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상식파괴로 경영하라
사카이 다이스케 지음, 정지영 옮김 / 시그마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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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본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돈키호테를 들렀을 것이다.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인 상품들, 형광색 손글씨 광고문으로 뒤덮인 벽면,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통로. 첫인상은 '어지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선가 예상치 못한 물건이 튀어나올 것 같고, 다음 코너를 돌면 또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공간이 실은 치밀하게 설계된 '구매 경험'이라는 사실을, <돈키호테, 상식파괴로 경영하라>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은 현대 경영학의 정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하나의 실험 보고서에 가깝다. 표준화, 효율화, 매뉴얼화로 대표되는 체인점 경영의 상식을 돈키호테는 정반대로 뒤집어놓는다. 각 매장은 제각각 다르고, 점원들은 스스로 가격을 정하며, 실패한 상품을 대대적으로 광고한다. 이런 '비상식'이 어떻게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돈키호테 성공의 핵심은 '권한위임'이라는 단순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원칙에 있다. 창업자 야스다 다카오가 정립한 '원류'라는 경영 철학서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사람은 자신이 주역이 되어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에 진지하고 열심히 한다." 이것은 경영 이론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대부분의 기업은 성장할수록 통제를 강화한다. 본부에서 만든 매뉴얼을 전 지점에 똑같이 적용하고, 의사결정 권한은 위로 올라간다. 효율적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현장의 창의성과 열정은 소멸한다. 반면 돈키호테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아르바이트생도 상품 매입과 가격 책정에 참여하고, 점장은 지역 특성에 맞춰 매장을 자유롭게 구성한다. 본부의 인공지능이 권장 가격을 제시해도, 최종 결정은 현장 직원의 '감'과 '경험'에 맡긴다. 이런 접근의 결과는 놀랍다. Z세대를 타깃으로 한 '키라키라돈키' 점장은 20대 초반 아르바이트 출신이다. 그는 자신과 동년배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입구 진열을 자주 바꾸고 의견상자를 통해 즉각 피드백을 받는다. 만약 본부에서 하달한 매뉴얼대로 운영했다면, 이런 섬세한 대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실패마켓'은 이 회사의 독특한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매입에 완전히 실패한 상품들을 모아 대대적으로 세일하는 이 이벤트는, 아무리 팔아도 적자다. 그런데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실패했다는 것은 리스크를 감수했다는 증거"라는 메시지를 조직 전체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일반 기업에서 실패는 숨기고 싶은 치부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실패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오히려 도전의 증거로 축하한다. 이런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직원들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신선한 딸기가 싱가포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것도, 누군가 '한번 해보자'는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를 질책하는 문화였다면, 검증되지 않은 시도는 애초에 제안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밀리언 스타 제도'라는 인사 시스템도 같은 맥락이다. 젊은 직원에게 3~6개 점포를 맡기는 이 과감한 발탁은, 실수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앤서맨'이라는 지원 조직을 만들어 현장의 고민을 경청하고 빠르게 개선한다. 권한을 주되 방치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마지보이스'는 고객 의견 수렴을 넘어 고객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혁신적 시도다. 고객 평가가 낮은 상품은 개선을 거듭해야 하고, 개선하지 못하면 판매 중단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상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돈키호테는 그 권한을 고객에게 넘긴다. "상품의 명운은 고객이 쥐고 있다"는 선언은 수사가 아니라 실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더 놀라운 것은 '마지가격'이다. 고객 평가가 높은 상품을 대폭 할인하는 이 제도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잘 팔리는 상품이라면 굳이 가격을 낮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돈키호테의 논리는 다르다. 고객이 좋다고 말하는 상품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신뢰를 쌓는다. 단기 수익보다 장기 관계를 택한 것이다. '마지매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돈키호테 자체 브랜드 상품에 불만이 있으면 환불해주는 이 서비스는, 고객의 시험 구매를 촉진한다. 자신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끊임없는 개선을 약속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고객과의 쌍방향 소통이 상품 개발의 핵심이 되면서, 돈키호테의 오리지널 상품들은 시장에서 독특한 위치를 확보해간다.


돈키호테의 또 다른 특징은 일을 '게임'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D철(디스플레이 철인)' 이벤트는 압축 진열 능력을 겨루는 경연대회인데, 연차나 직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해 영웅이 될 수 있다. 모든 점포의 매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공개되어 순위가 매겨지지만, 직원들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역전을 노리며 경쟁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명확한 룰과 공정한 기회 때문이다. 승패 기준이 투명하고, 시간 제한이 있으며, 대폭의 자유재량권이 주어진다. 마치 잘 디자인된 게임처럼, 직원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에서 몰입한다. "돈키호테에서 일하는 묘미는 축제의 느낌"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이유다. 'Z스타일 실험실'도 흥미롭다. 전국의 젊은 직원들이 느슨하게 모여 잡담하듯 회의하는데,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실제 상품으로 연결된다. 공식적인 기획 회의보다 이런 비공식적 대화에서 더 참신한 발상이 나온다는 것을 돈키호테는 알고 있다. 그래서 구조를 만들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돈키호테 매장은 겉보기엔 극도로 아날로그적이다. 손글씨 광고문, 삐뚤빼뚤한 진열, 예측 불가능한 동선.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치밀한 디지털 전략이 숨어 있다. 자회사 페하미디어는 실제 구매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20대 여성에게만 맞춤 광고를 보여준다. 타깃팅 정밀도가 일반 광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격밀 시스템'이라는 AI는 방대한 판매 데이터를 학습해 권장 가격을 제시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다. AI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자신의 판단으로 다른 가격을 매길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이 다시 AI 학습 데이터가 되어 정확도가 높아진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력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균형감각은 돈키호테의 강점이다. 효율만 추구하면 재미가 사라지고, 감성만 따르면 경쟁력을 잃는다. 돈키호테는 데이터로 방향을 잡되, 실행은 사람의 손끝 감각에 맡긴다. 그래서 매장마다 다르면서도 일관된 '돈키호테다움'이 유지된다.

돈키호테의 성공은 여러 역설로 가득하다. 통제하지 않는데 통제되고, 혼란스러운데 질서가 있으며, 비효율적인데 효율적이다. 가장 큰 역설은 '확장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체인 사업은 표준화를 통해 확장한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각 매장의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전국, 나아가 해외로 뻗어나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제하는 것이 '형태'가 아니라 '철학'이기 때문이다. 야스다 다카오의 '원류'는 구체적 매뉴얼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프레임이다. "주어를 전환하라", "고객 최우선주의", "현장에 권한을" 같은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 싱가포르의 돈돈돈키에서 군고구마와 딸기로 돌파구를 찾은 것도, 북미의 도쿄 센트럴이 일본 식품으로 차별화한 것도, 같은 철학의 다른 표현이다. 종합슈퍼마켓 유니의 인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돈키호테는 유니를 통합하지 않고, 대신 권한위임 철학을 이식했다. 파트타임 주부 직원들이 가격을 제안하는 '가격총선', 빈 공간에 동네 전자제품점을 넣는 직영 도전, 각 매장별 맞춤형 상품 구성. 유니는 돈키호테가 되지 않으면서도 돈키호테의 DNA를 흡수했다. 결과는? 적자에 허덕이던 종합슈퍼마켓이 수익 체질로 전환되었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많은 오프라인 매장이 문을 닫았다. 편의성과 가격에서 온라인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팽배하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오프라인 매장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경험을 파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편의 + 저렴함 + 즐거움'이라는 공식에서 마지막 요소가 핵심이다. 온라인은 편의와 가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물리적 공간만이 줄 수 있다. 돈키호테의 미로 같은 동선, 예상 밖의 상품 발견, 축제 같은 분위기는 디지털로 복제할 수 없다. 시부야의 복합시설 '도겐자카도리'가 그 자체로 관광지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 장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점원들이 진심으로 재미있게 일하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공간에 스며든다. 억지로 만든 즐거움은 금방 티가 나지만, 자발적 열정은 전염된다. 돈키호테 직원들이 "복귀율"이 높고, 아르바이트에서 간부로 성장하는 비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 자체가 보상이 되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스다 다카오의 은퇴는 상징적이다. 그는 회사가 가장 잘 나갈 때 물러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핵심 업무가 늘어나 복잡해지면서 권한위임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회사가 성장할수록 창업자의 개입은 줄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원류'라는 책으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체계화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는 단기적으론 효율적이지만 지속 불가능하다. 대신 철학을 공유하고, 각자가 그 철학을 자기 방식으로 실천하게 하면, 리더가 없어도 조직은 굴러간다. 야스다 이후의 돈키호테가 여전히 성장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현대 리더십 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명령과 통제의 리더십에서 방향 제시와 권한 부여의 리더십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리더는 막상 손을 놓는 것을 두려워한다. 야스다의 용기는 여기에 있다. 밀리언 스타 제도로 젊은 인재에게 과감히 기회를 주고, 앤서맨으로 안전망을 마련하되, 근본적으론 현장을 믿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돈키호테를 모방한 업체들이 나타났지만 대부분 사라졌다. 겉모습은 비슷해도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빼곡한 진열과 손글씨 광고를 흉내 낼 순 있지만, 권한위임 문화와 실패 허용 정신은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한국 기업 문화는 여전히 수직적이고 통제 중심적이다. 본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미덕이고, 실패는 곧 책임 추궁으로 이어진다. 이런 환경에서 현장 직원이 창의성을 발휘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돈키호테의 사례는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전략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돈키호테도 대기업화되면서 위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이 느려지고, 부정이 발생하고, 매출 증가율이 둔화되었다. 바로 그 순간 야스다는 밀리언 스타 제도라는 파격적 개혁을 단행했다. 문제를 감추거나 미루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 것이다. 이런 위기 대응 능력도 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점이다.


돈키호테의 성공은 '신뢰'로 요약된다. 창업자는 직원을 믿었고, 직원은 고객을 믿었으며, 고객은 다시 돈키호테를 믿게 되었다. 이 선순환이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일본 경제 침체기에도 우상향 성장을 이뤘다. 신뢰는 말로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권한을 넘기면 실수가 생길 수 있고, 실패를 용인하면 단기 성과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 리스크를 감수했고, 그 대가로 지속 가능한 성장 엔진을 얻었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CEO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조직, 이것이 궁극의 경쟁력이다. "사람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이라는 돈키호테의 모토는 교육학이 아니라 생태학에 가깝다. 좋은 토양을 만들고, 햇빛을 쬐게 하고, 물을 주되, 어떻게 자랄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그래야 각자의 개성이 살고, 그 다양성이 조직 전체의 적응력이 된다. 오프라인 매장의 미래가 어둡다고들 한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보면 희망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리적 공간에서의 경험을 갈구한다. 단, 그것이 의미 있고, 즐겁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기계적으로 정렬된 매장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과 생각이 느껴지는 공간이어야 한다. 돈키호테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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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아들러를 만났을 때 - 금강경으로 배우는 마음 청소법
우뤄취안 지음, 하은지 옮김 / 이든서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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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소극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상으로 오해한다. 260자의 心經에 등장하는 21개의 '무(無)'자를, 5000여 자의 金剛經이 말하는 공성(空性)을 "모든 것이 헛되다"는 염세적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吳若權은 책을 통해 이러한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불교 경전들이 말하는 '공'의 본질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함으로써, 불필요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적극적인 가르침이다. 세상 만물이 결국 공허하게 끝난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체 없는 환상이었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이 적극적이고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소극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위급한 순간에는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선택이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운동과 식이조절이 적극적이지만, 중풍과 암을 앓는 고령의 환자가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재활치료를 받는 것 역시 매우 적극적인 행위다.

저자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은 '내려놓음(放下)'과 '포기(放棄)'의 구분이다. 이 둘은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태도다. 내려놓음은 번뇌와 집착을 끊어내는 훈련된 능력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성숙한 자세다. 반면 포기는 책임과 기대를 아예 던져버리고 외면하는 도피다. 완전히 누워버리는 '躺平'의 태도인 것이다. 저자는 강조한다. 불교가 가르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최선을 다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과정에서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 실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반대로 살아간다. 과정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에 대해서는 깊은 후회와 슬픔에 빠진다.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다. 또 다른 부류는 스스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느끼는 한탄이다. 이들의 유감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수백 배 더 크다. 과도한 노력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낳는 역설적 상황이다. 저자는 개인의 노력 정도를 절대적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진정으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이 이미 결정된 후에는, 전력을 다했든 아니든, 결과가 만족스럽든 아니든, 거기에 신경 쓰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반응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번뇌만 더할 뿐이다.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만 해탈할 수 있다.

저자의 통찰은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과 중풍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는 가족 돌봄자로서 거의 30년을 보냈다.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이었다. 아버지가 80세에 갑작스럽게 심장 이상으로 입원하고 4개월 만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저자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도 중풍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고 생계를 위해 일을 계속해야 했다. 친구가 "어떻게 그렇게 버티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유감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깨달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심지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노력해도, 여전히 유감은 남는다는 것을. 깊은 밤이면 여전히 "그때 내가 조금만 더...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자책에서 자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과거를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직행열차 같다. 밤낮으로 왕복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최선을 다하면 유감이 없을 것이라 믿었지만, 어떻게 하든 큰 유감이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유감은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감정적으로 채찍질한다.

내려놓기는 정말 어렵다. 특히 노력했던 사람들에게 '내려놓기'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당사자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떻든 과거로 돌아가 구하거나 보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 자체가 망념(妄念)이다. 불교가 진정으로 가르치는 것은 '내려놓기'이지 '포기'가 아니다. 내려놓음은 번뇌와 걱정을 끊어내는 것으로, 훈련을 거쳐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면 포기는 책임과 기대를 직접 내팽개치고 방치한 후 완전히 주저앉는 것이다. 저자는 "노력했던 유감"과 "노력하지 않았던 유감"은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의 고통은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후자의 고통 또는 고통 없음은 모두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온다. 저자의 주제인 捨得自己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捨得'은 버릴 수 있음을, '得'은 얻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자신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들어올리는 능력을 훈련해야 내려놓을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책임을 감당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진정으로 내려놓을 수 있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성숙한 인간의 자세다. 불교의 공(空) 사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친다. 세상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우리가 불필요하게 매달리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메시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사상으로 오해하게 된다.

책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실용적인 삶의 지혜를 제공한다. 매 순간을 붙잡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되, 그 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진정한 적극성이다. 우리는 종종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하지만 모든 현상은 무수한 조건들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의지만으로 완전히 결정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공(空)의 이해이며, 여기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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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월든 - 정여울이 직접 걷고, 느끼고, 만난 소로의 지혜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해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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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게 살 것, 깨어 있을 것,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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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월든 - 정여울이 직접 걷고, 느끼고, 만난 소로의 지혜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해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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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다섯시 반, 알람이 울린다. 눈을 뜨자마자 손은 스마트폰을 찾고,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알림들이 아직 채 깨지 않은 의식을 재촉한다. 출근 준비를 하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고, 지하철 안에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듣고, 확인한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피곤하다는 것, 뭔가에 쫓기듯 살았다는 것만 남는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문득 그런 질문이 가슴 한쪽을 무겁게 짓누르는 순간들이 있다. 정여울 작가의 <다시 만난 월든>을 펼친 것은 그런 날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소로의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소로의 이 한 문장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출근해서 퇴근하고, 주말이 되면 밀린 잠을 자고, 월요일이 되면 다시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작가는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은 이유를 '뒤집지 않은 카드'를 끝내 뒤집어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진짜 나 자신의 모습. 그 카드는 내 삶 어딘가에도 뒤집히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해야 한다'는 말에 익숙해졌을까.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하고. 그 수많은 '해야 함'의 무게 아래에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점점 작아져갔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소로는 숲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저 삶의 본질에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간결하게, 가장 깨어 있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뼈에 가까운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나면 남는 것, 그것이 진짜 내 삶의 뼈대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고독에 대한 해석이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주말에 혼자 집에 있으면 왠지 외롭고 쓸쓸한 사람 같고, 혼자 밥을 먹으면 뭔가 결핍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려 한다. 메신저 알림이 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SNS에 올린 게시물에 반응이 없으면 무시당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여울 작가는 고독을 '소외'가 아닌 '창조의 원천'으로 해석한다. 진정한 거리는 배제가 아니라 연결을 위한 여백이라고. 이 문장을 읽을 때, 혼자 있는 시간에 느끼던 죄책감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혼자 있는 것이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었다. 소로에게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 또 하나는 교제를 위한 것. 나는 나를 위한 의자를 가지고 있었던가. 늘 누군가를 위한 자리만 마련하느라, 정작 나 자신이 온전히 앉을 자리는 없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월든 존'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적 시선과 감정노동에서 잠시 벗어나,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내면의 공간. 그것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어도 좋다. 카페 한켠, 새벽의 산책길, 텅 빈 지하철 좌석에서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곳이 나만의 월든이 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월든 존을 찾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일부러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천천히 걷는 시간,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작은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 그 짧은 순간들이 하루의 색깔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걸으며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들이 조금씩 가라앉고, 바람의 감촉과 나뭇잎의 움직임이 내 감각을 일깨웠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고 있었다. 업무를 처리하고 메시지에 답하고 미팅에 참석하는 동안 나는 숨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월든 존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 월든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든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소로가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었듯, 나도 내 마음속에 작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곳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이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다. 정여울 작가는 소로를 통해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지혜를 전한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려놓는 것,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속도를 찾는 것, 더 많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놓아야 평온해지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성공의 기준도 달라졌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삶이 진짜 성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여전히 조급해질 때가 있고, 남과 비교하며 초라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마다 나만의 월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다.

삶이 버거운 시대다. 팬데믹 이후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고, 불확실성은 커졌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월든이 필요하다. 변하지 않는 것들, 본질적인 것들로 돌아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로는 150년 전에 살았지만, 그의 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소로의 메시지가 더욱 절실한 시대인지 모른다. 간결하게 살 것, 깨어 있을 것,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준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점심시간에 공원을 걷는 순간, 저녁에 책을 읽으며 고요 속에 머무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나의 월든이다. 그리고 그 월든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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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가족 - 각자의 알고리즘에 갇힌 가족을 다시 연결하는 법
이은경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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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녁 여섯 시, 한 가족의 거실 풍경이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훑는다. 어머니는 태블릿으로 내일 저녁 메뉴를 검색한다. 중학생 아들은 방에서 게임을 하고, 고등학생 딸은 침대에 누워 숏폼 영상을 넘긴다.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에 있지만, 각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접속해 있다. 이것이 바로 교육 전문가 이은경이 <도파민 가족>에서 경고하는 현대 가족의 초상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다. 언제 어디서든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고, 화상통화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며, SNS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절되어 있다. 특히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망 안에서 말이다. 이은경은 이 현상을 세대 차이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뇌과학과 심리학의 렌즈를 통해 이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파헤친다.


도파민은 본래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신경전달물질이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발견하면, 위험을 감지했을 때 도망치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면 뇌는 도파민을 분비하며 "이것은 중요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 시스템은 수십만 년 동안 인류가 살아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는 이 고대의 메커니즘을 철저히 악용한다. 게임의 레벨업, SNS의 알림, 유튜브의 자동재생, 숏폼의 무한 스크롤—이 모든 것은 우리 뇌의 보상 회로를 의도적으로 자극하도록 설계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자극이 실제 생존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화면을 보며 무언가를 성취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의미 없는 자극의 연속에 노출될 뿐이다. 이은경이 지적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이 게임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미성숙한 전전두엽을 가진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다. 마치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더 심각한 것은 어른들의 상황이다. 이미 발달이 완료된 뇌를 가진 성인조차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학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다.

저자가 제시하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중고생 자녀를 둔 가정의 열 집 중 일곱 집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화면에 빠져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정작 부모 자신도 자신의 하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오지만, 서로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이은경은 '조용한 단절'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가족 갈등은 적어도 소리를 동반했다. 다툼이 있었고, 감정의 충돌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단절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누구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그 침묵 아래에는 점점 깊어지는 정서적 공백이 자리한다. 가족 치료학에서 말하는 '정서적 무시'가 바로 이것이다. 눈에 띄는 학대나 폭력이 없어도 사람을 서서히 고립시키는 상처가 있다. 감정을 나누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무시되면, 뇌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감정은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안으로 웅크린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시간이 지나며 오해로 굳어지고, 결국 관계의 균열로 이어진다.


저자는 특별히 식사의 의미에 주목한다. 가족의 다른 이름인 '식구'는 말 그대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수많은 일상적 경험 중에서도 식사는 가족 관계의 중심축이었다. 함께 준비하고, 기다리고, 마주 앉아 나누는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직조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파민에 최적화된 현대 사회는 식사를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배달 앱 하나로 음식이 도착하고, 각자 원하는 것을 주문하며, 먹는 동안에도 각자의 화면을 본다.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식사가 가진 관계적 의미는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식탁은 여전히 거실에 있지만, 그 주위에 모여 앉아 하루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식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느림의 경험이 사라진다는 것은 관계의 리듬을 잃는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빠르고 즉각적이어야 하는 세상에서, 기다림과 지루함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관계는 본질적으로 느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나누고, 신뢰를 쌓는 일은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거실의 속도가 결국 사회의 속도를 결정한다고. 느림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조급한 사회 구성원이 되고, 그런 구성원들이 모인 조직은 더 바쁘고 피로한 구조를 만든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시작점은 바로 가정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감정 표현이 자유로운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 이모티콘이 넘쳐나고, 리액션은 무궁무진하며,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온라인에 쏟아낸다. 하지만 이은경은 정반대의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감정을 가장 피상적으로 축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노잼", "좀 그랬다", "별로". 이런 표현들은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한두 단어로 압축한다. 서운함, 실망, 섭섭함, 불편함, 당혹스러움 등이 있다. 이 모든 미묘한 감정의 결들이 "좀 그랬다"는 말로 뭉뚱그려진다. 단어는 넘쳐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정확히 설명할 언어는 빈곤해지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감정 어휘와 정서 지능이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은 그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의 출발점이다. 반대로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으면, 그 감정은 명확한 형태를 갖지 못한 채 막연한 불편함으로만 남는다. 이것이 누적되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도 공감하지 못하는 정서적 문맹 상태에 이른다.


SNS는 단순한 소통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공개된 평가 시스템이다. 좋아요 수, 조회수, 팔로워 수—이 모든 지표는 나의 일상이 타인에게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저자가 지적하듯, 은밀하고 사적인 감정이었던 부러움은 이제 구조화된 시스템이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가족 관계에도 침투했다는 점이다. "우리 가족만 맨날 집에 있네?", "다른 집 보니까 우리 애들한테 미안해"..이런 말들은 비교의 피로가 의무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가족 여행은 더 이상 휴식과 회복의 시간이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콘텐츠가 된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떻게 찍느냐가 중요해지고,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보다 완벽하게 기록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저자는 이것을 '가족 여행이라는 스펙'이라고 표현한다. 가족의 행복과 휴식이 보장되어야 할 시간이 타인의 평가 대상이 되고, SNS 피드 속 경쟁의 소재로 변질된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 뒤에는 종종 부모 자신의 불안이 숨어 있다. 아이가 잘되면 부모가 덜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날카롭게 묻는다. 사랑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부모가 아이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동기가 실은 부모 자신의 안도를 위한 것이라면, 아이의 뇌는 그것을 정확히 감지한다고 이은경은 설명한다. 마음은 감정을 속일 수 있지만, 뇌는 절대 속지 않는다. 도파민 시스템은 진심과 거짓을 본능적으로 구별한다. 성취 강박에 빠진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명상 기법이나 자기계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분위기다. 그 분위기는 자잘하게 반복되는 '괜찮음'에서 만들어진다. 실수해도 괜찮고, 느려도 괜찮고, 뒤처져도 괜찮다는 메시지. 그것이 반복될 때 비로소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가 강조하듯, 이것은 가족의 정서적 면역력이다. 끊임없이 성취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멈춰도 되고 실패해도 되는 안전한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이 가족다운 이유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저자의 답은 명확하다. 부모가 먼저 화면에서 로그아웃해야 한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면서 정작 부모 자신은 식사 시간에도 휴대폰을 확인한다면, 그 어떤 교육적 메시지도 힘을 잃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본다. 부모가 화면에서 벗어나 아이와 눈을 맞추기 시작할 때, 아이의 전전두엽에도 정지선이 생기기 시작한다. 멈춰 있던 관계의 회로가 다시 작동한다. 도파민이 자극을 통해 쾌락을 강화한다면, 옥시토신은 연결을 통해 안정감을 만든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자극이 아니라, 느린 리듬의 관계 회복이다.

거창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온 가족이 스마트폰 없이 저녁을 먹는 것, 자기 전 10분간 서로의 하루에 대해 묻는 것, 주말에 함께 걸으며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쌓일 때 관계는 회복된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아이의 뇌를 설계하는 것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탁의 대화라는 것. 자극보다 관계의 힘이 세질 때, 아이의 뇌는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부모의 결단이다.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디지털 자극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안전한 연결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파민이 아이의 뇌를 지배할 때, 아이를 지키는 유일한 연결망은 가족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잠시 멈추고, 화면을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묻지 않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 채워지는 특별한 공간. 우리가 그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은 가족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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