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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나고 새벽빛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 때, 나는 종종 그 빛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각형 프레임에 담긴 세상은 때로는 한 폭의 그림처럼,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창문이라는 경계선은 안과 밖을 구분하지만, 동시에 그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이번에 읽은 박소현의 <창문 너머 예술>을 통해 만난 예술가들의 창문은 단순한 건축적 요소를 넘어선 철학적 공간이었다. 하메르스회의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들, 샤갈의 환상 속에 떠다니는 연인들, 페르메이르의 진주 같은 빛의 입자들과 같이, 이들은 모두 창문이라는 틀 안에서 각자의 우주를 펼쳐 보였다."경계에 서 있지 않고서는 그것이 경계였는지 모른다" 가슴에 와닿는다. 창문은 물리적 경계이지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지 않은가. 학교와 사회, 청춘과 성인,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또렷한 창문의 순간은 대학 기숙사의 작은 창문이었다. 그 창 너머로는 캠퍼스의 일상이 펼쳐졌고, 나는 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경계의 시간이었는지를 말이다. 창가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뒷모습이 자주 그림의 소재가 되는 이유를 이제 안다. 뒷모습은 관찰자에게 상상의 여백을 남긴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게 된다.도시의 아파트 창문들은 밤이 되면 수많은 작은 무대가 된다. 각각의 창문 안에는 저마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나는 때로는 관객이, 때로는 배우가 되어 그 무대 위에 선다. 현대인의 외로움이 창문과 만날 때, 그것은 단순한 고독을 넘어 존재론적 성찰로 이어진다. 카유보트의 그림 속 창가에 선 인물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창 앞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SNS라는 디지털 창문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더욱 깊은 고립감을 느끼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외로움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로움은 때로 우리를 보호하는 투명한 막이 되어주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선사한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다. 아침의 빛은 희망적이고 역동적이며, 저녁의 빛은 서정적이고 사색적이다. 겨울의 빛은 날카롭고 선명하며, 여름의 빛은 풍성하고 따뜻하다. 하메르스회가 포착한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들을 보며 생각한다. 평소에는 더럽다고 여겨졌던 먼지들이 빛을 만나는 순간 마법 같은 존재가 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순간으로 변화시키는 시선의 마법 말이다. 창문은 자연광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인공조명의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밤이 되어 실내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스며 나갈 때, 그 창문은 거대한 도시라는 캔버스 위의 하나의 픽셀이 된다.창문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관계를 규정한다. 실내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서 바깥을 관찰할 수 있지만, 바깥의 사람에게는 그 창문 안의 세계가 때로는 호기심의 대상이, 때로는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된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창가의 여인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창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완벽한 구도로 포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완벽함 뒤에는 여성에게 허락된 제한적 공간에 대한 은밀한 고발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창문은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속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현대의 우리에게 창문은 어떤 의미일까.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지금, 집의 창문은 사무실이 되고, 카페가 되고, 때로는 전 세계와 연결되는 포털이 되기도 한다. 물리적 경계는 희미해졌지만, 심리적 경계는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다.샤갈의 환상적인 창문들을 보면,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의 창문 너머에는 날아다니는 연인들과 바이올린을 든 천사들이 있다. 이것이 예술가의 시선이 아닐까. 평범한 창문을 통해 비범한 세계를 보는 능력 말이다. 창문 앞에 앉아 있는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급한 일도 없고,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저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실은 가장 소중한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아그네스 마틴의 미니멀한 작품들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연습. 창문 앞의 명상은 이런 수행의 시간이기도 하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호흡을 느끼고, 빛의 변화를 관찰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창문의 개념도 변화하고 있다. 가상현실의 창문, 증강현실의 창문,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맞춤형 창문... 미래의 창문들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실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의 빛과 바람,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들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짜 경험과 가상 경험 사이의 간극, 그것을 메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아닐까?박소현은 "나는 창문을 열어 두기로 했다"고 말한다. 창문을 열어둔다는 것은 변화에 열려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닫힌 창문의 안전함을 포기하고 열린 창문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 때로는 찬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소음이 들려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창문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하루, 변화하는 계절,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나 자신까지. 창문을 열고 그 모든 가능성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창문은 세상을 보는 틀이지만, 동시에 그 틀을 넘어서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