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아웃소싱 - AI 시대, 정답을 구독하고 사유를 잃다
김해용 지음 / 바른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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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두 시, 나는 빈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써야 할 보고서가 있었고, 마감은 내일 아침이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브라우저를 열고, 챗GPT 창을 띄우고, 질문을 입력했다. 몇 초 뒤 깔끔하게 정돈된 문단들이 화면을 채웠다. 나는 그것을 복사해 문서에 붙여넣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나는 편리함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잃었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보고서는 완성됐고, 마감도 지켰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 보고서의 내용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그것을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인류는 언제나 도구를 발명하며 진보해 왔다. 문자는 기억을 돌판에 새겼고, 계산기는 암산의 부담을 덜었으며, 인터넷은 지식의 접근 비용을 사실상 0 으로 만들었다. 매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이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을까'라고 우려했지만, 결국 도구는 인간을 더 높은 차원의 문제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AI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 앞에 멈춰 선다. 문자, 계산기, 인터넷은 인간이 '저장하고 계산하고 검색하는 행 위를 대신했다. 반면 AI는 '판단하고 추론하고 결론 내리는 행위, 즉 생각 그 자체를 대신한다. 이것은 도구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범주의 사건인가.

신체의 근육은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된다. 깁스를 한 달간 하고 풀면 팔뚝이 눈에 띄게 가늘어진다. 이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그런데 사유의 근육도 다르지 않다. GPS가 일상화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가본 길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됐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런던 택시 기사들의 뇌에서 관찰됐던 해마 발달, 즉 공간 인지와 기억에 관여하는 부위의 성장이 내비게이션 의존도와 반비례한다는 사실은 이제 신경과학의 상식이 됐다. 편리함이 능력을 대체하는 순간, 그 능력은 쓸 이유를 잃고 퇴화한다. 이 논리를 AI에 그대로 대입하면, 이야기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우리가 AI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길 찾기가 아니다. 논증의 구조를 세우는 일, 정보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는 일, 감정의 결을 언어로 포착하는 일,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입장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 이 AI 아웃소싱의 대상이 되고 있다. AGI(범용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거나 근접하는 지금, 이 문제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AGI는 단순 반복 작업만을 대신하는 좁은 AI와 달리, 인간이 수행하는 거의 모든 인지 작업을 처 리할 수 있는 존재다. 그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두 가지다. 생각을 전적으로 위탁하고 결과를 소비하는 '구독자'가 되거나, 혹은 AI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도 자신의 판단력과 비판적 사유를 날카롭게 유지하는 '지휘자'가 되거나. 문제는 구독자의 길이 너무 매끄럽고 달콤하다는 데 있다. 마찰이 없다. 고통이 없다. 막히는 순간이 없다. 그러나 배움과 성장의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그 핵심에는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y)'이 있었다. 정답을 찾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 개념이 손에 잡히지 않아 밤새 씨름하는 시간, 자신의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의 당혹감.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사유의 근육이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AI 아웃소싱은 이 소중한 마찰을 제거한다. 결과는 얻되, 과정은 건너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조용하고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청구된다.

그렇다면 AI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맡길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경험의 무게'라고 생각한 다. AI는 수십억 개의 텍스트를 학습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확률적으로 적절한 자리에 배치할 수 있다. 그러나 AI는 실연 후 밥 한 술 뜨기도 무거웠던 그 아침을 모른다. 오래된 친구와 나눈 전화 한 통이 무너지던 마음을 다시 세워준 경험을 모른다. 인간의 언어가 힘을 갖는 것은 그 언어 뒤에 살아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AI의 언어가 아무리 유창해도, 그 뒤에는 경험이 없다. 그것이 기계와 인간을 가르는 마지막 경계선이다. 그러나 이 경계선은 선언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질문하는 능력'을 훈련해야 한다. AI 가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 더 희귀하고 강력한 역량이 된다. 좋은 질문은 단순히 AI에게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반영하는, 사 유의 구조 그 자체다. 질문의 수준은 곧 사고의 깊이다. 또한 우리는 'AI의 답을 의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AI는 자신이 틀렸을 때도 유창하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매끄러운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인용하고 없는 논문을 제시한다. 유창함과 정확성은 다르다. 이것을 구별하는 안목이 AGI 시대의 핵심 리터러시다. 더 나아가, AI가 제시하는 답이 맞더라도 '왜 맞는가'를 스스로 검증하는 과정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검증 없는 수용은 사유의 포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비효율의 가치'를 복권시켜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을 효율의 잣대로 재단하는 순간, 인간적인 것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직접 고른 단어들로 쓴 편지, 막히면서도 스스로 풀어낸 문제, 빠른 길을 두고 굳이 걸어서 만나는 사람. 이것들은 알고리즘으로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비효율의 순간들이 바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다.

Al 아웃소싱은 적이 아니다. 우리의 판단력이 살아 있는 한, AI는 강력한 조력자다. 문제는 AI 자체가 아니라 AI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AGI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시대가 될 수 있다. 기계가 모든 답을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가 인간의 진짜 역량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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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일하는 방식 키엔스 - 신입부터 베테랑까지, 최단 시간에 최대의 성과를 내는 간단한 규칙
사이타 신지 지음, 강모희 옮김 / 지상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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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물음을 가슴 속에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저토록 가볍게 성과를 내는데, 나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같은 답을 내린다. "재능의 차이야." 그리고 그럴 때마다, 조금씩 체념의 층을 영혼 위에 쌓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멈춰 생각해본다. 정말 그럴까. 재능의 차이가 정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걸까? 키엔스라는 회사는 그 '상식'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매출액 영업이익률이 50%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초고수익 기업으로 군림하는 이 조직의 강점의 원천은, 천재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의 '약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서도, 누구나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의 힘에 있다. 이 사실은 나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혹시 우리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의 규칙을 따르며 줄곧 소모되어 온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설계한 적이 없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주어진 평가 기준 안에서, 그 기준에 맞는 사람 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싸워왔다. 그 게임판 자체를 의심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로. 키엔스는 바로 그 게임 판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 진짜 승리의 전략임을 보여준다.

저자 사이타 신지 씨의 커리어는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출발이었다. 채용 시험에서 불합격을 경험하고, 입사 후에는 동기 중 최하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한 청년이, 훗날 키엔스 사상 최초의 3기 연속을 포함해 5번의 영업 성적 전사 1위라는 '전설'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 궤적은, 재능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이다. 그의 변화를 이끈 키엔스의 사상은 성약설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인간이란 본래 의지가 약하고, 쉬운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생물이라는 냉철한 인간관이다. 많은 조직이 정신론이나 근성론으로 사람을 움직이 려 할 때, 키엔스는 그런 모호한 노력에 대한 의존을 거부했다. 대신, 인간이 약하더라도, 흔들리더라도, 지쳐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올바른 행동으로 이끌리는 '구조'를 철저하게 설계했다.

매일 반복하는 롤플레이 연습, 방문 전후에 작성하는 외출 보고서, 행동량 자체를 KPI로 평가하는 성과 측정 시스템 이것들은 얼핏 보면 답답한 관리 체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다르다. 이것들은 인간의 약함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함을 보완하고, 누구나 높은 수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정 부목' 인 것이다.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력'을 과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일부터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몇 번이나 배신해왔던가. 키엔스는 그런 우리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의지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한 채, 행동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환경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이 결코 개인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다. 인간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그 약함을 스스로 책망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자책이 아닌 설계. 의지가 아닌 시스템. 이 전환이야말로, 키엔스식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버린다면, 키엔스는 그저 냉철한 기계적 조직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 합리적인 시스템 위에 인간적인 온기(사랑받는 힘)를 융합시킨 데 있다. 사랑받는 힘이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기간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이 사람에게서 사고 싶다" 고 느끼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이고 재현 가능한 기술이다. 그 예로 자리 배치의 경우, 상담 자리에서 정면이 아닌 옆에 앉아 같은 자료를 함께 들여다본다. 이것은 심리적 구도가 '대립'에서 '공동 작업'으로 변하게 한다. 다른 예로 손글씨 메모 를 들 수 있다. 자료를 보낼 때 손으로 쓴 한마디를 함께 첨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에서, 특별한 한사람'으로 각인되게 할 수 있다. 이외 여러가지 사례를 볼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작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은 보통'의 축적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내가 이 '사랑받는 힘'이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을 타고난 카리스마나 천성적인 화술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그것 역시 분해하고,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기술' 인 것이다. 사이타 씨는 커뮤 니케이션에 강한 콤플렉스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 기술을 하나하나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저자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냉철한 시스템이라는 뼈대 위에, 인간적인 온기라는 살을 입히는 것. 이 두 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재능'이라는 불확실한 신화를 넘어설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내 안에 남은 것은 일종의 조용한 흥분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손에 잡힐 듯한 희망이었다. 키엔스의 구조를 그대로 자신의 직장에 들여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업종도, 환경도, 문화도 다르다. 그러나 그 근저에 있는 원리원칙은 보편적이다.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고, 구조로 보완한다" 합리성 위에 인간적 온기를 더한다" 어떤 일에도, 어떤 인간관계에도 응용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재능이 없다" 고 느꼈던 순간의 많은 경우는, 사실 구조가 없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올바른 틀도 없고, 돌아보는 습관도 없고, 행동의 기록도 없이, 그저 무작정 노력을 거듭해왔다. 그것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것과 같다. 저자는 그 나침반을 건네준다. 재능이라는 불확실한 별이 아닌, 누구의 손에도 닿을 수 있는 구조라는 확실한 이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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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빛, 숲 그리고 코트다쥐르 - 오직 남프랑스에서 마주하는 예술적인 풍경
김종진 외 지음 / 효형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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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남프랑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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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빛, 숲 그리고 코트다쥐르 - 오직 남프랑스에서 마주하는 예술적인 풍경
김종진 외 지음 / 효형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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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년 여름, 나는 니스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행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딘가에서 나를 불러낸 것 같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비행기에 올랐고, 코트다쥐르의 햇살 속에 내던져졌을 때, 나는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떤 감각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남프랑스의 빛은 달랐다. 한국의 여름 햇살이 짓누르듯 내리꽂힌다면, 니스의 빛은 스며들었다. 낡은 돌벽 사이로, 지중해의 물결 위로, 좁은 골목의 색 바랜 덧문 틈 사이로 빛은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 빛 아래 서 있으면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냥 흘렀다. 내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통과해 가는 느낌이었다. 니스의 아침은 재래시장에서 시작됐다. 쿠르 살레야 꽃시의 라벤더 향이 공기 속에 번지고, 노란 미모사와 붉은 토마토가 쌓인 좌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 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위해 걸었다. 그것이 남프랑스가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었다.

마티스 미술관 앞에 섰을 때, 나는 특별한 기대를 품지 않았다. 미술관이라면 이미 숱하게 다녀왔고, 작품은 늘 액자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무언가가 달랐다. 마티스의 색은 그림 바깥으 로 흘러넘쳐 있었다. 그것은 캔버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간 전체를 물들였다. 파랗고, 붉고, 노란 세계. 이성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가슴 어딘가가조여들었고, 이유도 모른 채 눈이 뜨거워졌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다. 빛으로 공간을 다시 쓰고 있었다. 수술 후 병상에서도 가위와 색종이로 세계를 재구성했다는 그 이야기가, 미술관의 조용한 복도 속에서 갑자기 생생하게 와닿았다. 몸이 불편해도 손끝에서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이구나. 그것이 삶이구나. 그날 오후, 마르크 샤갈의 세계 속에도 잠시 들어갔다. 전쟁과 망명, 사랑과 상 실을 지나온 한 인간이 남프랑스의 빛 속에서 완성한 색채의 서사. 샤갈의 그림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어떤 꿈을 불현듯 떠올렸다. 기억이란 이상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색 앞에서 갑자기 깨어난다. 기억은 사 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침묵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여행 중 하루, 세낭크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고르드의 절벽 마을을 지나 라벤더 밭이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수도원이 나타난다. 보랏빛 라벤더 너머 회색 돌벽의 수도원. 그 순간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거기서 보면 안 다. 수백 년 전 수도사들이 쌓아 올린 그 돌벽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위압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주 오래된 것들만이 줄 수 있는 고요한 안도감. 이 벽은 나보다 훨씬 오래 여기 있었고, 나보다 훨씬 오래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초라함이 아닌, 해방감을 느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서면 소리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돌이 숨 쉬는 소리, 빛이 바닥 위에 내려앉는 소리, 수백 년의 시간이 벽 속에서 삭아가는 소리.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도시의 삶은 늘 무언가를 채우라고 요구한다. 시간을 채우고, 일정을 채우고, 피드를 채우고. 그런데 세낭크 의 그 고요한 돌 안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비워야 들린다는 것을, 아무것도 없어야 보인다는 것을.

니스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해변에 한참 앉아 있었다. 지중해는 그림엽서 속 바다와 달랐다. 그것은 파도가 검은 자갈을 쓸어내리는 소리, 저물어가는 빛이 수면 위에 부서지는 방식, 수평 선 너머로 사라지는 마지막 붉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 문장의 의미를 나는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다. 아마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아도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과 자연이 공통으로 가진 힘이니까. 르코르뷔지에가 이 바다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리고 이 바다로 돌아갔다는 것이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이해됐다. 이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위대한 건축가도, 유명한 화가도, 평범한 여행자도 결국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는 곳.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그냥 '한 사람'이 된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아래 어딘가에 그 빛이, 그 돌이, 그 침묵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 빛, 숲 그리고 코트다쥐르>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남프랑스를 여행하며 기록한 책.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은 남프랑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우는 것 같았다. 마티스 채플의 빛, 르 코르뷔지에의 흔적, 수도원의 침묵, 고르드와 에즈와 생폴드방스의 골목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자가 아니라 냄새와 온도와 질감이 느껴졌다. 라벤더 향, 돌이 품은 따뜻함, 지중해 바람의 짭조름함. 그것들이 손에 잡힐 듯 되살아났다. 책은 내게 여행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나는 지금 무엇을 경험하며 살고 있 는가. 데이터와 이미지가 경험을 대신하는 시대. 우리는 여행지의 사진을 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세낭크 수도원의 돌벽 앞에서 멈추지 않고는, 그 고요가 어떻게 가슴 안쪽까지 스며드는지 를 알 수 없다. 지중해의 자갈 위에 실제로 앉아보지 않고는, 파도가 돌을 쓸어내리는 그 진동이 왜 눈물겨운지 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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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2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2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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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보다는 언니에게, 혹은 먼저 살아본 사람에게 듣는 말처럼 책은 나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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