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특별히 식사의 의미에 주목한다. 가족의 다른 이름인 '식구'는 말 그대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수많은 일상적 경험 중에서도 식사는 가족 관계의 중심축이었다. 함께 준비하고, 기다리고, 마주 앉아 나누는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직조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도파민에 최적화된 현대 사회는 식사를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배달 앱 하나로 음식이 도착하고, 각자 원하는 것을 주문하며, 먹는 동안에도 각자의 화면을 본다. 효율성은 극대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식사가 가진 관계적 의미는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식탁은 여전히 거실에 있지만, 그 주위에 모여 앉아 하루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식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느림의 경험이 사라진다는 것은 관계의 리듬을 잃는다는 의미다. 모든 것이 빠르고 즉각적이어야 하는 세상에서, 기다림과 지루함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관계는 본질적으로 느린 과정을 필요로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나누고, 신뢰를 쌓는 일은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거실의 속도가 결국 사회의 속도를 결정한다고. 느림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조급한 사회 구성원이 되고, 그런 구성원들이 모인 조직은 더 바쁘고 피로한 구조를 만든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의 시작점은 바로 가정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감정 표현이 자유로운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 이모티콘이 넘쳐나고, 리액션은 무궁무진하며,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온라인에 쏟아낸다. 하지만 이은경은 정반대의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감정을 가장 피상적으로 축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노잼", "좀 그랬다", "별로". 이런 표현들은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한두 단어로 압축한다. 서운함, 실망, 섭섭함, 불편함, 당혹스러움 등이 있다. 이 모든 미묘한 감정의 결들이 "좀 그랬다"는 말로 뭉뚱그려진다. 단어는 넘쳐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을 정확히 설명할 언어는 빈곤해지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감정 어휘와 정서 지능이 직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은 그 감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의 출발점이다. 반대로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으면, 그 감정은 명확한 형태를 갖지 못한 채 막연한 불편함으로만 남는다. 이것이 누적되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도 공감하지 못하는 정서적 문맹 상태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