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일은 맡기는 것이 전부다 - 성과를 내는 리더가 반드시 알아야 할 ‘맡김’의 연금술
이바 마사야스 지음, 정혜원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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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질문 하나와 다시 마주했다. "왜 나는 일을 맡기지 못하는가." 겉으로는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순간 통제력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책이 흥미로웠던 지점은, 그 두려움을 의지박약이나 성격 탓으로 돌리지 않고 '사전준비-실천-후속 지원'이라는 구조로 차근차근 풀어냈다는 데 있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리더의 과중한 업무가 근무 환경 개선의 부작용이라는 지적이었다. 구성원의 야근을 줄이려고 리더 자신이 그 몫을 떠안는다는 이야기는, 언뜻 헌신적인 리더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직 전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구조적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내가 조금 더 하면 팀원들이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일을 끌어안았던 적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피로는 결국 리더 자신을 소진시키고, 팀원들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주지 않는 이중의 손해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금 깨달았다. 리더의 일은 혼자 짊어지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사과 깎기 비유는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책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개념은 '맡기는 방침'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는 대신, 리더로서 의식적으로 성선설을 '선택'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사람은 원래 게으르다거나 원래 성실하다거나 하는 정답은 없다. 다만 리더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구성원을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실제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매출이 부진한 매장의 점장에게 질책 대신 "열심히 하고 있군요"라고 말하며 묵묵히 기다렸다는 한 경영자의 일화는, 신뢰란 상대의 자격을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리더 자신의 의지의 문제라는 책의 결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나는 그동안 부하 직원이나 후배를 볼 때 "이 사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를 먼저 따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질문의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어야 할 것은 상대의 능력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용기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동시에 책은 성선설이 무조건적인 관용이나 방임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짚는다. '깊이 공감하되 어설프게 봐주지 않는다'는 태도, 이른바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좋은 리더십이란 결국 상반된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움과 단호함, 신뢰와 기준, 이 둘 중 하나만 붙잡으면 리더십은 쉽게 무너진다. 조직의 구체적인 목표를 먼저 세우고 그 위에서 신뢰를 발휘해야 한다는 조언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방향이 뚜렷한 믿음이야말로 진짜 신뢰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또 하나 실용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실패'를 미리 정의해 두라는 조언이었다. 대부분의 실패는 돌아보고 개선하면 성장으로 이어지는 '투자형 실패'이고,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기밀 유출이나 큰 손실로 이어지는 회복 불가능한 실패뿐이라는 구분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실패라는 단어 자체를 뭉뚱그려 두려워했던 것 같다. 오탈자 하나, 놓친 질문 하나까지도 실패로 여기고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일을 직접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패에도 종류가 있고, 대부분의 현장 실패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미리 인정해 두면, 일을 맡길 때 훨씬 담대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려움은 실체가 불분명할 때 가장 커지고,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순간 훨씬 다루기 쉬워지는 법이다. 실천 단계에서 이야기하는 자기결정감의 힘도 깊이 공감이 갔다. 리더가 완벽하게 다듬은 100점짜리 기획과, 구성원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든 70점짜리 기획 중 어느 쪽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답이 명확했다. 나 역시 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결과의 완성도에 집착한 나머지 지나치게 개입한 경험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분명 더 매끄러웠을지 몰라도, 팀원들의 표정에는 열정보다는 무기력함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일의 완성도와 구성원의 주인의식은 때로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있으며, 진짜 리더십은 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던 문장은, 맡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업무뿐이며 책임만큼은 리더가 끝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구분이었다. 맡긴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그것을 방치로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많은 리더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정확히 짚어낸다. 일을 넘겨준 뒤 관심마저 거두어 버리면,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무관심이 된다. 진짜 맡김에는 반드시 관찰과 지원, 그리고 필요할 때 함께 책임지겠다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리더십이란 결국 '용기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대를 믿을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대신 내가 믿기로 결심하는 용기, 완벽을 포기하고 다소 부족한 결과를 견디는 용기, 실패를 성장의 재료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맡긴 뒤에도 끝까지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용기. 이 모든 용기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장시키고 조직을 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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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프로의 한없이 가벼운 경제 상식
정영진 지음 / 저녁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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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경제 뉴스를 켜면 늘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 한국어인데, 외국어를 듣는 기분. 환율이 오른다, 기준금리를 동결한다, 국채 금리가 튄다, 코스피가 8천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나는 그게 오늘 저녁 내가 먹을 저녁 메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한 채 채널을 돌리곤 했다. 경제는 늘 나보다 한 발짝 앞서 걷는, 따라잡을 수 없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경제를 몰랐던 게 아니라, 그동안 아무도 내 언어로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영진이라는, 방송에서 익숙한 얼굴의 저자는 경제를 사전처럼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실제로 속으로 중얼거렸던 말들을 그대로 챕터 제목으로 가져온다. 냉면 한 그릇에 만 팔천 원이라니, 나라가 물가를 좀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그 투덜거림. 월급으로는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코인으로 한탕을 꿈꿔보는 그 마음. 그건 경제학 교과서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실제로 하는 생각들이다. 그 순간 나는 이 책이 나에게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이미 하고 있던 생각에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돌이켜보면 요즘처럼 세상이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관세는 하루아침에 25퍼센트가 붙었다 빠지고, 코스피는 반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뛰었고, AI가 내 일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시대에는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뉴스는 매일 새로운 숫자를 던지지만, 그 숫자들을 꿰어줄 실 한 가닥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파편적인 공포 속에 갇혀버린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실 한 가닥이었다. 물가와 환율과 세금과 보험이 서로 동떨어진 지식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흐름 안에서 내 월급과 내 노후로 이어진다는 감각. 그 감각을 갖는 순간, 뉴스는 더 이상 공포의 신호가 아니라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된다. 특히 마음에 남은 건 저자가 국민연금을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나라가 망할 정도가 아니라면 연금은 결국 나올 것이고, 나라가 망할 정도라면 그 어떤 자산도 안전하지 않다는 이야기. 처음엔 그저 낙관적인 위로처럼 들렸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건 위로가 아니라 사고의 틀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늘 최악의 시나리오 하나만 따로 떼어내 불안해하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한 조각만 무너지고 나머지는 멀쩡한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연결된 시스템 안에서 함께 흔들리고 함께 버틴다.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불안의 상당 부분은 가라앉는다.

코인 투자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또 다른 결의 위로를 받았다. 저자는 무모한 도박꾼이 되지 말고 지도 없는 대륙을 신중하게 탐험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내일 당장 사라져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돈으로만 시작하라는 그 조언은, 사실 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혔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위험과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구분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아닐까. 그 구분이 서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전부를 걸거나, 혹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뒤처지는 두려움 속에 머무르게 된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이랬다. 경제 공부를 한다는 건 어쩌면 세상을 예측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흔들 때 최소한 그 흔들림의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 관세가 오르고, 금리가 움직이고, 물가가 뛰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여전히 무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흐름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는 대신 파도를 읽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경제는 결국 삶의 언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지만, 누군가 제대로 통역해주지 않아서 낯설게만 느껴졌던 언어.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는 이 책 덕분에 적어도 하나의 통역기를 손에 쥔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오늘의 뉴스 앞에서 더 이상 멀미를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조금 더 알게 된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게 이 불안한 시대를 건너는 나의 작은 방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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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역사를 공부한다 - 돈의 숨겨진 패턴에 눈뜨는 가장 확실한 방법
이형준 지음 / 책들의정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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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늘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 같았다. 조선의 화폐 정책이나 산업혁명의 증기기관 같은 것들은 시험을 위해 외우는 지식일 뿐, 내 삶과 연결된 흐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흐름 밖에 있었던 적이 없다. 나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태어났고, 그 시스템이 흔들릴 때마다 내 삶도 함께 흔들렸다. 역사 속에서의 자본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책은 많은 교훈을 주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돈'이라는 것이 종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 것은 1997년, 이른바 IMF 외환위기 때였다. 아직 어렸던 나는 경제 위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회사 이야기가 줄었고, 어머니는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한참을 고민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환율과 금리, 국가 부도라는 낯선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은 한 나라의 경제가 세계라는 거대한 그물망에 얼마나 촘촘히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태국에서 시작된 위기가 한국까지 번져 온 것처럼, 돈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움직인다. 그 사실을 나는 몸으로 배웠다.

시간이 흘러 내가 직장을 구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돈의 흐름'을 체감하게 되었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도체 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실적이 좋은 해에는 성과급 이야기를 신나게 했고, 업황이 꺾이는 해에는 감원 소식을 걱정스럽게 전했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반도체 하나에 이렇게 울고 웃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을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을 갈랐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는 반도체와 인공지능 기술을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을 가르고 있다. 나는 그 거대한 경쟁의 한복판, 반도체 강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개인이었던 것이다.

미국 대선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이유 모를 불안을 느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한국인인 내가 왜 다른 나라의 선거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지, 예전에는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달러가 총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역사를 알고 나면, 그 불안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금리 정책 하나로 한국의 주식시장과 환율이 출렁이고, 미국의 관세 정책 하나로 한국 기업의 수출길이 막히기도 열리기도 한다. 나는 투표권이 없는 나라의 선거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가 이미 하나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그 시스템의 뿌리가 대항해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지금의 불안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구조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또 다른 변화의 물결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팬데믹을 지나며 당연하게 여겼던 세계화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고, 미중 갈등 속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희토류 같은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는 뉴스를 매일 접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나는 회사에서 인공지능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동료와 여전히 낯설어하는 동료 사이의 격차를 실제로 목격하고 있다. 증기기관이 새로운 부자와 몰락한 계층을 동시에 만들어냈던 것처럼, 인공지능 역시 승자와 패자를 함께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나는 이 변화의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결국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복해 왔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순간들은 언제나 더 큰 경제사의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유년기의 외환위기, 청년기의 글로벌 금융위기, 사회인이 된 이후의 반도체 산업 부침, 그리고 지금의 인공지능 혁명까지. 나는 그 흐름을 스스로 만든 적은 없지만, 그 흐름 안에서 선택을 내리며 살아왔다. 어떤 산업에 몸담을지, 어떤 자산에 돈을 넣을지, 어떤 기술을 배울지를 결정하는 매 순간이 사실은 거대한 역사적 패턴 안에서의 작은 몸짓이었던 셈이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지만 놀라울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돈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주인을 찾아 이동하고, 그 이동의 방향을 먼저 읽어낸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아왔다. 나는 미래를 정확히 맞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역사의 어느 지점인지 알고 싶어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적어도 내가 왜 불안한지, 그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다음 발걸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개인일 뿐이지만, 적어도 그 무대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만큼은 멈추지 않으려 한다. 책은 나에게 그 의미를 선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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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니체 - 남의 기준을 넘어 나로 살다
구재윤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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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삶의 형식 위에 나를 맞추고 있는가. 그 질문을 불편하더라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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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니체 - 남의 기준을 넘어 나로 살다
구재윤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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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잠깐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알림이 오지 않을까 봐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인지 스스로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피드에 올라온 여행 사진, 연봉 협상 성공담, 승진 소식 앞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후 거울을 보면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다. 나는 무언가와 나를 재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만들지 않은 척도로. 니체는 19세기 끝자락에 살았다. 그러나 그가 물었던 질문들, 당신은 정말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만든 척도 안에서 자신을 재고 있는가? 등은 오늘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그 질문이 가장 절실한 시대일지 모른다. 비교를 손안에 집어넣은 시대, 인정을 숫자로 환산하는 시대, 순응을 콘텐츠로 포장하는 시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보며 살고 있다.

비교는 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교는 예전과 다르다. 과거에 비교는 아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다. 동네, 학교, 직장 안의 몇 십 명이 나의 비교 대상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수억 명의 삶이 정제되어 펼쳐진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순간만 편집된 형태로. 우리는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일상 전체를 비교하면서, 어딘가 부족하다는 감각을 일상처럼 껴안고 산다. 니체의 언어를 빌리면, 우리는 지금 가장 촘촘하고 정교한 가치표 위에 올려진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이 성공인지, 어떤 몸이 이상적인지, 얼마나 생산적이어야 충분한지, 어느 나이까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가 피드마다 묵시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자기 기준인 듯 받아들인다. 비교가 무너뜨리는 것은 자존감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삶을 자기 감각으로 느끼는 힘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좋아서 하는지, 불안해서 하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비교의 진짜 해악이다.

인정욕구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좋아요 버튼이 생긴 이후, 우리는 감정에 수치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 글이 몇 명에게 닿았는지, 이 사진이 몇 명의 마음에 들었는지가 화면에 찍힌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표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사람 안에서 다른 무게를 갖게 되었다. 게시물이 올라간 후 첫 몇 분간 숫자를 확인하는 손가락. 그것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다. 내가 괜찮은지를 바깥에서 허가받으려는 손짓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의 승인 속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달려감을 손바닥 안에서 24시간 할 수 있게 되었다. 승인의 창구가 무한히 열려 있고, 피드백은 즉각적이며, 반응이 없을 때의 불안은 생각보다 강하다. 더 위험한 것은 인정욕구가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위장된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일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관계에서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것. 겉으로는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에 '실망시키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힘에서 나온 삶이 아니라 불안에서 나온 삶이다.

순응은 오늘날 더 세련된 언어를 입고 나타난다. '분위기 파악', '눈치', 'TMI 하지 말 것', '적당히 맞추는 사람'. 직장에서, 관계에서, 심지어 자기계발 담론 안에서도 순응은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미덕이 된다.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원만하다고 불리고, 흐름에 맞추는 사람이 어른스럽다고 평가받는다. 니체가 경계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순응이 미덕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더 옳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덜 흔들기 때문이다. 사회는 스스로 판단하는 인간보다 예측 가능한 인간을 더 편안해한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종종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순응이 오래될수록 외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면의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해도 되는 말'로 바뀌고, 원하는 삶이 '허용된 삶의 범위 안'에서 조정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순응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고, 습관이 아니라 자기 자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사는 건지, 오래 반복했기 때문에 이것이 나처럼 느껴지는 건지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니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위로를 찾는 일이 아니다. 그는 다독이는 철학자가 아니라 묻는 철학자다. 자기 극복이라는 말을 그는 남보다 앞서가는 것으로 쓰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살게 하지 못하는 나의 형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어제의 두려움으로 오늘을 결정하지 않는 일, 오래된 자기 설명에 편안히 기대지 않는 일, 아직 끝나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를 두는 일. 그것이 니체가 말한 극복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니체는 강인함의 아이콘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삶의 형식 위에 나를 맞추고 있는가. 그 질문을 불편하더라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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