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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미치도록 걷다 - 방랑작가 박인식의 부처의 길 순례
박인식 지음 / 생각정거장 / 2025년 9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구의 산티아고 길이 십자가를 향한 구원의 여정이라면, 부처의 길은 스스로를 향한 깨달음의 순례다. 한 사람이 2,500년 전 왕궁을 버리고 맨발로 나선 그 길을, 오늘 우리는 왜 다시 걸으려 하는 걸까. 박인식의 『너에게 미치도록 걷다』를 읽으며 느낀 건, 이 길이 종교적 순례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론적 탐색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던진 이 물음을 저자는 네팔과 인도의 먼지길에서 되묻는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고갱의 명화를 생각하면서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산티아고 길이 이미 잘 정비된 문명의 길이라면, 부처의 길은 여전히 원시의 숨결이 살아있는 미완의 길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별을 보며 잠들고, 소똥으로 만든 연료를 쌓아올리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이 길에서는 현대화라는 이름의 문명이 아직 침투하지 못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묘사하는 안개 속 풍경은 인상적이다. 안개는 모든 사람을 세상의 중심에 서게 만든다고 했다. 내가 걸으면 세상의 중심이 한 걸음씩 옮아간다는 그 표현에서, 순례의 본질을 본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목적지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걸어간다. 반면 부처의 길에서는 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동서양 순례문화의 근본적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평해진다. 입체감을 잃고 몽타주처럼 겹쳐진다. 이런 상황에서 순례자는 외부 세계에 의존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내면의 나침반에만 의존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순례가 시작된다.
부처가 입멸 후 관 밖으로 내민 맨발, 그 맨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맨발이 되어 맨발의 땅을 따라 걷겠다고 선언한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맨발로 걷는 것 사이에는 단순한 물리적 차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땅과 직접 맞닿는다는 뜻이다. 중간에 어떤 매개체도 없이, 발바닥의 신경이 직접 대지의 온도와 질감을 느낀다. 이는 곧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보호막 속에서 살아간다. 에어컨이 있는 건물에서 자동차로 이동하고, 다시 에어컨이 있는 또 다른 건물로 들어간다. 자연의 변화를 직접 체감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맨발의 순례는 이런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삶과 마주하겠다는 결의다.
부처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네팔의 오지 마을 사람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 하지만 저자는 이들에게서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한다. 미누카라는 열여섯 살 소녀, 꽃필라라는 여인, 백 살 어머니를 모시는 우펜드라. 이들의 삶에는 현대 문명이 추구하는 효율성이나 생산성 같은 것들은 없다. 대신 삶의 리듬이 자연과 일치하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적 유대가 살아있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면, 부처의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역설적이게도 물질적으로는 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풍요로운 이들에게서 순례자는 진정한 가르침을 받는다.
부처의 길에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이곳은 별을 일찍 깨우기 위해 일찌감치 어두워지는 땅"이라는 저자의 표현처럼, 이곳의 시간은 자연의 리듬을 따른다. 저녁 여덟 시면 사람들이 가축들과 뒤섞여 잠든다는 묘사에서, 산업문명의 인위적 시간표에 길들여진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된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서 우리는 언제부터 별을 잊고 살았을까. 순례는 이런 인위적 시간에서 벗어나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든다.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신다. 이런 단순하고 원초적인 리듬 속에서 몸과 마음이 조화를 찾는다.
부처의 길은 탄생지 룸비니에서 시작해 열반지 쿠시나가라에서 끝난다. 생과 사가 하나의 순환고리를 이루는 구조다. 이는 산티아고 길이 대성당이라는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것과는 다른 철학을 담고 있다. 저자는 쿠시나가라가 부처의 고향 카필라바스투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곳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결국은 인간이었다는 증거다. 갠지스 강에서 화장되는 시신들을 보며, 저자는 "죽음은 저 말없는 강물처럼 경건한데 삶은 이토록 우스꽝스럽다"고 적었다.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허상이 벗겨진다. 순례는 이런 죽음의 가르침을 미리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든 걸음은 목적이 없어야만 해. 산 정상이나 여행 명소 따위를 목적지 삼아 걸어서는 등산이나 관광놀이로 끝나지." 저자가 인용한 어느 스님의 말처럼, 부처의 길에서는 걷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온전히 걷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는 현대인들이 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다.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현재 이 순간, 지금 이 걸음이 전부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하면서 굳은살이 박이는 과정, 그 자체가 변화와 성장의 은유다. 몸의 변화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체득한다. 이것이 머리로 하는 공부와 몸으로 하는 수행의 차이점이다.
산티아고 길이 서구 기독교 문명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부처의 길은 동양 불교 문화의 원형을 체험하는 순례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각각의 응답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걸은 1,500km의 여정을 읽으며, 순례란 결국 외부의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신성함을 깨우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부처도 예수도 결국 우리 안에 있다. 다만 그것을 깨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을 두고 부처는 깨친다고 했다"는 문장이 인상깊다. 결국 모든 순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하지만 돌아온 제자리는 떠나기 전의 그곳과는 다르다. 같은 풍경이지만 보는 눈이 달라졌고, 같은 일상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변했다.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걸을 날이 올까. 네팔의 안개 속을 헤치고, 인도의 먼지 길을 걸으며, 2,500년 전 한 청년이 던진 질문을 내 안에서 다시 울려 퍼뜨리는 날이 올까. 그 날까지는, 일상이라는 나만의 순례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맨발은 아니더라도, 맨마음으로 진장한 나를 찾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