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니체 - 남의 기준을 넘어 나로 살다
구재윤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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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잠깐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알림이 오지 않을까 봐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인지 스스로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피드에 올라온 여행 사진, 연봉 협상 성공담, 승진 소식 앞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후 거울을 보면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다. 나는 무언가와 나를 재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만들지 않은 척도로. 니체는 19세기 끝자락에 살았다. 그러나 그가 물었던 질문들, 당신은 정말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만든 척도 안에서 자신을 재고 있는가? 등은 오늘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그 질문이 가장 절실한 시대일지 모른다. 비교를 손안에 집어넣은 시대, 인정을 숫자로 환산하는 시대, 순응을 콘텐츠로 포장하는 시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타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보며 살고 있다.

비교는 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교는 예전과 다르다. 과거에 비교는 아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다. 동네, 학교, 직장 안의 몇 십 명이 나의 비교 대상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수억 명의 삶이 정제되어 펼쳐진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순간만 편집된 형태로. 우리는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일상 전체를 비교하면서, 어딘가 부족하다는 감각을 일상처럼 껴안고 산다. 니체의 언어를 빌리면, 우리는 지금 가장 촘촘하고 정교한 가치표 위에 올려진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이 성공인지, 어떤 몸이 이상적인지, 얼마나 생산적이어야 충분한지, 어느 나이까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가 피드마다 묵시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자기 기준인 듯 받아들인다. 비교가 무너뜨리는 것은 자존감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삶을 자기 감각으로 느끼는 힘이다. 내가 지금 이것을 좋아서 하는지, 불안해서 하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비교의 진짜 해악이다.

인정욕구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좋아요 버튼이 생긴 이후, 우리는 감정에 수치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 글이 몇 명에게 닿았는지, 이 사진이 몇 명의 마음에 들었는지가 화면에 찍힌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표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사람 안에서 다른 무게를 갖게 되었다. 게시물이 올라간 후 첫 몇 분간 숫자를 확인하는 손가락. 그것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다. 내가 괜찮은지를 바깥에서 허가받으려는 손짓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의 승인 속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달려감을 손바닥 안에서 24시간 할 수 있게 되었다. 승인의 창구가 무한히 열려 있고, 피드백은 즉각적이며, 반응이 없을 때의 불안은 생각보다 강하다. 더 위험한 것은 인정욕구가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위장된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일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관계에서 좋은 인상을 유지하는 것. 겉으로는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에 '실망시키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힘에서 나온 삶이 아니라 불안에서 나온 삶이다.

순응은 오늘날 더 세련된 언어를 입고 나타난다. '분위기 파악', '눈치', 'TMI 하지 말 것', '적당히 맞추는 사람'. 직장에서, 관계에서, 심지어 자기계발 담론 안에서도 순응은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미덕이 된다.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원만하다고 불리고, 흐름에 맞추는 사람이 어른스럽다고 평가받는다. 니체가 경계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순응이 미덕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더 옳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덜 흔들기 때문이다. 사회는 스스로 판단하는 인간보다 예측 가능한 인간을 더 편안해한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종종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순응이 오래될수록 외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면의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해도 되는 말'로 바뀌고, 원하는 삶이 '허용된 삶의 범위 안'에서 조정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순응은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고, 습관이 아니라 자기 자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이것을 원해서 이렇게 사는 건지, 오래 반복했기 때문에 이것이 나처럼 느껴지는 건지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니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위로를 찾는 일이 아니다. 그는 다독이는 철학자가 아니라 묻는 철학자다. 자기 극복이라는 말을 그는 남보다 앞서가는 것으로 쓰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살게 하지 못하는 나의 형식을 넘어서는 일이다. 어제의 두려움으로 오늘을 결정하지 않는 일, 오래된 자기 설명에 편안히 기대지 않는 일, 아직 끝나지 않은 존재로 스스로를 두는 일. 그것이 니체가 말한 극복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니체는 강인함의 아이콘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미리 그려둔 삶의 형식 위에 나를 맞추고 있는가. 그 질문을 불편하더라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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