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 은퇴와 노화 사이에서 시작하는 자기 돌봄
이병남 지음 / 해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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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균형 잡힌 자세를 통해 인생의 마지막 장을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게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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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 은퇴와 노화 사이에서 시작하는 자기 돌봄
이병남 지음 / 해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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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얼굴과 마주한다. 주름진 눈가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시간의 무게를 증명한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은밀한 두려움이 스며든다.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번에 이병남 전 LG인화원 사장의 <오늘도 성장하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은퇴 이후의 자기 돌봄이라는 화두는 여가나 건강 관리를 넘어선 실존적 물음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사회적 정체성이 박탈된 공허함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젊음의 직선적 성취에서 노년의 곡선적 지혜로 전환하는 깊은 성찰의 과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치·치·집(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에서 '느·조·심(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다. 수십 년간 목표를 향해 질주해온 삶에서 갑작스럽게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은 마치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시골길로 접어드는 것과 같은 당혹감을 준다. 하지만 저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속도의 변화가 결코 퇴보가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오히려 그동안 빠른 속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 느껴지지 않았던 감정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발견한 진정한 제주의 모습처럼, 느림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자기 돌봄의 첫 단계는 바로 이 느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자책하는 대신, 몸이 요구하는 리듬에 귀 기울이는 것.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요한 시간을 통해 내면과 대화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기 돌봄의 시작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자아 축소'의 개념은 은퇴 이후 자기 돌봄에서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젊은 시절 자아를 확장하며 성공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자아를 축소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을 아끼는 방법이다. 물이 작은 틈으로 스며들듯, 자아가 작아질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일어난다. 은퇴 이후의 관계는 더 이상 지위나 권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적 매력과 따뜻함만이 남는다. 이때 과거의 영광을 내세우거나 여전히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는 것은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어린 관심을 보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연결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관계의 재정립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고, 상호 돌봄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근력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은퇴 이후 자기 돌봄에서 신체적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턱걸이 하나도 할 수 없던 상태에서 시작해 꾸준한 훈련을 통해 체력을 회복해가는 과정은,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것을 넘어 자신감과 성취감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몸의 한계를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는 것, 작은 변화라도 꾸준히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케테 콜비츠의 여동생 리제가 말한 "노년이란 청춘이 가졌던 힘의 나머지가 아니라, 온전히 새로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커다란 무엇"이라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마음의 돌봄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고 독자들과 소통한 것처럼, 은퇴 이후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정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글일 수도, 그림일 수도, 음악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은퇴는 사회적 역할의 상실이지만, 동시에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Doing'(역할)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Being'(존재)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는 무위도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성취가 아닌 내적 충실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저자가 비영리 단체에서 겪은 시련은 이러한 의미 찾기가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의로 도우려 했지만 오해받고 상처받는 일들을 통해, 노년의 성장에도 성장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련조차도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은퇴 이후의 자기 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열정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작고 소소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은퇴 이후의 자기 돌봄은 단순히 건강을 유지하거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깊은 지혜를 얻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젊은 시절의 성장이 외적 확장을 통한 것이었다면, 노년의 성장은 내적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사회적 성취나 타인의 인정이 아닌, 존재 자체의 충실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때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평안과 지혜는 젊은 시절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케테 콜비츠가 말한 "영원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는 표현처럼, 노년은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시기가 될 수 있다. 물질적 성취나 사회적 지위의 빛이 아닌,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는 따뜻하고 깊은 빛을 말이다. 은퇴 이후의 자기 돌봄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성숙한 방법이다. 과거의 자신을 긍정하되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되 포기하지 않으며, 미래의 자신을 준비하되 불안해하지 않는 것. 이러한 균형 잡힌 자세를 통해 인생의 마지막 장을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게 써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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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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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나고 새벽빛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 때, 나는 종종 그 빛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각형 프레임에 담긴 세상은 때로는 한 폭의 그림처럼,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창문이라는 경계선은 안과 밖을 구분하지만, 동시에 그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이번에 읽은 박소현의 <창문 너머 예술>을 통해 만난 예술가들의 창문은 단순한 건축적 요소를 넘어선 철학적 공간이었다. 하메르스회의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들, 샤갈의 환상 속에 떠다니는 연인들, 페르메이르의 진주 같은 빛의 입자들과 같이, 이들은 모두 창문이라는 틀 안에서 각자의 우주를 펼쳐 보였다.

"경계에 서 있지 않고서는 그것이 경계였는지 모른다" 가슴에 와닿는다. 창문은 물리적 경계이지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지 않은가. 학교와 사회, 청춘과 성인,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또렷한 창문의 순간은 대학 기숙사의 작은 창문이었다. 그 창 너머로는 캠퍼스의 일상이 펼쳐졌고, 나는 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경계의 시간이었는지를 말이다. 창가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뒷모습이 자주 그림의 소재가 되는 이유를 이제 안다. 뒷모습은 관찰자에게 상상의 여백을 남긴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게 된다.

도시의 아파트 창문들은 밤이 되면 수많은 작은 무대가 된다. 각각의 창문 안에는 저마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나는 때로는 관객이, 때로는 배우가 되어 그 무대 위에 선다. 현대인의 외로움이 창문과 만날 때, 그것은 단순한 고독을 넘어 존재론적 성찰로 이어진다. 카유보트의 그림 속 창가에 선 인물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창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SNS라는 디지털 창문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더욱 깊은 고립감을 느끼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외로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로움은 때로 우리를 보호하는 투명한 막이 되어주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선사한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다. 아침의 빛은 희망적이고 역동적이며, 저녁의 빛은 서정적이고 사색적이다. 겨울의 빛은 날카롭고 선명하며, 여름의 빛은 풍성하고 따뜻하다. 하메르스회가 포착한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들을 보며 생각한다. 평소에는 더럽다고 여겨졌던 먼지들이 빛을 만나는 순간 마법 같은 존재가 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순간으로 변화시키는 시선의 마법 말이다. 창문은 자연광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인공조명의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밤이 되어 실내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스며 나갈 때, 그 창문은 거대한 도시라는 캔버스 위의 하나의 픽셀이 된다.

창문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를 규정한다. 실내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바깥을 관찰할 수 있지만, 바깥의 사람에게는 그 창문 안의 세계가 때로는 호기심의 대상이, 때로는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된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창가의 여인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창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완벽한 구도로 포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완벽함 뒤에는 여성에게 허락된 제한적 공간에 대한 은밀한 고발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창문은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속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창문은 어떤 의미일까.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지금, 집의 창문은 사무실이 되고, 카페가 되고, 때로는 전 세계와 연결되는 포털이 되기도 한다. 물리적 경계는 희미해졌지만, 심리적 경계는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다.

샤갈의 환상적인 창문들을 보면,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의 창문 너머에는 날아다니는 연인들과 바이올린을 든 천사들이 있다. 이것이 예술가의 시선이 아닐까. 평범한 창문을 통해 비범한 세계를 보는 능력 말이다. 창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급한 일도 없고,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저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실은 가장 소중한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아그네스 마틴의 미니멀한 작품들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연습. 창문 앞의 명상은 이런 수행의 시간이기도 하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호흡을 느끼고, 빛의 변화를 관찰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창문의 개념도 변화하고 있다. 가상현실의 창문, 증강현실의 창문,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맞춤형 창문... 미래의 창문들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실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의 빛과 바람,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들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짜 경험과 가상 경험 사이의 간극, 그것을 메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아닐까?

박소현은 "나는 창문을 열어 두기로 했다"고 말한다. 창문을 열어둔다는 것은 변화에 열려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닫힌 창문의 안전함을 포기하고 열린 창문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 때로는 찬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소음이 들려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창문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하루, 변화하는 계절,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나 자신까지. 창문을 열고 그 모든 가능성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창문은 세상을 보는 틀이지만, 동시에 그 틀을 넘어서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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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행동경제학 - 숫자로 움직이는 부동산, 심리로 해석하다
최황수 지음 / 원앤원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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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목이 흥미롭다. <부동산 행동경제학>. 기존의 부동산 시장과 투자에 대한 접근 방법이 신선하다. ^.^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동일한 정보와 환경 속에서도 투자자마다 전혀 다른 결과를 얻는다는 점이다. 같은 시점에 같은 지역을 보고도 한 사람은 매수하여 수익을 올리고, 다른 사람은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거나 잘못된 타이밍에 투자하여 손실을 본다. 이러한 차이는 운이나 정보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편향과 비합리적 의사결정 패턴에서 비롯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가정했다. 하지만 현실의 투자자들은 감정, 경험, 습관에 따라 움직이며, 때로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선택을 반복한다. 행동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실제 모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부동산 투자의 실패와 성공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부동산 투자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심리적 함정은 정보편향이다. 이는 크게 확증편향, 가용성편향, 근접성편향, 불확실성회피로 구분할 수 있다. 확증편향은 투자자가 자신의 기존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집하고 해석하는 경향이다. 특정 지역이 상승할 것이라고 믿는 투자자는 그 지역의 긍정적인 뉴스에만 주목하고, 부정적인 신호들은 무시하거나 축소해서 받아들인다. 이는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근거만을 찾는 역순 추론의 오류로 이어진다. 가용성편향은 개인의 제한된 경험에 과도한 가중치를 두는 현상이다. 과거에 특정 지역에서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면, 그 지역 전체를 극단적으로 과소평가하게 된다. 반대로 성공 경험이 있는 지역은 객관적 조건과 무관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개인의 경험이 전체 시장을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근접성편향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경험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현상이다. 예전에 거주했던 지역이나 직장이 있었던 곳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객관적인 시장 분석을 방해한다. 이러한 편향들은 모두 투자자가 시장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인지적 필터 역할을 한다.

일반 투자자뿐만 아니라 자칭 전문가들도 행동경제학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은 부동산 전문가들이 데이터 분석을 근거로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수치 관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진정한 데이터 분석은 오차와 오류를 검증하는 통계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대부분은 데이터의 흐름과 추세선만 보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고정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리한 데이터만 선택적으로 채택한다는 점이다. 이는 확증편향의 전문가 버전으로, 사변적 사유가 아닌 근거 있는 주장이라는 방패막이를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분석과는 거리가 멀다. 전문가들은 또한 감정적 영향, 시장편향, 리스크 회피 등의 편향에 노출되어 있다. 특정 부동산에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거나, '뜨는 지역'이라는 시장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틀렸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지나치게 보수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부동산 시장에는 투자자의 의사결정을 유도하거나 조작하려는 다양한 장치들이 존재한다. 넛지는 상대적으로 선의의 개입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설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부동산 마케팅에서는 이러한 넛지가 소비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모델하우스는 넛지 전략이 집약된 공간이다. 실제 평면과 동일하지만 최상급 인테리어와 조명, 가구로 꾸며져 방문객에게 최고의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내부 치장이 아니라 입지와 인프라다. 화려한 포장지에 현혹되어 본질을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다크패턴이다. 이는 소비자를 직접적으로 속이는 마케팅 기법으로, 분양광고의 과장된 표현이나 분양사무소의 심리적 압박 전술 등이 대표적이다. "70%의 방문객이 계약서를 작성한다"는 분양업계의 통계는 이러한 다크패턴의 효과를 보여준다. 정보의 비대칭성도 중요한 문제다. 판매자는 소비자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악용해 불리한 거래를 유도할 수 있다. 자동차 수리비나 주택 인테리어 비용처럼, 일반인이 검증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인간에게는 기존 상황을 유지하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현상유지편향은 다른 대안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해도 기존의 상황이나 성향을 고수하려는 심리다. 부동산 투자에서는 이것이 양면으로 나타난다. 너무 익숙한 지역을 고평가하거나, 반대로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평가하는 것이다. 앵커링 효과는 처음 접한 정보가 이후 판단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특정 부동산의 첫 제시 가격이 기준점이 되어, 그보다 높으면 거품이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식이다. 이는 시장의 실제 흐름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기준점에 매몰되게 만든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개인의 편향이 집단적 현상으로 증폭되기도 한다. 풍선효과는 한 지역의 규제가 강화되면 투자 자금이 다른 지역으로 몰리면서 가격 상승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는 개별 투자자들의 합리적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중심리와 모방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뜨는 지역'이라는 소문이 돌면 전문가들조차 그 지역에 대한 긍정적 의견을 쏟아낸다. 개인적 분석보다는 주류 의견에 편승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사고는 자산 거품을 키우고, 결국 시장 전체의 불안정성을 높인다.


부동산 시장은 끊임없이 변한다. 정책이 바뀌고, 금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시장을 흔든다. 이런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투자자는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행동경제학의 통찰은 이러한 원칙을 세우는 데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인간의 심리적 편향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감정이 아닌 이성에 기반한 투자 판단이 가능해진다. 부동산 투자의 성공은 시장을 예측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편향된 사고를 걸러내고,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해 판단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된 전략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행동경제학이 제시하는 현명한 투자자의 모습이다. 시장의 파도 위에서 중심을 잡고 싶다면, 먼저 자신 내부의 편향과 감정이라는 파도를 다스려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합리적인 투자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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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미치도록 걷다 - 방랑작가 박인식의 부처의 길 순례
박인식 지음 / 생각정거장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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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구의 산티아고 길이 십자가를 향한 구원의 여정이라면, 부처의 길은 스스로를 향한 깨달음의 순례다. 한 사람이 2,500년 전 왕궁을 버리고 맨발로 나선 그 길을, 오늘 우리는 왜 다시 걸으려 하는 걸까. 박인식의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를 읽으며 느낀 건, 이 길이 종교적 순례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론적 탐색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던진 이 물음을 저자는 네팔과 인도의 먼지길에서 되묻는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고갱의 명화를 생각하면서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산티아고 길이 이미 잘 정비된 문명의 길이라면, 부처의 길은 여전히 원시의 숨결이 살아있는 미완의 길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별을 보며 잠들고, 소똥으로 만든 연료를 쌓아올리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이 길에서는 현대화라는 이름의 문명이 아직 침투하지 못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묘사하는 안개 속 풍경은 인상적이다. 안개는 모든 사람을 세상의 중심에 서게 만든다고 했다. 내가 걸으면 세상의 중심이 한 걸음씩 옮아간다는 그 표현에서, 순례의 본질을 본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목적지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걸어간다. 반면 부처의 길에서는 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동서양 순례문화의 근본적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평해진다. 입체감을 잃고 몽타주처럼 겹쳐진다. 이런 상황에서 순례자는 외부 세계에 의존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내면의 나침반에만 의존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순례가 시작된다.

부처가 입멸 후 관 밖으로 내민 맨발, 그 맨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맨발이 되어 맨발의 땅을 따라 걷겠다고 선언한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맨발로 걷는 것 사이에는 단순한 물리적 차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땅과 직접 맞닿는다는 뜻이다. 중간에 어떤 매개체도 없이, 발바닥의 신경이 직접 대지의 온도와 질감을 느낀다. 이는 곧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보호막 속에서 살아간다. 에어컨이 있는 건물에서 자동차로 이동하고, 다시 에어컨이 있는 또 다른 건물로 들어간다. 자연의 변화를 직접 체감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맨발의 순례는 이런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삶과 마주하겠다는 결의다.

부처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네팔의 오지 마을 사람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 하지만 저자는 이들에게서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한다. 미누카라는 열여섯 살 소녀, 꽃필라라는 여인, 백 살 어머니를 모시는 우펜드라. 이들의 삶에는 현대 문명이 추구하는 효율성이나 생산성 같은 것들은 없다. 대신 삶의 리듬이 자연과 일치하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적 유대가 살아있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면, 부처의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으로는 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이들에게서 순례자는 진정한 가르침을 받는다.

부처의 길에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이곳은 별을 일찍 깨우기 위해 일찌감치 어두워지는 땅"이라는 저자의 표현처럼, 이곳의 시간은 자연의 리듬을 따른다. 저녁 여덟 시면 사람들이 가축들과 뒤섞여 잠든다는 묘사에서, 산업문명의 인위적 시간표에 길들여진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된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우리는 언제부터 별을 잊고 살았을까. 순례는 이런 인위적 시간에서 벗어나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든다.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신다. 이런 단순하고 원초적인 리듬 속에서 몸과 마음이 조화를 찾는다.

​부처의 길은 탄생지 룸비니에서 시작해 열반지 쿠시나가라에서 끝난다. 생과 사가 하나의 순환고리를 이루는 구조다. 이는 산티아고 길이 대성당이라는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것과는 다른 철학을 담고 있다. 저자는 쿠시나가라가 부처의 고향 카필라바스투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곳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결국은 인간이었다는 증거다. 갠지스 강에서 화장되는 시신들을 보며, 저자는 "죽음은 저 말없는 강물처럼 경건한데 삶은 이토록 우스꽝스럽다"고 적었다.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허상이 벗겨진다. 순례는 이런 죽음의 가르침을 미리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걸음은 목적이 없어야만 해. 산 정상이나 여행 명소 따위를 목적지 삼아 걸어서는 등산이나 관광놀이로 끝나지." 저자가 인용한 어느 스님의 말처럼, 부처의 길에서는 걷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온전히 걷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는 현대인들이 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현재 이 순간, 지금 이 걸음이 전부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하면서 굳은살이 박이는 과정, 그 자체가 변화와 성장의 은유다. 몸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체득한다. 이것이 머리로 하는 공부와 몸으로 하는 수행의 차이점이다.


산티아고 길이 서구 기독교 문명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부처의 길은 동양 불교 문화의 원형을 체험하는 순례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각각의 응답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걸은 1,500km의 여정을 읽으며, 순례란 결국 외부의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성함을 깨우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부처도 예수도 결국 우리 안에 있다. 다만 그것을 깨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을 두고 부처는 깨친다고 했다"는 문장이 인상깊다. 결국 모든 순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하지만 돌아온 제자리는 떠나기 전의 그곳과는 다르다. 같은 풍경이지만 보는 눈이 달라졌고, 같은 일상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변했다.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걸을 날이 올까. 네팔의 안개 속을 헤치고, 인도의 먼지 길을 걸으며, 2,500년 전 한 청년이 던진 질문을 내 안에서 다시 울려 퍼뜨리는 날이 올까. 그 날까지는, 일상이라는 나만의 순례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맨발은 아니더라도, 맨마음으로 진장한 나를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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