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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빛, 숲 그리고 코트다쥐르 - 오직 남프랑스에서 마주하는 예술적인 풍경
김종진 외 지음 / 효형출판 / 2026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년 여름, 나는 니스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행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딘가에서 나를 불러낸 것 같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비행기에 올랐고, 코트다쥐르의 햇살 속에 내던져졌을 때, 나는 비로소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떤 감각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남프랑스의 빛은 달랐다. 한국의 여름 햇살이 짓누르듯 내리꽂힌다면, 니스의 빛은 스며들었다. 낡은 돌벽 사이로, 지중해의 물결 위로, 좁은 골목의 색 바랜 덧문 틈 사이로 빛은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 빛 아래 서 있으면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냥 흘렀다. 내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통과해 가는 느낌이었다. 니스의 아침은 재래시장에서 시작됐다. 쿠르 살레야 꽃시의 라벤더 향이 공기 속에 번지고, 노란 미모사와 붉은 토마토가 쌓인 좌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 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위해 걸었다. 그것이 남프랑스가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었다.마티스 미술관 앞에 섰을 때, 나는 특별한 기대를 품지 않았다. 미술관이라면 이미 숱하게 다녀왔고, 작품은 늘 액자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무언가가 달랐다. 마티스의 색은 그림 바깥으 로 흘러넘쳐 있었다. 그것은 캔버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간 전체를 물들였다. 파랗고, 붉고, 노란 세계. 이성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가슴 어딘가가조여들었고, 이유도 모른 채 눈이 뜨거워졌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다. 빛으로 공간을 다시 쓰고 있었다. 수술 후 병상에서도 가위와 색종이로 세계를 재구성했다는 그 이야기가, 미술관의 조용한 복도 속에서 갑자기 생생하게 와닿았다. 몸이 불편해도 손끝에서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이구나. 그것이 삶이구나. 그날 오후, 마르크 샤갈의 세계 속에도 잠시 들어갔다. 전쟁과 망명, 사랑과 상 실을 지나온 한 인간이 남프랑스의 빛 속에서 완성한 색채의 서사. 샤갈의 그림 앞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어떤 꿈을 불현듯 떠올렸다. 기억이란 이상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색 앞에서 갑자기 깨어난다. 기억은 사 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나는 언제부터 침묵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여행 중 하루, 세낭크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 고르드의 절벽 마을을 지나 라벤더 밭이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수도원이 나타난다. 보랏빛 라벤더 너머 회색 돌벽의 수도원. 그 순간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거기서 보면 안 다. 수백 년 전 수도사들이 쌓아 올린 그 돌벽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위압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주 오래된 것들만이 줄 수 있는 고요한 안도감. 이 벽은 나보다 훨씬 오래 여기 있었고, 나보다 훨씬 오래 여기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초라함이 아닌, 해방감을 느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서면 소리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돌이 숨 쉬는 소리, 빛이 바닥 위에 내려앉는 소리, 수백 년의 시간이 벽 속에서 삭아가는 소리.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도시의 삶은 늘 무언가를 채우라고 요구한다. 시간을 채우고, 일정을 채우고, 피드를 채우고. 그런데 세낭크 의 그 고요한 돌 안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비워야 들린다는 것을, 아무것도 없어야 보인다는 것을.니스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해변에 한참 앉아 있었다. 지중해는 그림엽서 속 바다와 달랐다. 그것은 파도가 검은 자갈을 쓸어내리는 소리, 저물어가는 빛이 수면 위에 부서지는 방식, 수평 선 너머로 사라지는 마지막 붉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 문장의 의미를 나는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다. 아마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아도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과 자연이 공통으로 가진 힘이니까. 르코르뷔지에가 이 바다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리고 이 바다로 돌아갔다는 것이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이해됐다. 이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위대한 건축가도, 유명한 화가도, 평범한 여행자도 결국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는 곳.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그냥 '한 사람'이 된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창밖을 바라봤다. 구름 아래 어딘가에 그 빛이, 그 돌이, 그 침묵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돌, 빛, 숲 그리고 코트다쥐르>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남프랑스를 여행하며 기록한 책.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은 남프랑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우는 것 같았다. 마티스 채플의 빛, 르 코르뷔지에의 흔적, 수도원의 침묵, 고르드와 에즈와 생폴드방스의 골목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자가 아니라 냄새와 온도와 질감이 느껴졌다. 라벤더 향, 돌이 품은 따뜻함, 지중해 바람의 짭조름함. 그것들이 손에 잡힐 듯 되살아났다. 책은 내게 여행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나는 지금 무엇을 경험하며 살고 있 는가. 데이터와 이미지가 경험을 대신하는 시대. 우리는 여행지의 사진을 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세낭크 수도원의 돌벽 앞에서 멈추지 않고는, 그 고요가 어떻게 가슴 안쪽까지 스며드는지 를 알 수 없다. 지중해의 자갈 위에 실제로 앉아보지 않고는, 파도가 돌을 쓸어내리는 그 진동이 왜 눈물겨운지 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