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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지 않는 도시
경신원 지음 / 투래빗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가 일상어가 된 지 오래다. 정책 담당자들은 회의실에 모여 출산율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기업 유치 실적을 점검하며, 개발 예산을 배정한다. 하지만 숫자는 냉정하다. 아무리 지원금을 쏟아부어도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산업단지를 조성해도 청년들은 수도권행 기차에 오른다. 우리는 지금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도시를 살리는 것은 무엇인가? 경신원의 '소멸하지 않는 도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매력'이라는 예상 밖의 키워드로 제시한다. 처음에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매력이라니,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세계 곳곳의 도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매력이란 결코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도시 생존의 가장 실질적인 조건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도시 발전의 공식은 단순했다. 인구가 늘면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도시가 발전한다. 따라서 인구를 늘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며, 일자리를 위해서는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 이 선형적 논리는 고도성장기에는 작동했다. 하지만 인구 감소가 구조화된 지금, 이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이 공식은 사람을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가 지적하듯, 청년을 지역 소멸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청년들은 정책 대상이 아니라 삶의 주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일자리나 지원금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이유, 즉 삶의 질과 의미다. 이것이 바로 매력의 핵심이다. 매력있는 도시란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곳,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과거 도시의 매력은 주로 물리적 자산으로 측정되었다. 웅장한 건축물, 아름다운 경관, 잘 정비된 거리. 이런 요소들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 매력의 개념은 훨씬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OECD나 UN 같은 국제기구, 그리고 도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사람 중심의 거버넌스, 주민 참여, 다양한 주체 간 협력, 창의성, 포용성, 지속 가능성 같은 가치들이다. 런던의 보로 마켓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곳은 오래된 시장만이 아니다. 상인과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며 시장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생활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다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간이 되었다. 화려한 재개발이나 대규모 투자 없이도, 그곳의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의 참여가 만들어낸 매력이 시장을 살렸다. 브리즈번의 하워드 스미스 와프 역시 마찬가지다. 버려진 부두와 창고가 지역 크리에이터들의 손을 거쳐 로컬 브루어리와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사람들이 그곳에서 만들어가는 경험이다. 웨일스의 작은 마을 헤이온와이는 더욱 극적이다. 인구 1,500명의 쇠퇴하는 시골 마을이 '책의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세계적인 문화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매년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문학 축제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 변화는 거대한 자본이나 정부 주도의 개발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창의적 기획과 참여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도시의 매력이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발견'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그곳에 있던 이야기, 공간, 사람들의 관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 명받고 해석될 때, 도시는 다시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도시들은 어떤가? 서울의 홍대, 성수동, 문래동, 이태원은 모두 예술가와 창작자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독특한 문화 지구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해당 지역의 위기로 이어졌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면서 임대료가 급등하고, 정작 그 공간을 만들어낸 예술가와 원주민들은 밀려났다. 매력을 만든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 공간은 겉모습만 남은 채 상업화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도시의 매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우리는 종종 매력의 결과물만 보고, 그것을 만든 과정과 사람들을 간과한다. 핫플레이스가 되면 외부 자본이 몰려들고, 프랜차이즈가 들어서고, 원래의 정체성은 희석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도시는 지속 가능한 매력을 축적하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 사례도 시사적이다. 오랫동안 창조계층이 모이는 대표적인 창조 도시로 여겨 졌지만, 최근에는 높은 물가와 주거비 상승,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와 창업가들이 도시를 떠나고 있다. 창조 계층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도시 경쟁력은 특정 계층의 유입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성과 지속 가능성에서 나온다. 우리 도시 정책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단기적 성과에 집중하면서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놓친다. 물리적 환경 개선이나 관광객 유치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은 뒷전으로 밀린다. 예술가와 기존 주민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장기적 지원책, 공공과 민간과 지역 사회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종종 선언적 구호에 그친다.
핵심은 관점의 전환이다. 도시를 통계와 수치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사람과 이야기, 관계와 경험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 성장과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문화가 축적되는 장소로 이해하는 것. '얼마나 키웠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매력적인 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정책 담당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사는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참여하며,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매력 있는 도시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정과 참여, 상상력과 실험이 누적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