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 - 공감과 경계로 짓는 필사의 시간
정혜신 지음 / 해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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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필사는 글만을 베껴 쓰는 것이 아니다. 필사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자신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한다. 필사한 글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되짚을 수 있다. 이는 현대인의 정신적 피로를 풀어주는 동시에, 일상에서의 작은 발견과 깨달음을 얻는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필사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내심을 기르고, 집중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명상과도 같으며, 현대인들에게 필수적인 정신적인 휴식이 된다. 매일 한 장씩 글을 필사하면서, 우리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가 천천히 자라듯이, 필사의 과정이 우리에게 내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이번에 필사와 함께 위안과 삶의 가이드를 해 줄 수 있게 꾸며진 필사책을 사용해 보았다. 정혜신님의 <손으로 읽는 당신이 옳다>였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책상 위 하얀 종이를 비춘다. 펜을 든 손이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 쓴다.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길 잃은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2024년 12월3일, 우리는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또 다른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저자는 말한다, "심리적 재난은 이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일상으로의 복귀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무용지물이 되고, 오늘의 확신이 내일의 착각이 되는 시대다. SNS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다 보면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진다. 누군가는 성공했다고,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누군가는 완벽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는다. 그럼 나는? 이 불안하고 초라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순간, 그 모든 소음이 잠잠해진다.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나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필사는 단순한 베껴 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정혜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집밥 같은 심리학'이 바로 여기 있다. 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밥 먹듯이 펼쳐보는, 그런 일상적 치유의 시간 말이다.

현대인의 마음은 늘 상처투성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갑옷을 입고 살아간다. 강해 보이려 애쓰고, 괜찮은 척하며, 아픈 것도 모른 척한다. 그렇게 쌓인 상처들이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다. 혼자 있을 때, 깊은 밤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필사를 하다 보면 그런 상처들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 써놓은 "괜찮다"는 말을 따라 쓰면서 정작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을 발견한다. "사랑한다"는 문장을 옮기면서 사랑받고 싶었던 내 마음의 목마름을 느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문장들은 마치 상처받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나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슬픔을 그 문장들이 대신 말해준다. "네가 아픈 게 당연해. 네가 슬픈 게 이상하지 않아. 너도 충분히 소중한 사람이야."

​디지털 시대는 우리에게 속도를 강요한다. 빨리 읽고, 빨리 이해하고, 빨리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필사는 정반대다. 천천히, 한 글자씩,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고,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필사는 바로 그 느낌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처음에는 답답했다. 이렇게 느릿느릿 쓸 시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남의 글을 베껴 써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빠름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멈춤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라는 것을. 필사를 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현재에 머문다.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불안도 잠시 내려놓고 오직 지금 이 순간, 펜끝에서 피어나는 문장들에만 집중한다. 그 짧은 순간이지만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역설적이게도 남의 글을 베껴 쓰면서 나만의 목소리를 찾게 된다. 다양한 작가들의 문체를 따라 쓰다 보면, 어떤 문장에서는 마음이 뛰고, 어떤 표현에서는 눈물이 나고, 어떤 단어에서는 희망을 느낀다. 그런 반응들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다. "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우는 어른들을 열렬히 응원한다"는 정혜신님의 말을 따라 쓰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자신을 돌아보며 흘리는 눈물이든, 오래전 상처를 마주하며 쏟아진 눈물이든, 그 어떤 눈물이든 다 괜찮다는 말에 내 마음의 문이 열린다. 어떤 날은 시인의 서정적인 문장을 따라 쓰며 내 안의 감성을 발견한다. 또 어떤 날은 소설가의 날카로운 통찰을 옮기며 내 안의 이성을 깨운다.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며 삶의 의미를 묻기도 하고, 에세이스트의 일상적 성찰을 통해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의 언어를 빌려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과정에서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수많은 문장들이 내 안에서 발효되고 숙성되어 언젠가는 나만의 이야기로 피어날 것이다.

필사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하루 30분, 한 페이지, 때로는 한 문장만 써도 된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내 마음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작은 시간들이 모여 내 삶을 조금씩 바꾼다. 급하게 살던 나에게 여유를 주고, 무감각해진 나에게 감수성을 선물한다. 타인의 시선에만 매달려 살던 나에게 내 목소리를 찾아준다. 필사는 일상 속 작은 혁명이다. 소비하기만 하던 나에게 창조의 기쁨을 알려주고, 받기만 하던 나에게 나누는 마음을 깨워준다. 혼자인 것 같던 나에게 연결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필사는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 매일 조금씩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햇볕을 쬐어주는 것처럼, 필사도 매일 조금씩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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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 2 -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뚫고 피어난 불멸의 예술혼 살롱 드 경성 2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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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들의 삶. 그 사랑이 모여서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감동도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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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 2 -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뚫고 피어난 불멸의 예술혼 살롱 드 경성 2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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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 아침,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은 박생광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몸무게 40킬로그램의 작은 체구로 화폭 위를 굴러가며 그림을 그렸다는 그 사나이. 후두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하루 10시간씩 붓을 잡았던 그의 마지막 몇 해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경면주사를 아끼려고 입으로 빨아서 다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졌을까. 최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미술에 대해 많은 전시회 관람과 서적을 읽으며 그 예술적 깊이와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 또 하나의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김인혜님의 <살롱 드 경성 2 -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뚫고 피어난 불멸의 예술혼>이었다.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인생과 작품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흔히 예술을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르면 붓을 들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그런 우아한 작업이라고. 하지만 한국 근대미술사를 들여다보면 그런 낭만은 사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에게 예술은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고, 때로는 저항의 언어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 예술가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경술국치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도 고문헌을 정리하고 금석학을 연구하던 오세창. 그의 시간들은 얼마나 절절했을까. 겉으로는 한가로이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열심히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3·1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2년 8개월의 옥살이를 감내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나는 자꾸만 그들의 손을 떠올리게 된다. 붓을 잡은 손, 먹을 갈던 손, 감옥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근질거렸을 손들. 그 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고희동이 일본에서 석고상 앞에서 받았던 충격도 마찬가지다. "이게 무슨 색인가?"라는 일본인 교수의 질문에 단순히 "백색입니다"라고 답했던 그가, 음영법을 깨달으며 느꼈던 부끄러움.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동양화의 시각과는 철저히 다른 접근법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또 얻었을까.

변관식이 평생 금강을 그리며 전국을 떠돌았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싶어진다. 금강처럼 고집 센 상남자가 그려낸 웅대한 한국의 산들. 그가 화폭에 담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산의 형태가 아니라, 그 산이 품고 있는 우리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전혁림의 이야기는 더욱 절절하다. 가장 가난했던 화가가 그려낸 가장 찬란한 보물들.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평생을 보내며,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지역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낸 그의 의지력을 생각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원계홍. 2023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탄생 100주년 전시가 MZ세대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100여 년 전에 태어나 전쟁과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의 정신세계가 우리 세대에게도 통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힘이 아닐까. 남관의 파리 생활을 떠올리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살롱 드 메>에 초청되고, 유럽 유수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마침내 1966년 프랑스 망통 <국제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외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이면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있었다. "나는 할 일을 하고 돌아왔다"던 그의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었을까. 이응노의 삶은 더욱 극적이다. 동백림 사건으로 법정에 서서 "우리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를 외치며 꺼이꺼이 울었던 그.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을 때 허무하게 웃었던 그. 울고 웃던 그의 모든 순간들이 사진으로 찍혀 시대의 기록으로 남았다. 그런 질곡의 삶 끝에 그가 그린 것은 '공생'이었다는 것이 더욱 가슴을 울린다.

천경자의 1960년대 작품들을 생각하면, 나는 항상 어떤 떨림을 느낀다. 불안과 행복이 뒤엉킨 상태에서 그려진 그 그림들의 독창적인 아름다움. "여성적 감수성"이 솔직하게 표현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 연약함, 불안감, 헛된 희망 같은 것들이 본격적인 주제로 등장했던 것은 얼마나 혁명적인 일이었을까. "절망을 여행한 뒤 화가는 자신의 22페이지를 펼쳤다"는 표현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22페이지가 있을 것이다. 절망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펼쳐지는 자신만의 페이지들. 천경자는 그 페이지들을 마르크 샤갈 못지않은 환상적인 작품으로 채워냈다. 유강열의 마지막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죽기 하루 전날 밤, 신촌 길거리에서 제자와 우연히 만나 나눈 대화. "너는 열심히 해서 작가가 돼라.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면서, 스스로 "나도 이제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고 되뇌었다는 그.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까. 이건희 컬렉션에만 70여 점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유강열은 다재다능했던 한국 공예의 개척자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을 할 시간은 늘 미뤄두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그가 마지막 밤에 "나도 이제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감동도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화가들의 삶. 그 사랑이 모여서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근대미술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현실을 한탄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나는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리라고 믿는다. 그 믿음의 근거 역시 사랑이다. 사람들의 애정이 모이면 힘이 되고, 그 힘이 무언가를 움직이고 가공할 것이다.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붓을 들고 있을 것이다. 그 손이 떨리더라도, 그 마음이 불안하더라도, 붓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결국 사랑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예술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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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남을 혼내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 혼내는 사람, 혼내지 않는 사람을 혼내는 사회
무라나카 나오토 지음 / 도서출판 더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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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커피숍에서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의 목소리, 회의실에서 부하직원을 질책하는 상사의 어조, SNS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댓글들. 우리 일상은 '혼내기'라는 행위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토록 끊어내기 어려운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왜 우리는 남을 혼내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흥미로운 책이다. 혼내기란 큰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지금 나는 혼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찬찬히 설명하는 척하면서도 상대를 위축시키는 말투, 타당한 지적인 듯 포장된 인신공격,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가해지는 정서적 압박까지.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교묘하게 타인을 혼내고 있다.

왜 우리는 혼내기를 멈추지 못할까? 그 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이다. 혼내는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를 벌하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정의감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채로 말이다. 이는 마치 도박이나 게임에 중독되는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상대방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 내가 옳다는 확신에서 오는 만족감, 화를 표출했을 때의 일시적 해방감. 이런 감정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혼내기에 의존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이를 혼낸 후 "이번엔 정말 잘 타일렀다"며 뿌듯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들. 하지만 며칠 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다시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게 된다. 변화는 없는데 혼내는 행위만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혼내기'를 성장의 동력으로 여겨왔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엄한 스승 밑에서 고제자가 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격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에는 어김없이 혹독한 훈련과 질타를 견뎌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서사는 혼내기를 필요악이 아닌 필수요소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숨어있다. 혼내기를 통해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고 포기하고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생존자 편향에 빠져 혼내기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인식이 사회 전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직장에서는 "부드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확실히 못 박아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한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집단으로 비난하는 것이 정의구현으로 포장된다. 혼내지 않으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진다.

혼내기에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처리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좌절했을 때, 통제력을 잃었다고 느낄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누군가를 혼내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우리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내 말대로 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일까? 솔직히 말하면 후자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하직원을 혼내는 상사들 중 상당수는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전가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 프로젝트가 잘못되었을 때, 실적이 나오지 않을 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혼내기 중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스스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혼내면 일시적으로나마 상대방이 위축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를 성공으로 착각한 우리는 같은 방법을 반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는 점점 줄어들고, 더 강하게 혼내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마치 마약의 내성과 같은 원리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의 혼내기에 반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진다. 더 크게 소리쳐야 하고, 더 심하게 야단쳐야 겨우 반응을 보인다. 결국 부모와 아이 모두 지쳐가고, 관계는 악화된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는 부모는 계속해서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가벼운 지적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더 강하게 질책해야 직원들이 반응한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면 조직 전체가 서로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분위기로 변한다. 창의성과 자발성은 사라지고, 눈치와 회피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혼내기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내가 지금 상대방을 혼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 다음은 대안을 찾는 것이다. 혼내기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말투를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혼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핵심은 상대방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보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의 잘못인가"를 찾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진정한 힘은 혼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능력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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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전 시집 : 진달래꽃, 초혼 -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김소월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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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진달래꽃>을 꺼내드는 순간,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표지에 새겨진 '김소월'이라는 세 글자가 내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그 이름을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국어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낭독 소리에 교실 전체가 숨을 죽였던 그 순간들, 칠판에 적힌 시구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100년 전 출간된 시집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650종이 넘게 출간되었다는데, 한 시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는지를 보여주는 증명서였다. 나 역시 그 수많은 독자 중 하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시어 앞에서 가슴이 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중학교 3학년 봄이었을까. 담임선생님이 <진달래꽃>을 낭독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 보기를 돌같이 하라"로 시작하는 그 시구가 교실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어떤 진동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소월의 힘이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그 절절함과 아름다움은 어린 내게 충격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이토록 우아하게, 이토록 애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때부터 나는 소월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등하교길에, 잠들기 전에, 혼자 있는 시간마다 그의 시구들을 되뇌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초혼>을 배울 때는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라는 외침에서 느껴지는 그 절망과 간절함이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강렬하게 박혔다. 비록 연인을 잃은 아픔은 아직 모르는 나이였지만, 그 절절한 부름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그리움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항상 가방 속에 소월의 시집을 넣고 다녔다. 도서관에서 공부에 지칠 때면 몰래 시집을 꺼내 읽었다. 특히 시험 기간의 스트레스로 마음이 답답할 때, 소월의 시는 내게 위로가 되었다.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같은 시를 읽으며 인생의 덧없음과 동시에 그 안에서 찾아야 할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첫사랑을 했을 때도, 그 사랑이 끝났을 때도 소월의 시가 곁에 있었다. "님에게"를 읽으며 사랑의 아픔을 달랬고, "꿈으로 오는 한 사람"에서 그리움의 본질을 배웠다. 소월의 사랑 시들은 단순히 로맨틱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외로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군대에서도 소월의 시집을 들고 갔다. 훈련소에서는 가져갈 수 없었지만, 부대에 배치된 후에는 늘 침대 맡에 두고 읽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소월의 시어로 달랬다. "엄마야 누나야"를 읽으며 고향의 푸근함을 떠올리고, "개여울"에서 고향 강물의 소리를 들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바쁘게 살다 보니 시를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소월의 시집도 책장 깊숙한 곳으로 밀려났다. 그러다 이번에 김소월 전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그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다. 40대가 된 지금 읽는 소월의 시는 20대에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울림을 주었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라는 구절에서 젊음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불운에 우는 그대여"에서 인생의 고난을 견뎌내야 하는 성인의 무게를 느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읽는 "엄마야 누나야"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는 불러지는 입장이 아니라 불리는 입장에서 그 시를 읽게 되었다. 아이의 목소리에서 소월이 그려낸 그 순수하고 애틋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월의 시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이 담겨 있다.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아픔, 희망과 절망. 이런 감정들은 일제강점기에도, 현재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애모"에서 느껴지는 간절한 기다림은 오늘날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에서 노래하는 그림자 같은 벗에 대한 그리움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0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소월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소월의 언어가 주는 음악성도 빼놓을 수 없다.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이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같은 표현들은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우리말의 음성적 특성을 완벽하게 살린 이런 시어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소월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우리말을 사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답게 우리말을 구사했는지 하는 점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우리말로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써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님과 벗"에서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라고 노래할 때, 그 간결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복잡한 감정을 이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소월이 번역한 중국 고전 시들을 읽어보니, 그가 단순히 문자를 옮긴 것이 아니라 원작의 정신을 우리말의 정서로 완전히 재창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창작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두보나 이백의 시가 소월의 손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우리 시로 탄생한 것이다.

바쁜 일상에 지쳐 메마른 감성으로 살아가던 내게 소월의 시는 다시 한 번 위로가 되었다. 특히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소월의 시에서 더욱 깊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이 담겨 있다. "봄"이라는 시에서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라고 노래할 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김소월 전 시집을 다 읽고 나니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소월은 나에게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라는 것이다.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시인이라는 확신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좋아하는 음악도, 즐겨 보는 영화도, 관심사도 모두 달라졌다. 하지만 소월의 시만큼은 변함없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내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소월의 시를 함께 읽고 싶다. 내가 그랬듯이 아이도 소월의 시어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감정들을 배웠으면 좋겠다. 요즘 아이들은 영상 세대라고 한다. 빠르게 변하는 이미지들에 익숙해져 있어서 시 같은 정적인 문학에는 관심이 적다고 한다. 하지만 소월의 시는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진실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김소월 전 시집 출간 100주년을 맞아 다시 읽은 그의 시들은 내게 청춘을 되돌려 주었다. 나이 든다는 것이 반드시 메마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좋은 시 한 편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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