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 마음시선 클래식 2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윌리엄 월리스 덴슬로우 그림, 박선주 옮김 / 마음시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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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재에서 보랏빛 표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 은박으로 반짝이는 실루엣들이 마치 오래된 친구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읽었을까. 아마도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모험담으로만 여겼던 이야기가, 서른을 넘긴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이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있었다. 다만 도로시처럼 캔자스에서 오즈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잊혀진 내 안의 어떤 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에게는 뇌가 없어요." 허수아비의 말에 예전처럼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어왔던 나였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곤 했다. 승진 앞에서, 연애 앞에서,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나는 늘 "내가 과연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의심했다. 허수아비가 까마귀들을 쫓아내고,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지혜란 머리 속에 쌓인 지식의 양이 아니라, 상황을 헤쳐나가는 순간순간의 선택이었다. 내가 그동안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해온 모든 순간들이 바로 내 안의 지혜였다. 퍼플에디션의 보랏빛 글씨체가 이런 깨달음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석양 무렵의 하늘색처럼, 하루의 끝에서 돌아보는 성찰의 색깔이었다.

"나에게는 심장이 없습니다." 양철 나무꾼의 고백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점점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직장에서는 프로페셔널해야 하고,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어왔다. 때로는 내가 정말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냉정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양철 나무꾼이 동물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알았다.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그가야말로 가장 따뜻한 심정을 가진 존재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지만, 친구가 힘들어할 때 밤새 전화를 받아주었고, 길에서 다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 간 적도 있었다. 진짜 마음은 화려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조용히 누군가를 배려하고 돌보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 있었다.

사자의 이야기는 가장 뼈아팠다. "나는 겁쟁이예요." 이 한 마디가 지난 몇 년간의 나를 관통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머뭇거렸던 순간들,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던 때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사자는 이미 충분히 용감했다.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장서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을 보호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필요한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나도 그동안 적지 않은 용기를 발휘해왔다. 처음 직장에 입사했을 때의 떨림, 새로운 부서로 이동할 때의 불안,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전날의 초조함. 모든 순간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던 용기였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위대하고 전지전능해 보이던 존재가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반전. 어릴 때는 실망스러웠던 이 부분이, 지금은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멘토, 리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며 그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결국 내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고, 내가 원하는 변화도 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즈 역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각자에게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허수아비에게는 졸업장을, 양철 나무꾼에게는 심장 모양의 시계를, 사자에게는 용기의 메달을 주었지만, 그것들은 단지 상징이었다. 진짜 변화는 그들이 여정을 통해 스스로 이뤄낸 것이었다.

책 자체의 아름다움에 손이 같었다. 보랏빛 표지를 만질 때마다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질감, 은박으로 처리된 캐릭터들의 실루엣이 주는 환상적인 느낌, 그리고 본문의 특별한 컬러 인쇄까지. 특히 책 앞부분의 타로 카드 형태로 디자인된 캐릭터 소개 페이지가 인상적이었다. 각 인물의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이 구성을 보며, 이들이 동화 캐릭터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서로 다른 면모들을 대변한 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때 읽었던 작은 판형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마치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생이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 자체라는 것을.

도로시와 친구들이 에메랄드 시티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노란 벽돌길을 함께 걸어가며 서로를 아끼고 돌보던 순간들이 진짜 마법이었다. 나 역시 그동안 어떤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려고만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성공하기 위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현재의 내가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허수아비의 지혜, 양철 나무꾼의 마음, 겁쟁이 사자의 용기. 이 모든 것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재에 꽂힌 <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길을 잃고 헤맬 때,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고전의 힘이 아닐까. 시간이 흘러도 색바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빛을 발하는 이야기의 마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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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 자기 한계를 넘어선 열정과 호기심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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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중학교 미술 시간, 교과서에서 처음 마주한 그 신비로운 미소. 모나리자를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때는 '유명한 그림'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했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거대한 우주가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끝없이 질문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한 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경계를 넘어서려 했던 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던 그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다빈치를 움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식을 줄 모르는 호기심이었다. 새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물은 왜 그런 방식으 로 흐르는지, 인체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였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ADHD적 특성을 가진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집중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에 매달리지 못하는 특성. 하지만 그는 이 '결핍'을 오히려 '방향'으로 전환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 끊임없는 관찰과 실험을 통한 학습, 기존의 틀을 벗어난 창조적 접근, 이 모든 것이 그의 '산만함'에서 비롯된 선물이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수학 시간에는 창밖의 구름 모양에 빠져있고, 국어 시간에는 책의 삽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때는 그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빈치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호기심 많은 마음, 여러 영역에 관심을 갖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의 재능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빈치의 삶을 들여다보면 완성작보다 미완성작이 더 많다. 스포르차 기마상, 앙기아리 전투, 수많은 발명품들.... 그는 평생에 걸쳐 무수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이유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완성과 성공을 강요한다.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야 하고, 실패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빈치 는 미완성 그 자체가 또 다른 완전함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스케치북에 남겨진 수많은 아이디어들, 반쯤 그려진 그림들, 중단된 실험들... 이 모든 것이 모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거대한 작품을 완성했다. 나도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중도에 포기했다. 배우기 시작한 악기, 읽다가 덮은 책들, 쓰다가 멈춘 글들... 그때마다 자책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경험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빈치처럼 완벽한 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과 성장에 더 의미를 두게 되었다.

다빈치가 가장 혁신적이었던 점은 분야 간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과 과학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었다. 인체를 해부하며 얻은 지식이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빛과 그림자에 대한 예술적 탐구가 광학 연구로 이어졌다. 물의 흐름을 관찰하며 얻은 통찰이 머리카락을 그리는 기법이 되었고, 새의 비행을 연구하며 비행기의 원리를 구상했다. 오늘날 우리는 전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다른 영역에 대한 관심을 접어둔다. 하지만 진정한 창조는 서로 다른 영역의 만남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다 빈치는 몸소 보여주었다. 그의 융합적 사고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혁신적이고 앞서 있다.

"왜?"라는 질문. 다빈치의 모든 탐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왜 하늘은 파란가? 왜 새는 날 수 있는가? 왜 사람은 웃는가? 그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질문하기를 멈 춘다.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하지만 다빈치는 죽는 순간까지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호기심은 나이 들지 않았고, 그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모나리자의 그 신비로운 미소도 어쩌면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은 어떻게 얼굴에 드러나는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들이 쌓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걸작이 탄생했을 것이다. 다빈치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깨달은 것은, 그의 천재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끊임없는 관찰, 끝없는 실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멈추지 않는 호기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도 작은 다빈치가 살고 있다.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 하는 마음,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욕망,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고하고 싶어 하는 갈망.... 그것을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것을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 계속 질문하는 것,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다빈치는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의 미완성들이 모여 완전한 하나의 삶을 만들어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남기려 하기보다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탐구하고 창조하는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학창시절 처음 만났던 그 신비로운 미소가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오늘도 나는 답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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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완벽 활용! 비즈니스맨을 위한 프로그래밍 공부법
호리우치 료헤이 지음, 박수현 옮김 / 시원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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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직장에서 '프로그래밍'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코딩을 개발팀의 고유 업무로 간주하며, 자신과는 무관한 기술적 영역으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현재,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 특히 ChatGPT의 보편화는 프로그래밍 학습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복잡한 문법을 암기하거나 수년간의 학습 과정을 거쳐야만 프로그래밍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명확한 질문과 적절한 프 롬프트만으로도 실무에 필요한 자동화 도구를 만들고, 데이터 분석을 수행하며,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프로그래밍 학습은 높은 진입 장벽으로 악명이 높았다. 개발 환경 구축부터 시작하여 변수, 함수,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등 추상적 개념들을 순서대로 익혀야 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전체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세미콜론 하나, 괄호 하나의 누락으로 인해 몇 시간을 헤매는 경험은 많은 학습자들을 좌절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특히 비전공자들에게 는 오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조차 어려운 과제였다. "Syntax Error"나 "lIndex out of range"와 같은 메시지는 문제의 대략적인 위치만 알려줄 뿐,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은 학습자들이 프로그래밍을 포기하거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진전을 이루기 어려웠다. ChatGPT의 등장은 이러한 학습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이제 학습자는 24시간 언제든지 접근 가능한 개인 튜터를 곁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오류가 발생했을 때 코드를 복사해서 "이 코드에서 오류가 발생하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라 고 물어보면, 구체적인 문제점과 해결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더 나아가 ChatGPT는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설명의 깊이를 조절 할 수 있다. 초보자에게는 쉬운 언어로, 경험이 있는 사용자에게는 보다 기술적인 설명으로 응답한다. 이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에서는 불가능했던 개인화된 학습 경험을 제공한다.

ChatGPT를 활용한 비즈니스 프로그래밍 학습법의 핵심은 '목적 중심' 접근이다. 전통적인 교육과정처럼 변수부터 시작해서 함수, 클래스 순으로 배우는 대신, 실제 업무에서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프로그래밍 개념을 익히게 된다. 예를 들어, 매월 반복되는 매출 보고서 작성 업무가 있다면, ChatGPT에게 "엑셀에서 매출 데이터를 자동으로 정리하고 차트를 생성하는 프로그램 을 만들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학습자는 자연스럽게 데이터 처리, 조건문, 반복문, 라이브러리 활용 등의 개념을 접하게 된다. 효과적인 ChatGPT 활용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학습 로드맵 수립부터 시작하여, 환경 구축, 용어 이해, 오류 해결, 코드 최적화까지 단계별로 진행되는 30가지 팁은 학습자에게 명확한 방향성을 제공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질문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ChatGPT의 답변 품질은 질문의 품질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파이썬 배우고 싶어요"라는 막연한 질문보다는 "에 셀에서 1000개 이상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월별 매출 추이를 시각화하고 싶은데, 파이썬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와 같은 구체적 인 질문이 훨씬 유용한 답변을 이끌어낸다.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웹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간단한 할일 관리 서비스부터 시작하여, 팀 프로젝트 관리, 고객 관리 시스템 등 실무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핵심은 완벽한 서비스를 처음부터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최소한의 기능을 가진 프로토타입을 먼저 완성하고, 사용하면서 필요한 기능을 점진적으로 추가해나가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ChatGPT를 활용하는 것은 학습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수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질문하고 실험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학습이 일어난다. 특히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완벽한 코드를 작성하는 것 보다도, 실무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ChatGPT는 이러한 실용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파트너다. 앞으로 생성형 AI 기술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프로그래밍과 비즈니스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ChatGPT를 활용한 프로그래밍 학습법을 익히는 것은 미래 직업 환경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실험과 반복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ChatGPT라는 훌륭한 조력자와 함께라면, 누구나 프로그래밍의 힘을 빌려 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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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의 힌트
하승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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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96년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제정된 한겨레문학상이 30주년을 맞았다.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여 출간된 <서른 번의 힌트>를 읽으며, 나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 상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와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겨레문학상은 상만올 주고받는 의례적 행사가 아니었다. 심윤경, 박민규, 윤고은, 최진영, 장강명 등 현재 한국 문학을 이끌고 있는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 이 상이 얼마나 예리한 안목으로 재능 있는 작가들을 찾아내고 키워왔는지 알 수 있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축적된 이러한 성과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문학상이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발굴이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작가를 찾아내어 문학계와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 한겨레문학상은 이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그 결과 한국 문학의 지형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번 앤솔러지의 기획은 매우 흥미롭다. 역대 수상 작가들이 자신의 당선작을 모티프로 새로운 작품을 쓴다는 것. 작가에게 있어 당선작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자신이 작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해준 작품이자, 동시에 평생 쓸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박서련의 <옥이>를 읽으며 나는 이러한 연속성의 아름다움을 절감했다. <채공녀강주룡>의 옥이가 강주룡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 작품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한국 문학이 지난 30년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전해왔는지가 보인다. 소수자 문제, 성차별, 가정폭력, 사회적 불평등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뤄온 것이다. 특히 최진영의 <무명>이나 서수진의 <정말 괜찮으세요?> 같은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문학이 사회적 성찰의 도구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믿음이 이러한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각 작가의 독특한 문체와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20명의 작가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언어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한국 문학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승민의 SF적 상상력, 김희재의 무거운 현실 인식, 강성봉의 판타지적 요소, 김유원의 일상적 서사 등이 한 권의 책 안에서 어우러지면서도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이는 한겨레 문학상이 특정한 경향이나 유파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학적 시도를 포용해왔음을 의미한다. 한창훈의 〈홍합, 이시죠?>에서 작가는 문학상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토성이 양자리에 들어간다는 점성술적 해석을 통해서 라도 희망을 찾으려는 모습이 애정스럽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책이 몹시 안 팔리는 시절"이라는 현실 인식도 정확하다.

현재 한국 문학은 독자들의 관심 부족과 출판 시장의 어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 등 새로운 매체가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문학의 위치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문학이 가진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서른 번의 힌트> 같은 기획이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작가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한국 문학의 풍부함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각 작품에 30'이라는 키워드를 숨겨놓아 찾는 재미를 더한 것도 소통을 위한 세심한 배려인 것 같다. 30년이라는 시간은 한 세대가 지나는 시간이다. 1996년에 한겨레문학상이 제정될 때의 문학 환경과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인터넷의 보급, 소셜미디어의 등장, 디지털 출판의 확산 등 문학을 둘러싼 모든 조건이 바뀌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도 있다. 인간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문학의 본질적 욕구는 여전하다. <서른 번의 힌트>에 수록된 작품 들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런 불변의 가치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꿈과 좌절, 희망과 절망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 본적 조건들은 변하지 않는다.

한겨레문학상 3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지속성이라고 본다. 30년 동안 일관되게 좋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온 것, 한국 문학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해온 것,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온 것이 오늘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앞으로의 30년은 어떨까.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문학의 형태와 유통 방식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AI가 소설을 쓰는 시대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쓰는 문학의 가치는 더욱 소중해질 것이다.

<서른 번의 힌트>를 읽으며 나는 한국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좋은 작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출판 시장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미있는 기획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조건들이 유지되는 한, 한국 문학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30년을 돌아보며 다음 30년을 준비하는 한겨레문학상의 여정에 한국 문학 전체가 함께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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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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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빈 화면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눌러가며 문장을 만들어내는 이 행위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본다. 밥을 주지도,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않는 이 일이 왜 이렇 게 간절한가. 그런데 이상하다. 이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카페에서 들리는 대화의 조각, 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도 모든 것이 잠재적인 이야기의 씨앗처럼 느껴진다. 마치 세상 전체가 거대한 원고지가 된 것 같다. 양다솔의 편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쓰는 사람은 정말 다르게 산다. 조금 더 살금살금 걷고, 시선이 더 오래 머물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한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도, 마트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항 상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겪은 실패의 맛, 내가 느낀 상실의 무게, 내가 스쳐간 순간들의 온도까지도 모두 나만의 것이다. 어제 오래된 친구와 통화를 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시절을 보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간은 전혀 달랐다. 그녀에게는 찬란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나에게는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같은 교실, 같은 선생님, 같은 급식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그 외로움도, 복도 끝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던 그 시간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내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실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삶에서의 실패는 여전히 아프고 견디기 힘들지만, 글 속의 실패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의 좌절처럼, 소설 속 인물의 넘어짐처럼, 거리감이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난해 준비했던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경험을 글로 쓰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절망적이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지면서, 동시에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낸 나 자신, 포기하지 않았던 작은 희망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배운 것 들이다. 글을 쓰는 것은 실패를 가지고 노는 것 같다. 조물주가 점토를 빚듯이, 나의 좌절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고, 다른 각도에 서 조명을 비춰보고, 때로는 유머로 포장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된다.

가장 쓰기 어려운 것이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떠나간 사람들, 잃어버린 시간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들. 그런 것들에 대해 쓰려고 하면 먼저 내 마음이 먹먹해진다. 정말 이런 사적인 아픔을 남들이 읽어도 되는 걸까, 하는 주저함도 든다. 하지만 써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거대했던 상실이 글자 수만큼 작아진다. 마치 어둠 속의 괴물이 불을 켜면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처럼. 글로 쓰인 상실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쉼터가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 그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아파서.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할머니의 손등에 있던 검은 점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갔다. 그 작은 점에서 시작해서 할머니의 일생으로, 그리고 나와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그렇게 쓰고 나니 할머니가 떠나신 게 아니라 글 속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빈 문서 앞에 앉으면 막막하다. 하얀 화면과 깜빡이는 커서가 주는 압박감은 언제나 똑같다. '오늘은 뭘 써야 하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혹시 쓸 만한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닐 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 때, 양다솔의 말이 떠오른다. 막막한 만큼 좋은 이야기가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이야기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고.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가장 쓰기 싫은 날에 쓴 글이 의외 로 좋을 때가 있다. 아무 영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어디선가 문장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지하수처럼, 보이 지 않는 곳에서 계속 흐르고 있던 이야기들이 말이다.

양다솔님이 상상하는 그 도서관을 나도 그려본다. 우리가 쓴 이야기들로 가득 찬 공간. 거기서는 결코 귀를 막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누구의 이야기든 환영받는 곳, 어떤 목소리든 들을 수 있는 곳. 내가 쓴 글들도 언젠가 그 도서관의 한 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조금 더 경건해진다. 글쓰기는 끝이 있으면서도 없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면 끝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삶이 계속되는 한 쓸 이야기도 계속 생겨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빈 문서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나처럼 막막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첫 문장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 양다솔의 편지가 닿기를, 그리고 내 이야기도 작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 빈 문서의 깜빡임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그것은 곧 시작될 이야기의 신호등이다. 초록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오늘도 그 깜 빡임을 바라보며 첫 문장을 준비한다. 양다솔님께 받은 정말 좋은 편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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