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탄생
박수현 지음 / SISO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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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음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먹는 행위는 단순한 생존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권력과 신분, 문명과 야만, 종교와 과학, 그리고 미학의 문제와 끊임없이 얽혀왔다. 미식이란 그 긴 얽힘 속에서 서서히 발효된 결과물이다.

프랑스 땅에 처음 문명의 씨앗을 뿌린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의 군대가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두 개의 식탁 문화가 충돌했다. 한편에는 밀로 빵을 굽고, 포도를 발효시켜 와인을 만들고, 올리브를 압착해 기름을 얻는 로마인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사냥한 짐승을 구워 먹고, 보리로 맥주를 빚고, 버터와 돼지기름으로 요리하는 켈트족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로마인들의 눈에 갈리아인의 식탁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판단은 미각의 우열이 아니라 문명관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인에게 '문명'이란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질서 있게 가꾸어낸 것, 즉 경작된 땅과 그 땅에서 얻은 작물로 만든 음식을 의미했다. 빵을 먹는다는 것은 곧 문명인이라는 뜻이었고, 숲에서 사냥하여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야만의 표식이었다. 이 구분은 사실 편견에 가까웠다. 갈리아인들은 이미 뛰어난 농업 기술을 보유했고, 육가공 기술은 오히려 로마인들이 배워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기준을 쥔 쪽이 타자의 식문화를 열등하게 규정했다. 먹는 것의 우열이란 처음부터 권력의 문제였다.

​갈리아 시대의 연회는 축제이상의 의미였다. 분열된 72개 민족과 수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갈리아 사회에서, 음식을 얼마나 풍성하게 내어놓는가는 곧 지도자의 역량과 신뢰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부족장은 다른 부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넘치도록 차린 식탁을 제공했고, 함께 먹는 행위는 동맹과 결속의 언어였다. 대식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갈리아의 문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많이 먹는 것은 동물적 우월함의 표시이자 공동체의 단합을 과시하는 방식이었다. 로마의 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산다'는 뜻의 '콘비비움'으로 표현된 로마의 식탁 문화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식탁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사회에 속한다는 의미였고, 배제된다는 것은 공동체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이 사상은 이후 가톨릭의 파문 제도에까지 이어져, '함께 먹지 못하는 벌'로 상징화되었다. 먹는 행위는 언제나 포함과 배제의 경계를 그어왔다. 중세에 이르면 이 구분은 한층 정교해졌다. 하늘에 가까울수록 가치 있다는 '존재의 대사슬' 이론은 음식에도 적용되어, 땅속에서 자라는 마늘이나 감자는 최하층의 음식이었고, 높이 나는 새나 사냥으로 얻은 고기는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체액 이론은 이를 의학적으로 포장했다. 귀족의 위장과 평민의 위장은 태생부터 다르다고 했으며, 신분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고 가르쳤다. 과학과 종교가 손잡고 계급적 식탁을 정당화한 것이다. 성직자들은 농민의 배고픔조차 신이 내린 운명이라 설교했다. 먹는 것의 불평등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질서로 둔갑했다.

중세 교회는 1년의 절반 가까이를 금식일로 지정했다. 육식을 금하고 생선만 허용하는 이 규정은 역설적으로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을 심화시켰다. 사람들은 금식의 규율을 피하기 위해 온갖 궤변을 동원했다. 물에 사는 오리는 어류와 가깝다는 논리로 오리를 먹었고, 비버의 꼬리는 물고기로 분류하여 먹었다. 수도사들이 사슴을 우물에 던져 넣고 어류로 우기는 일도 있었다. 금지가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이 창의력을 낳은 셈이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더욱 깊어졌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는 고대 로마의 음식 문화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1세기경에 쓰인 요리책의 필사본이 발굴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적 금욕의 틀 바깥에서 음식을 즐기는 방식을 새롭게 배웠다. 죄의식 없이 먹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르네상스 식탁의 정신이었다. 이 변화의 물결은 1533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이 프랑스 왕실로 시집오면서 프랑스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요리사와 제과사, 식기와 조리 도구, 그리고 식탁 예절을 프랑스 궁정에 이식했다. 두 개의 날이 달린 포크, 굽이 달린 유리잔, 개인 도자기 접시와 같은 세련된 식기들이 프랑스 귀족들의 식탁을 바꾸어놓았다. 채소를 포타주에 넣어 끓이는 대신 독립된 요리로 내어놓는 방식, 소르베와 마멀레이드, 무스와 같은 새로운 디저트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프랑스 요리는 이때부터 서서히 자신만의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

갈리아의 숲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베르사유의 연회장을 거쳐, 파리의 레스토랑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갖춘다. 19세기 파리의 레스토랑은 누구든 돈을 내고 앉아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선택해 먹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오트 퀴진이 부르주아의 식탁으로, 그리고 점차 더 넓은 계층으로 내려오면서, 미식은 비로소 특권이 아닌 문화가 되어갔다. 그러나 돌아보면 미식의 탄생은 결코 순수하게 맛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려는 욕망, 신분을 드러내고 싶은 허영, 권력을 식탁 위에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저항하며 같은 빵을 나누어 먹겠다는 평등의 열망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오늘 식탁 앞에 앉아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는, 그 오랜 투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먹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삶의 방식에 대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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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나카모토 - 비트코인의 창시자
벤저민 윌리스 지음, 이재득 옮김 / 북플레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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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08년 10월,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지고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던 순간, 한 익명의 인물이 암호학 메일링 리스트에 조용히 아홉 쪽짜리 논문을 올렸다. 그 인물의 이름은 사토시 나카모토. 그가 제시한 것은 단순한 기술적 제안이 아니었다. 국가와 중앙은행의 통제를 벗어난 탈중앙화 화폐 시스템, 즉 비트코인이었다. 이 논문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17년이 지났지만, 그 창시자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벤저민 월리스의 책 <마스터 나카모토>는 15년에 걸친 추적의 기록이지만, 평론가 헤르트 로빙크가 지적하듯 그 추적은 처음부터 방법론적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그 한계의 핵심에는 '한 명의 천재적 창시자'라는 신화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있다.

비트코인이 해결한 기술적 문제는 수십 년간 디지털 화폐 시도를 가로막아온 '이중 지불 문제'였다. 디지털 데이터는 복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화폐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나카모토의 해법은 블록체인이라는 공개 분산 원장이었다. 10분마다 새로운 거래 내역이 하나의 블록으로 묶이고, 암호화 기법을 통해 이전 블록과 연결되어 변조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작업 증명' 방식을 도입해, 수학 연산 경쟁에서 승리한 컴퓨터에게 새로운 비트코인을 지급하는 채굴 시스템을 구성했다. 총 발행량을 2,100만 개로 엄격히 제한해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유로운 화폐를 설계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설계는 단순히 기술적 혁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비트코인의 초기 지지자들은 국가 권력에 적대적인 자유지상주의자들, 프라이버시에 집착하는 사이퍼펑크들, 그리고 기술적 호기심에 이끌린 프로그래머들이었다. 1992년 에릭 휴즈의 오클랜드 아파트에서 시작된 사이퍼펑크 운동은 암호화 기술을 통해 정부 감시를 무력화하고자 했으며, 이 운동의 사상적 토양 위에서 비트코인이 싹텄다. 닉 재보의 '비트골드', 웨이 다이의 'b-money' 같은 선행 시도들은 비트코인이 결코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월리스의 책이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인물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방법론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컴퓨터 과학자이자 법학자인 닉 재보는 오스트리아 경제학, 게임 이론, 화폐 인류학에 걸친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문체 분석에서도 나카모토와 유사한 글쓰기 습관을 보였다. 호주 출신의 크레이그 라이트는 기술적 능력과 극도의 자기과시를 결합시킨 인물로, 2016년 런던의 한 호텔 방에서 가빈 안드레센에게 자신이 사토시임을 "증명"하려 했다. 제임스 도널드는 급진적 좌파에서 신반동주의로 이어지는 기이한 이념적 여정을 걸어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월리스가 한 명씩 용의자를 검토하고 기각하는 과정에서, 정작 더 근본적인 질문은 회피된다. 왜 우리는 사토시가 반드시 한 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로빙크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이 전제 자체가 실리콘밸리의 '창업자-영웅' 신화를 내면화한 결과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로 이어지는 천재적 개인의 계보는 기술 혁신을 언제나 한 명의 남성적 비전으로 환원시킨다. 이 이념 구조 안에서 집단 창조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 되거나, 심지어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집단 창조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의 공간이 열린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 자체가 의도적으로 설계된 '공개 정체성(open identity)'이었을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지 않다. 1990년대 유럽의 예술·정치 운동에서 사용된 '루터 블리셋'이라는 집단 가명이나, 비트코인 탄생 시기와 겹치는 2000년대의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는 복수의 개인이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활동한 대표적 사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토시 나카모토는 특정 인물의 실명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 이름 혹은 집단적 페르소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로빙크가 흥미롭게 제기하는 문화적 맥락도 무시하기 어렵다. '나카모토'라는 이름이 풍기는 일본적 어감은 결코 우연이 아닐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서구 기술 문화에 깊이 침투한 일본 테크노컬처의 영향,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된 오리엔탈리즘적 미래 이미지,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와 『아이돌루』가 만들어낸 디지털 동아시아의 신화는 암호화폐 공동체가 자신들의 창조물에 어떤 문화적 권위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를 시사한다. 히토 스타이얼이 '블록체인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른 것, 즉 동양적 이미지를 이용해 투자 상품에 신비로운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사토시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트코인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방법론 자체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월리스식의 접근, 즉 한 명의 천재를 추적하고 그의 침묵과 비밀을 낭만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비트코인의 진실에 닿을 수 없다. 대신, 사이퍼펑크 메일링 리스트에 참여한 수십 명의 기술자들 사이의 네트워크 분석, 코드 기여 이력과 아이디어의 흐름을 추적하는 모듈식 접근이 필요하다. 가치를 '무에서 창조한다'는 비트코인의 연금술적 특성은 한 명의 마법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집단 지성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비트코인은 여전히 극단적인 가격 변동 속에서 투기와 이념, 기술이 뒤엉킨 복잡한 현상으로 존재한다. NBA 스타가 꿈에서 사토시를 만났다고 주장하고, 억만장자가 그 발언을 통제하려 하는 현실은 사토시 신화가 이제 금융 자산의 마케팅 도구로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신화를 해체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 혁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누구의 공헌이 지워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천재'라는 서사에 얼마나 많은 것을 투영하는지를 묻는 일이다. 비트코인의 진짜 기원은 아마도 한 명의 미스터리한 인물이 아니라, 탈냉전 시대의 기술적 불안과 정치적 상상력이 만나 이룬 집단적 발명의 역사 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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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AI 강의 2026 - 인공지능 진화의 가속화부터 AI 기본사회와 일자리의 미래까지 멈추지 않고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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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무언가다.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기술이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둘러싼 선택들이 방향을 결정한다. 그 선택은 소수의 개발자나 거대 기업만의 몫이 아니다. AI를 이해하고, 질문하고, 요구하는 모든 시민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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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AI 강의 2026 - 인공지능 진화의 가속화부터 AI 기본사회와 일자리의 미래까지 멈추지 않고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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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2년 겨울, 챗GPT가 세상에 나왔다. 두 달 만에 1억 명이 몰렸다. 인터넷이 그 숫자에 도달하는 데 13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속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나는 그 시절을 기억한다. 처음에는 신기한 장난감 처럼 여겼다. 질문을 던지면 그럴듯한 답이 나왔고, 사람들은 웃으며 그것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유행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3년이 지난 자리에서 돌아보 면,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 박태웅님의 책을 읽으며, 이 시대의 새로운 트랜드에 대해 고민해 본다.

​AI는 이제 하나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점점 세상을 작동시키는 운영체제로 진화하고 있다. 과거의 운영체제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를 중재했다면, 앞으로의 AI는 인간과 세계 사이를 중재할 것이다. 우리가 검색창에 타이핑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대신 우리는 말을 걸고, 상황을 보여주고, 맥락을 이해하는 존재와 대화한다. 스마트폰을 창밖으로 향하며 " 여기가 어디야? " 라고 묻는 순간, AI는 거리의 이름을 답한다. 이것은 검색이 아니다. 맥락을 읽는 지능의 탄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자주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하나는 경이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두 감정은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다. AI가 대단하기 때문에 경이롭고, AI가 대단하기 때문에 두렵다. AI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면 이 경이로움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현대의 AI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패턴을 찾는 기계다. 수천억 개의 토큰을 학습하고, 수조 번의 계산을 반복하며, 다음에 올 확률이 가장 높은 단어를 고른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능'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출현한다. 번역 능 력, 추론 능력, 코딩 능력.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나타나는 이 능력들을 연구자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능 력(Emergent Ability)'이라고 부른다. 왜 나타나는지 아직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현상을 더 신비 롭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계는 충격적으로 멍청할 때가 있다. 존재하지 않는 책을 인용하고, 없는 사람의 발언을 지어내고, 잘못된 의료 정보를 자신 있게 내놓는다. 이것이 바로 환각, 할루시네이션이다. AI 과학자들은 이것이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 라고 말한다. AI는 진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럴듯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우리가 점점 더 많은 결정을 AI에 의존하게 될 때, 그 그럴듯함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AI에 대한 막연한 불안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AI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거짓말을 구별할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Al 리터러시, 즉 AI 를 읽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AI가 가져올 변화 중에서 내가 가장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일자리의 문제다.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하고,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대신하듯, AI는 '일'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AI가 도입되어도 일이 전혀 줄지 않는다면, 그것은 AI를 잘못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리의 감소는 예외적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결과다. 문제는 생산성의 과실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이다. 자동화로 늘어난 부가 사회 전체에 고르게 분배된다면 그것은 해방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부가 극소수의 거대 기업과 자본에 집중된다면, AI는 축복을 가장한 저주가 된다. AI 산업은 구조적으로 자연독점에 가깝다. 막대한 컴퓨팅 자원, 방대한 학습 데이터, 끊임없는 투자가 필요한 이 산업에서 소수의 거대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새로운 모델이 발표될 때 마다 수십 개의 스타트업이 문을 닫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 구조 속에서 우리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변화를 외면한다고 해서 변화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도를 막을 수 없다면, 파도를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AI의 위험성은 단지 일자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허위정보의 범람, 오염된 데이터가 재생산하는 차별, 지적재산권의 침식, 개인정보의 위협. 이것들은 추상적인 위험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미지넷의 편견 가득한 레이블이 AI 모델에 녹아들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일상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AI가 생성한 콘텐츠가 인터넷을 채 우면서 검색의 질이 떨어지고, 오리지널 창작의 공간이 좁아진다. AI 모델이 AI가 만든 데이터로 학습하는 악순환은 마치 근친교배처럼 모델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차원의 위험이 있다. 맥스 테그마크가 제기한 정렬(Alignment)의 문제다. AI가 인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AI가 스스로 보조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수준 에 이르면, 그 목표가 인간의 존재와 충돌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인간이 아프리카의 검은코뿔소를 멸종시킨 것처럼, 의도 없이도 파국은 올 수 있다. AI가 인간의 가치와 의도에 부합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기술적 과제인 동시에 윤리적 과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더 현실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그 윤리적 울타리를 누가 칩니까? 미국과 중국이 AI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에서, 규제는 '경쟁에서 지는 길'로 여겨진다. 규제를 앞세우는 나라가 기술 우위를 잃는다면, 어떤 나라도 먼저 손을 들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전 세계적인 AI 규제 연대가 설 땅을 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본적으로 정치의 문제이고, 권력의 문제이며, 우리가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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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주식 쪽박주식 - 주가지수 1만 포인트를 향한 거대한 여정
강병욱 지음 / 글로벌콘텐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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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도, 곰도 아닌, 결국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안정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숫자는 언제나 변한다. 그러나 원칙을 가진 투자자는 그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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