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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루프 : 금융 3000년 무엇이 반복되는가
이희동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9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금융이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핀테크, 블록체인, 인공지능 트레이딩 시스템 등 혁신적 기술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다르다'는 기대가 팽배해진다. 하지만 저자가 28년간의 현장 경험을 통해 발견한 진실은 정반대다. 금융의 외피는 변해도, 그 내면을 관통하는 논리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희동님의 <더 루프: 금융 3000년 무엇이 반복되는가>는 바로 이 '반복'의 메커니즘을 해부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차용증서에서 시작해 2020년 팬데믹 위기까지, 인류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면서도 같은 해법을 찾아왔다.
책은 그 순환의 패턴을 추적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망원경이 아닌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건넨다.금융의 시작점은 언제나 신뢰였다. 고대인들이 조개껍질이나 금속 조각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것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숫자에 불과한 전자화폐가 실물 못지않은 구매력을 발휘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화폐의 역사를 통해 신뢰가 어떻게 확장되고 수축하는지 보여준다. 로마제국의 데나리우스 은화가 유럽 전역에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군사력과 행정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제국이 쇠퇴하자 은화의 순도가 떨어지고, 사람들의 신뢰도 함께 무너졌다. 중세 중국에서 발행된 교자라는 세계 최초의 지폐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획기적인 혁신으로 환영받았지만, 정부가 무분별하게 발행량을 늘리자 곧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현대 금융 역시 이 신뢰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라더스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회사의 실질 자산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그들의 건전성을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가 화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역시, 탈중앙화된 시스템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금융사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인간의 감정이다. 저자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 버블부터 현대의 암호화폐 열풍까지, 수백 년을 뛰어넘어 반복되는 심리적 패턴을 추적한다. 튤립 버블은 금융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단 한 송이의 튤립 구근을 암스테르담의 고급 주택과 맞먹는 가격에 거래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집단적 열광 속에서 사람들은 '이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결국 거품은 터졌고, 수많은 이들이 파산했다. 1929년 대공황 역시 같은 메커니즘에서 비롯되었다. 주식시장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평범한 시민들까지 빚을 내어 투자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있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심리가 작동했다. 하지만 신용으로 부풀려진 자산 가격은 결국 급격히 붕괴했고, 그 여파는 전 세계를 경제 공황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역시 동일한 서사를 따른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에 대한 맹목적 신뢰, 그리고 규제 당국의 방관이 결합되어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냈다.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시장은 붕괴했고,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이클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호황기에는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불황기에는 기회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심리적 편향은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전문 금융인과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제도와 규제가 탄생한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은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했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해 시장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도드-프랭크법이 도입되어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가 대폭 강화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제도가 만능이 아님을 지적한다. 규제가 아무리 촘촘해도 금융혁신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글래스-스티걸법은 1999년 폐지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9년 후 역사상 최악의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암호화폐 시장은 기존 금융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만큼 투기와 사기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는 개념이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시스템 붕괴를 막는 역할을 의미한다. 2008년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대형 금융기관들에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금융시스템의 완전한 마비를 막았다. 2020년 팬데믹 때도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전례 없는 규모의 통화 완화와 재정 지출로 경제를 떠받쳤다. 하지만 이러한 개입은 딜레마를 낳는다. 정부가 계속해서 구제금융을 제공하면, 금융기관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어차피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구해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퍼지는 것이다. 제도는 위기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다음 위기의 씨앗을 품고 있다.
현대 금융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호연결성이다. 한 국가나 지역에서 시작된 위기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진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는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기관들까지 연쇄적으로 위기에 빠뜨렸다. 저자는 이러한 연쇄성이 단순히 금융시장의 통합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심리적 전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시장에서 패닉이 발생하면, 투자자들은 다른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자산을 매도한다. 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실제로 위기를 증폭시킨다. COVID-19 팬데믹은 이 연쇄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바이러스라는 비금융적 요인이 전 세계 경제를 동시다발적으로 마비시켰다. 공급망이 끊기고, 소비가 급감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협력해 대응하지 않았다면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이 재현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로 개인적 고백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최종 대부자'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28년간 금융 현장에서 일한 전문가조차 이러했는데, 일반 대중은 얼마나 더 취약했을까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금융 문해력(Financial Literacy)의 부재는 개인을 위기의 최대 피해자로 만든다. 복잡한 금융상품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투자하고, 과도한 부채를 지고, 위기의 신호를 읽지 못해 손실을 키운다. 반대로 금융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는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금융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핵심 개념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용의 작동 원리, 금리의 영향, 자산 버블의 징후, 위기 대응 메커니즘 등을 알고 있으면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생존의 문제다.
그렇다면 <더 루프>가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위기는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시장이 호황이라고 해서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역사는 거품이 터지고, 시장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는 패턴을 끝없이 반복해왔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3000년의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이터다. 튤립 버블과 닷컴 버블, 서브프라임 사태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과도한 신용, 집단적 광기, 규제의 공백이라는 공통 요소를 이해하면 다음 위기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 혁신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AI, 블록체인, 양자 컴퓨팅 등 첨단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다르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 본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새로운 도구가 주어져도 탐욕과 공포는 여전히 작동한다. 오히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위험은 더 보이지 않게 숨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준비가 필요하다. 정부와 제도가 중요하지만, 결국 자신의 자산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과도한 레버리지를 피하고, 장기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다. 무엇보다 금융 지식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적 대응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준비되어 있어도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전한 금융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금융 교육, 투명한 규제, 윤리적 기업 경영이 필요한 이유다.
<더 루프>는 비관적 예언서가 아니라 현실적 생존 지침서다. 저자는 위기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회복 역시 반복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는 다시 성장했고, 2008년 위기 이후에도 시장은 회복했다. 2020년 팬데믹의 충격도 시간이 지나며 극복되고 있다. 문제는 위기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공포에 휩싸여 비합리적 결정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장기적 관점을 유지할 것인가. 역사를 아는 사람은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저자가 28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하고자 한 핵심은 결국 이것이다. 금융은 복잡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단순하다. 신뢰, 감정, 제도라는 세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순환을 만든다. 이 순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루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다음 위기는 언제 올까? 어떤 형태일까?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반드시 온다는 것, 그리고 그때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 <더 루프>는 바로 그 준비를 돕기 위해 쓰인 책이다. 3000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지식은 위기 속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