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목,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내게 <기묘한 한국사>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와의 만남을 선사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느낌은 마치 오래된 보물상자를 열어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형화된 역사 서술과는 전혀 다른,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사의 '비주류'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가 암기 과목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드라마임을 보여준다.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명작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여정은 미술품의 이동사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문화재에 대한 애정, 민족적 자존심, 그리고 한 서예가의 절절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1944년, 조선 최고의 서예가 손재형이 일본에 건너가 후지츠카를 설득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돈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이다. 세한도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이 간절한 외침 속에서 우리는 민족의 혼이 담긴 문화유산을 되찾으려는 한 사람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으로 완결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순간, 역사가 옛날이야기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실감하게 된다.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라 여겨온 이 비석이 현재 중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도 사실은 여러 해석과 관점이 존재하며,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산송 이야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고려시대 재상 윤관 장군의 잃어버린 묘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이 갈등은 가문의 명예, 조상에 대한 예의, 그리고 조선시대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보여준다. "우리 문중을 대표하는 윤관 장군의 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건 가문의 수치다." 이런 절실함이 결국 살인 사건까지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 사람들에게 조상과 가문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경종의 갑작스러운 죽 음을 둘러싼 의혹은 조선왕조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곶감과 게장을 먹은 후 몸이 아픈 경종에게 어의는 인삼 복용을 금했지만, 연양군(훗날 영조)은 강력하게 인삼을 권했다. 결국 인삼을 복용한 다음 날 경종은 승하한다. "교묘한 독살인가, 무지에 의한 사고사인가, 게장이나 인삼과 상관없이 경종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저자의 이런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 속 진실을 추리하게 만든다. 정답이 없는 역사의 미궁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해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하게 된다. 조선시대 내내 금서로 분류되었던 정감록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진인 정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는 예언서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정씨'라는 성씨 자체가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등 조선에서 금기시된 인물들의 성씨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 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심리와 당시 사회의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 있었던 시대, 글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사 속 인물들을 완벽한 성인이나 절대악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낸다. 욕심도 있고, 실수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들 말이다. 특히 친일파 최린이 재판장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나를 여기서 재판하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광화문 사거리로 끌고가 황소 네 마리로 나의 사지를 찢어 죽이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의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는 선악구도를 넘어선 인간의 복잡함을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과거의 이야기들이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저자의 시각이었다.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묘지 소송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재의 부동산 분쟁과 비슷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고, 정감록 같은 예언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서는 현대의 가짜뉴스나 음모론의 확산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역사가 암기해야 할 딱딱한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현재 우리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비주류' 이야기들은 오히려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왕조의 흥망성쇠나 큰 전쟁보다도, 개인들의 작은 선택과 갈등, 욕망과 좌절이 역사 의 진짜 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이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역사가 결코 지루하고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장 흥미진진한 인간 드라마가 가득한 보물창고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묘한 한국사>는 그런 보물들을 하나씩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책에서 다룬 이야기들 외에도 우리 역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궁금증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공부의 시작점이 아닐까. 이제 역사책을 펼칠 때마다 시험을 위한 암기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만나러 가는 설렘을 느끼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