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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 ㅣ 마음시선 클래식 2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윌리엄 월리스 덴슬로우 그림, 박선주 옮김 / 마음시선 / 2025년 7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재에서 보랏빛 표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 은박으로 반짝이는 실루엣들이 마치 오래된 친구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읽었을까. 아마도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모험담으로만 여겼던 이야기가, 서른을 넘긴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이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있었다. 다만 도로시처럼 캔자스에서 오즈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잊혀진 내 안의 어떤 공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나에게는 뇌가 없어요." 허수아비의 말에 예전처럼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어왔던 나였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곤 했다. 승진 앞에서, 연애 앞에서,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나는 늘 "내가 과연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의심했다. 허수아비가 까마귀들을 쫓아내고,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지혜란 머리 속에 쌓인 지식의 양이 아니라, 상황을 헤쳐나가는 순간순간의 선택이었다. 내가 그동안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해온 모든 순간들이 바로 내 안의 지혜였다. 퍼플에디션의 보랏빛 글씨체가 이런 깨달음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석양 무렵의 하늘색처럼, 하루의 끝에서 돌아보는 성찰의 색깔이었다."나에게는 심장이 없습니다." 양철 나무꾼의 고백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점점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직장에서는 프로페셔널해야 하고,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어왔다. 때로는 내가 정말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냉정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양철 나무꾼이 동물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알았다.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그가야말로 가장 따뜻한 심정을 가진 존재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지만, 친구가 힘들어할 때 밤새 전화를 받아주었고, 길에서 다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 간 적도 있었다. 진짜 마음은 화려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조용히 누군가를 배려하고 돌보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 있었다.사자의 이야기는 가장 뼈아팠다. "나는 겁쟁이예요." 이 한 마디가 지난 몇 년간의 나를 관통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머뭇거렸던 순간들,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던 때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사자는 이미 충분히 용감했다.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장서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동료들을 보호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필요한 일을 해내는 것이었다. 나도 그동안 적지 않은 용기를 발휘해왔다. 처음 직장에 입사했을 때의 떨림, 새로운 부서로 이동할 때의 불안,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전날의 초조함. 모든 순간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던 용기였다.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위대하고 전지전능해 보이던 존재가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반전. 어릴 때는 실망스러웠던 이 부분이, 지금은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멘토, 리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며 그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결국 내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고, 내가 원하는 변화도 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즈 역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각자에게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허수아비에게는 졸업장을, 양철 나무꾼에게는 심장 모양의 시계를, 사자에게는 용기의 메달을 주었지만, 그것들은 단지 상징이었다. 진짜 변화는 그들이 여정을 통해 스스로 이뤄낸 것이었다.책 자체의 아름다움에 손이 같었다. 보랏빛 표지를 만질 때마다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질감, 은박으로 처리된 캐릭터들의 실루엣이 주는 환상적인 느낌, 그리고 본문의 특별한 컬러 인쇄까지. 특히 책 앞부분의 타로 카드 형태로 디자인된 캐릭터 소개 페이지가 인상적이었다. 각 인물의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이 구성을 보며, 이들이 동화 캐릭터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서로 다른 면모들을 대변한 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때 읽었던 작은 판형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마치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생이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 자체라는 것을.도로시와 친구들이 에메랄드 시티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노란 벽돌길을 함께 걸어가며 서로를 아끼고 돌보던 순간들이 진짜 마법이었다. 나 역시 그동안 어떤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려고만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성공하기 위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현재의 내가 충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허수아비의 지혜, 양철 나무꾼의 마음, 겁쟁이 사자의 용기. 이 모든 것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재에 꽂힌 <오즈의 마법사 퍼플에디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길을 잃고 헤맬 때,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고전의 힘이 아닐까. 시간이 흘러도 색바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빛을 발하는 이야기의 마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