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루프 : 금융 3000년 무엇이 반복되는가
이희동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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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금융이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핀테크, 블록체인, 인공지능 트레이딩 시스템 등 혁신적 기술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다르다'는 기대가 팽배해진다. 하지만 저자가 28년간의 현장 경험을 통해 발견한 진실은 정반대다. 금융의 외피는 변해도, 그 내면을 관통하는 논리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희동님의 <더 루프: 금융 3000년 무엇이 반복되는가>는 바로 이 '반복'의 메커니즘을 해부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차용증서에서 시작해 2020년 팬데믹 위기까지, 인류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면서도 같은 해법을 찾아왔다.


책은 그 순환의 패턴을 추적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망원경이 아닌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건넨다.금융의 시작점은 언제나 신뢰였다. 고대인들이 조개껍질이나 금속 조각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것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숫자에 불과한 전자화폐가 실물 못지않은 구매력을 발휘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화폐의 역사를 통해 신뢰가 어떻게 확장되고 수축하는지 보여준다. 로마제국의 데나리우스 은화가 유럽 전역에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군사력과 행정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제국이 쇠퇴하자 은화의 순도가 떨어지고, 사람들의 신뢰도 함께 무너졌다. 중세 중국에서 발행된 교자라는 세계 최초의 지폐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획기적인 혁신으로 환영받았지만, 정부가 무분별하게 발행량을 늘리자 곧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현대 금융 역시 이 신뢰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라더스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은 회사의 실질 자산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이 그들의 건전성을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가 화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역시, 탈중앙화된 시스템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금융사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인간의 감정이다. 저자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 버블부터 현대의 암호화폐 열풍까지, 수백 년을 뛰어넘어 반복되는 심리적 패턴을 추적한다. 튤립 버블은 금융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단 한 송이의 튤립 구근을 암스테르담의 고급 주택과 맞먹는 가격에 거래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집단적 열광 속에서 사람들은 '이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결국 거품은 터졌고, 수많은 이들이 파산했다. 1929년 대공황 역시 같은 메커니즘에서 비롯되었다. 주식시장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평범한 시민들까지 빚을 내어 투자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있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심리가 작동했다. 하지만 신용으로 부풀려진 자산 가격은 결국 급격히 붕괴했고, 그 여파는 전 세계를 경제 공황의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역시 동일한 서사를 따른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에 대한 맹목적 신뢰, 그리고 규제 당국의 방관이 결합되어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냈다.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시장은 붕괴했고, 공포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이클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호황기에는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불황기에는 기회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심리적 편향은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전문 금융인과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제도와 규제가 탄생한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은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했고,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설립해 시장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도드-프랭크법이 도입되어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가 대폭 강화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제도가 만능이 아님을 지적한다. 규제가 아무리 촘촘해도 금융혁신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글래스-스티걸법은 1999년 폐지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9년 후 역사상 최악의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암호화폐 시장은 기존 금융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만큼 투기와 사기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저자가 특별히 주목하는 개념이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시스템 붕괴를 막는 역할을 의미한다. 2008년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대형 금융기관들에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금융시스템의 완전한 마비를 막았다. 2020년 팬데믹 때도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전례 없는 규모의 통화 완화와 재정 지출로 경제를 떠받쳤다. 하지만 이러한 개입은 딜레마를 낳는다. 정부가 계속해서 구제금융을 제공하면, 금융기관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더 큰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어차피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구해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이 퍼지는 것이다. 제도는 위기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다음 위기의 씨앗을 품고 있다.


현대 금융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호연결성이다. 한 국가나 지역에서 시작된 위기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진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는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으로 확산되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기관들까지 연쇄적으로 위기에 빠뜨렸다. 저자는 이러한 연쇄성이 단순히 금융시장의 통합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심리적 전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시장에서 패닉이 발생하면, 투자자들은 다른 시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자산을 매도한다. 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실제로 위기를 증폭시킨다. COVID-19 팬데믹은 이 연쇄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바이러스라는 비금융적 요인이 전 세계 경제를 동시다발적으로 마비시켰다. 공급망이 끊기고, 소비가 급감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협력해 대응하지 않았다면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이 재현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로 개인적 고백을 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최종 대부자'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28년간 금융 현장에서 일한 전문가조차 이러했는데, 일반 대중은 얼마나 더 취약했을까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금융 문해력(Financial Literacy)의 부재는 개인을 위기의 최대 피해자로 만든다. 복잡한 금융상품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투자하고, 과도한 부채를 지고, 위기의 신호를 읽지 못해 손실을 키운다. 반대로 금융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있는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금융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핵심 개념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용의 작동 원리, 금리의 영향, 자산 버블의 징후, 위기 대응 메커니즘 등을 알고 있으면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생존의 문제다.


그렇다면 <더 루프>가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위기는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시장이 호황이라고 해서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역사는 거품이 터지고, 시장이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는 패턴을 끝없이 반복해왔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3000년의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이터다. 튤립 버블과 닷컴 버블, 서브프라임 사태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과도한 신용, 집단적 광기, 규제의 공백이라는 공통 요소를 이해하면 다음 위기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의 기술 혁신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AI, 블록체인, 양자 컴퓨팅 등 첨단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다르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 본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새로운 도구가 주어져도 탐욕과 공포는 여전히 작동한다. 오히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위험은 더 보이지 않게 숨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준비가 필요하다. 정부와 제도가 중요하지만, 결국 자신의 자산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과도한 레버리지를 피하고, 장기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다. 무엇보다 금융 지식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적 대응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준비되어 있어도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전한 금융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금융 교육, 투명한 규제, 윤리적 기업 경영이 필요한 이유다.


<더 루프>는 비관적 예언서가 아니라 현실적 생존 지침서다. 저자는 위기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회복 역시 반복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는 다시 성장했고, 2008년 위기 이후에도 시장은 회복했다. 2020년 팬데믹의 충격도 시간이 지나며 극복되고 있다. 문제는 위기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공포에 휩싸여 비합리적 결정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장기적 관점을 유지할 것인가. 역사를 아는 사람은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저자가 28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하고자 한 핵심은 결국 이것이다. 금융은 복잡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단순하다. 신뢰, 감정, 제도라는 세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순환을 만든다. 이 순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루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다음 위기는 언제 올까? 어떤 형태일까?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반드시 온다는 것, 그리고 그때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 <더 루프>는 바로 그 준비를 돕기 위해 쓰인 책이다. 3000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지식은 위기 속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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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최저점을 읽는 핵심 수업 - ‘부동산발 대공황’ 시장의 재편과 투자 전략
박감사(박은정) 지음 / 체인지업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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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부동산 시장에는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모두가 사려고 할 때는 이미 늦었고, 아무도 사지 않을 때가 진짜 기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이 간단한 원리를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막상 시장이 무너질 때는 공포에 휩싸여 손절매를 하거나 관망만 하다가 회복기를 놓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가 '최저점'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구체적인 신호를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저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신호들이 중첩되고, 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누적된 결과물이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기 전 땅속에서 에너지가 축적되듯이, 부동산 시장의 바닥 역시 여러 징후들을 남긴다. 문제는 이 징후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다. 이번에 읽은 <부동산 최저점을 읽는 핵심 수업>을 통해 그 핵심을 일아 본다.


첫 번째 신호는 수요의 증발, 그 고요한 경고음이다.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거래량의 급감이다.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사라진다. 매물은 쌓여가는데 매수자는 보이지 않는 기묘한 침묵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조금만 기다리면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관망하지만, 정작 바닥을 확인하고 진입하려 할 때는 이미 가격이 반등해 있는 경우가 많다. 매수자의 이탈은 단순히 심리적 위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질적인 구매력의 소멸을 뜻한다. 금리가 오르면 대출 여력이 줄어들고,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이 높아지면서 실수요자들조차 시장에서 밀려난다. 투자 수요는 더욱 빠르게 증발한다. 수익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려는 투자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투자자가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다. 거래량 급감은 공포의 정점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볼 때 극단적인 거래 절벽 이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시장은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거래량이 다시 살아나는 시점, 즉 '바닥 확인'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신호는 통제할 수 없는 공급, 시장을 짓누르는 무게다. 수요가 사라진 자리에 공급이 쏟아지면 시장은 본격적인 조정기에 진입한다. 특히 한국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분양에서 입주까지 2~3년의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급 과잉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상승기에 계획된 프로젝트들이 하락기에 일제히 입주를 시작하면서, 시장은 감당할 수 없는 물량에 짓눌리게 된다. 공급 과잉의 신호는 미분양 통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지방 중소도시부터 시작된 미분양 증가는 점차 광역시로, 그리고 수도권 외곽으로 번져간다. 이때 건설사들은 급한 자금 회수를 위해 프리미엄을 대폭 삭감하거나, 분양가 자체를 낮춘 특별 분양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는 주변 시세에 즉각적인 하방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공급 과잉 시기는 선택의 폭이 가장 넓은 시기이기도 하다. 평소라면 프리미엄을 얹어야 구할 수 있던 좋은 입지의 물건들이, 이 시기에는 합리적인 가격에 거래된다. 핵심은 '어떤 공급이 진짜 문제이고, 어떤 공급이 기회인가'를 구분하는 안목이다. 교통 인프라가 부실하거나 인구 유입이 없는 지역의 공급은 장기간 소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핵심 입지에서의 일시적 공급 증가는 오히려 매수 기회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신호는 약한 고리의 붕괴, 연쇄반응의 시작이다. 모든 위기는 가장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다. 부동산 시장에서 약한 고리는 명확하다. 과도한 레버리지를 동원한 갭투자자, 임대수익으로 대출 이자를 감당하던 다주택자, 입지 경쟁력이 떨어지는 지역의 물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금리가 오르고 전세 시장이 위축되면, 이들은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약한 고리의 붕괴는 가격 하락을 가속화한다. 급매물이 쏟아지면서 호가는 무의미해지고, 실거래가만이 시장의 온도를 나타낸다. 이때 심리적 패닉이 발생하면서 "더 떨어지기 전에 팔아야 한다"는 공포가 확산된다. 언론은 연일 부동산 시장의 위기를 보도하고, SNS에는 손실 사례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투자자는 이 혼란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약한 고리의 붕괴는 시장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조정 과정의 일부다. 과도한 투기 수요가 정리되고, 비합리적인 가격이 교정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본인이 '약한 고리'에 속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포지션을 정리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기회를 포착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네 번째 신호는 정책의 한계, 시장을 구원할 수 없는 손이다. 하락장이 본격화되면 정부는 반드시 개입한다. 대출 규제 완화, 세금 감면, 공급 조절 등 다양한 정책 카드를 꺼내든다. 시장은 이런 정책에 일시적으로 반응하지만, 근본적인 수급 문제와 심리적 위축을 해결하지 못하면 효과는 제한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책만으로 시장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정책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은 투자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정부의 부양책 발표 직후 단기적인 반등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것이 지속 가능한 상승 추세로 이어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정책 효과가 소진된 후 다시 한번 조정이 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정한 바닥은 정책이 아니라 시장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다만 정책은 '타이밍의 단서'를 제공한다. 정부가 강력한 부양책을 연속적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책 당국이 바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따라서 투자자는 정책 자체에 의존하기보다, 정책이 시장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관찰하며 판단해야 한다.


다섯 번째 신호는 외부 충격,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등장이다. 부동산 시장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글로벌 경제, 금융시장, 지정학적 리스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 연준의 금리 정책, 중국 경제의 둔화, 국제 유가 급등, 전쟁과 같은 외부 변수들은 국내 부동산 시장에 직간접적 충격을 준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나 팬데믹 같은 극단적 사건이 발생하면, 부동산 시장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깊게 조정될 수 있다. 외부 충격의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아무리 국내 시장을 분석해도, 외부에서 갑자기 발생한 위기는 모든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는 방어가 최선이다. 과도한 레버리지는 치명적이며, 현금 유동성 확보가 생존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외부 충격으로 인한 급락은 대부분 과도한 측면이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회복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느냐다. 외부 충격이 왔을 때 패닉에 빠져 급매로 손실을 확정하는 사람과, 냉정하게 기다리며 회복을 준비하는 사람의 결과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 신호를 어떻게 통합하여 최저점을 읽어낼 것인가? 핵심은 '중첩'이다. 하나의 신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수요 감소, 공급 과잉, 약한 고리의 붕괴, 정책 한계, 외부 충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때, 시장은 진정한 바닥에 근접한다. 구체적으로, 거래량이 극도로 위축되고, 미분양이 급증하며, 급매물이 쏟아지고, 정부의 정책 효과가 제한적이며, 동시에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고조된 시점. 이때가 바로 공포가 최고조에 달한 순간이며,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한 진입 구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악재가 이미 가격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점을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호의 강도와 지속성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래량이 바닥을 찍고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는가? 급매물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는가? 정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는가? 이런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될 때, 비로소 바닥 형성이 시작된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인식은, 부동산 시장의 최저점은 전국적으로 동시에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과 지방 중소도시의 사이클은 다르다. 심지어 같은 서울 내에서도 강남권, 강북권, 마포·용산권이 서로 다른 타이밍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약한 지역이 먼저 바닥을 치고, 강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늦게 조정된다. 지방 중소도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조정을 받아왔고, 일부 지역은 바닥 형성 단계에 진입했을 수 있다. 반면 서울 핵심 지역은 여전히 가격 방어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정이 본격화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따라서 투자자는 자신이 관심 있는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인구 유입 추세, 교통 인프라 개발 계획, 산업 기반, 공급 물량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지금이 바닥이다"라는 일반론에 휩쓸리지 말고, 특정 지역의 특수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저점을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그때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바닥을 예측해도, 그 시점까지 버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현금흐름 관리는 투자자에게 필수적인 역량이다. 하락장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음(-)의 현금흐름이다. 대출 이자가 임대수익을 초과하거나, 보유 비용이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구조라면 시간이 적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기 힘들어지고, 결국 최악의 타이밍에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반대로, 현금흐름이 플러스이거나 최소한 제로에 가깝다면, 시장이 회복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다. 따라서 하락장에서는 수익률보다 생존이 우선이다. 무리한 레버리지는 최대한 줄이고, 고정 지출을 최소화하며, 비상금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또한 단기 투자보다는 중장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조급하게 단기 차익을 노리다가는 오히려 손실을 키울 수 있다.


최저점이라는 개념은 사후적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진짜 바닥에서는 아무도 그것이 바닥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더 떨어질 것 같다"는 공포가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점 투자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군중과 반대로 움직이는 용기, 데이터와 신호를 믿는 용기, 그리고 불확실성을 견디는 용기다. 결국 부동산 투자의 핵심은 타이밍이 아니라 관점이다.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투자 성과를 결정한다. 최저점을 읽는 것은 결국 시장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투자 철학의 문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공포 속에서 손절매를 하고 있고, 누군가는 조용히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 10년 후, 이들의 자산 상황은 극명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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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내가 회계 시스템 담당자라는데
오세훈.이정수 지음 / 광문각출판미디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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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회계팀과 개발팀이 회의실에 마주 앉으면 기묘한 풍경이 펼쳐진다. 회계 담당자는 "이번 분기 매출채권 회전율이 떨어져서 대손충당금 설정 로직을 수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개발자는 "그러면 트랜잭션 테이블의 외래키 관계를 재설계하고 배치 프로세스를 추가해야 하나요?"라고 되묻는다. 서로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용하는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회계는 '거래의 경제적 실질'을 기록하는 학문이고, 시스템 개발은 '데이터의 흐름과 저장'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전자는 복식부기라는 500년 역사의 원리 위에 서 있고, 후자는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는 현대 컴퓨터 과학의 토대 위에 있다. 문제는 기업의 ERP나 회계 시스템을 구축할 때 이 두 세계가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접점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누락이 프로젝트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회계 시스템 담당자라는데>


저자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명료하다. 회계를 시스템의 언어로 번역하라는 것이다. 차변과 대변을 왼쪽과 오른쪽 칸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데이터베이스의 입력과 출력 흐름으로 재해석하라는 것이다. 이는 회계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적 시스템 설계의 맥락 속에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마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번역하되 원문의 의미를 보존하듯, 회계의 논리를 코드의 구조로 옮기는 일이다. 회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분개다. 모든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기록하는 이 행위는 회계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그런데 개발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개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이것을 데이터베이스 트랜잭션으로 설명한다. 하나의 경제적 사건이 발생하면 최소 두 개 이상의 계정에 동시에 기록이 이루어지며, 이 기록들의 합은 언제나 0이 되어야 한다. 이는 ACID 원칙의 원자성(Atomicity)과 일관성(Consistency)을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구조다. 책은 바로 회계의 '균형 원칙'과 시스템의 '데이터 무결성'이 같은 개념임을 보여준다. 차변 합계와 대변 합계가 일치해야 한다는 회계 원리는, 시스템 설계에서 트랜잭션 처리 로직이 보장해야 할 제약조건이다. 저자들은 이를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전표 입력 화면에서 검증 로직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오류 발생 시 롤백 처리는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다룬다. 회계와 시스템이 만나는 첫 번째 접점이 바로 여기, 분개와 트랜잭션의 동형성(isomorphism) 속에 있다.


회계 시스템의 핵심 중 하나는 계정과목 체계다. 현금, 매출채권, 재고자산, 자본금, 매출, 급여 같은 수백 개의 계정과목이 계층 구조를 이루며 조직된다. 회계 담당자에게 이것은 재무제표를 작성하기 위한 분류 체계지만, 개발자에게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이를 마스터 데이터로 설명한다. 즉, 시스템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참조되며, 한번 정의되면 여러 트랜잭션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기준 데이터라는 것이다. 그런데 계정과목은 코드 목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각 계정은 그 성격에 따라 자산인지 부채인지 수익인지 비용인지가 정해져 있고, 차변 증가 계정인지 대변 증가 계정인지가 구분된다. 또한 현금흐름표 작성을 위해 영업활동, 투자활동, 재무활동 중 어디에 속하는지도 표시되어야 한다. 세무 신고를 위해 법인세법상 계정 코드와의 매핑 관계도 필요하다. 즉, 계정과목 마스터 테이블은 단순한 이름과 코드 쌍이 아니라, 다양한 속성 정보를 담고 있는 복합적 구조물이다. 저자들은 이 계정과목 체계를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계정과목의 계층 구조를 어떻게 테이블로 표현할 것인가? 자기참조 외래키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경로 정보를 문자열로 저장할 것인가? 사용자 정의 계정과목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표준 계정과목만 사용하도록 제한할 것인가? 조직별로 다른 계정과목 체계를 사용할 경우 이를 어떻게 통합 관리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기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회계 업무의 실제 운영 방식을 이해해야만 답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회계에서 결산이란 일정 기간의 거래를 마감하고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절차다. 월말, 분기말, 연말마다 수행되며, 이 과정에서 감가상각비 계산, 미지급비용 계상, 재고자산 평가, 대손충당금 설정 같은 다양한 조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개발자에게 이것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결산을 대규모 배치 프로세스로 설명한다. 즉,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는 복잡한 계산들을 특정 시점에 모아서 일괄 처리하는 작업이다. 결산 프로세스는 여러 단계로 구성된다. 먼저 일상적으로 입력된 거래 전표들이 모두 승인되고 확정되었는지 검증한다. 그 다음 자동 분개 항목들을 생성한다. 예를 들어 고정자산의 감가상각은 매달 자동으로 계산되어 비용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외화 자산과 부채는 결산일 환율로 재평가되어 환산손익이 계상되어야 한다. 이런 작업들은 모두 사전에 정의된 규칙에 따라 자동으로 전표를 생성하는 로직이다. 저자들은 이를 구현할 때 필요한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다음 단계는 집계와 전기(posting)다. 개별 거래 전표들이 각 계정과목별로 합산되어 총계정원장에 기록된다. 이는 SQL의 GROUP BY와 SUM 연산으로 구현할 수 있지만,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때 성능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중간 집계 테이블을 사용하거나, 인덱스를 최적화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재무제표가 생성된다. 재무상태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 같은 보고서는 집계된 계정과목 잔액을 특정 양식에 맞춰 재배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정과목 마스터에 정의된 속성 정보가 활용된다. 결산 프로세스를 배치 작업으로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멱등성(idempotency)이다. 같은 결산 작업을 여러 번 실행해도 결과가 동일해야 한다. 이는 결산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재실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결산 상태를 관리하는 테이블을 두고, 각 단계별로 완료 여부를 기록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이런 설계는 단순히 기술적 안정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계 업무의 특성상 반드시 필요한 요구사항이다.회계 시스템에서 내부통제란 오류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와 장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전표 입력자와 승인자를 분리하거나, 일정 금액 이상의 지출은 이중 승인을 받도록 하거나, 결산이 확정된 이후에는 과거 데이터를 수정할 수 없도록 잠그는 것 등이다. 개발자에게 이것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내부통제를 시스템의 권한 관리와 워크플로우 설계로 설명한다. 권한 관리는 로그인 사용자를 확인하는 것 이상이다. 각 사용자가 어떤 기능에 접근할 수 있고, 어떤 데이터를 조회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제어해야 한다. 워크플로우 설계는 업무 절차를 시스템화하는 것이다. 전표가 입력되면 '임시저장' 상태가 되고, 담당자가 검토한 후 '승인요청' 상태로 변경되며, 승인권자가 최종 승인하면 '확정' 상태가 되어 장부에 반영된다. 이 과정에서 각 상태 전환은 특정 조건과 권한을 만족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상태별로 허용되는 작업이 달라진다. 임시저장 상태에서는 수정과 삭제가 가능하지만, 확정 상태에서는 어떤 변경도 불가능하다. 저자들은 이런 상태 기계(state machine) 패턴을 회계 시스템에 적용하는 방법을 상세히 다룬다. 내부통제의 또 다른 측면은 감사 추적(audit trail)이다. 모든 중요한 작업에 대해 누가, 언제, 무엇을, 왜 했는지를 기록해야 한다. 데이터가 변경되었다면 변경 전후의 값을 모두 보관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로그를 남기는 것 이상으로, 별도의 이력 테이블을 설계하고 트리거나 애플리케이션 로직을 통해 자동으로 기록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저자들은 이런 감사 기능을 구현할 때 성능 저하를 최소화하면서도 완전성을 보장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회계 시스템의 신뢰성은 바로 이런 내부통제 장치들의 견고함에서 나온다.

이론과 실무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다. 회계 원리를 배울 때는 거래 예시로 설명되지만, 실제 기업의 회계 시스템은 훨씬 복잡하다. 하나의 매출 거래도 고객 관리, 재고 관리, 세금 계산, 채권 관리 같은 여러 하위 시스템과 연동되어야 한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실무적 복잡성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다룰 것인가다. 저자들은 이런 통합 시나리오를 여러 사례로 제시한다. 구매-재고-원가 연동, 급여-인사 연동, 고정자산-감가상각 연동, 예산-집행-정산 연동 등이다. 각 사례마다 관련된 업무 프로세스를 먼저 설명하고, 그것이 시스템에서 어떤 데이터 구조와 처리 로직으로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터페이스 설계가 중요한데, 각 하위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도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메시지 큐를 사용할 것인가, API 호출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베이스를 직접 공유할 것인가 같은 선택이 시스템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좌우한다. 또한 예외 상황 처리도 중요하다. 정상적인 흐름은 대부분의 개발자가 구현할 수 있지만, 매출 취소, 반품 처리, 오류 수정, 회계 기간 변경 같은 예외 상황에서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가 진짜 실력을 결정한다. 저자들은 이런 예외 케이스들을 빠짐없이 다루며, 각 상황에서 어떤 회계 처리가 필요하고 시스템적으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바로 이런 디테일이 책을 단순한 입문서가 아닌 실무 지침서로 만드는 요소다. 책은 회계라는 오래된 학문과 시스템 개발이라는 현대 기술 사이의 통역자가 되는 법을 보여준다. 개발자는 이 책을 통해 회계의 논리를 코드로 변환하는 능력을 얻게 되고, 회계 담당자는 자신들의 업무가 시스템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결국 좋은 회계 시스템은 두 언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만든다. 이 책은 그 유창함으로 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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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마케팅 용어 도감 - 일러스트로 이해하는 필수 키워드 256
다케우치 테츠야 지음, 김모세 옮김 / 정보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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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팀장이 말했다. "이번 캠페인은 CPA를 낮추면서 CTR을 높여야 합니다. 리타게팅도 적극 활용하고, SEO도 함께 최적화해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CPA가 비용인 건 알겠는데, 무슨 비용인지는 애매했고, CTR이 클릭과 관련된 것 같긴 한데 정확한 계산 방식은 몰랐다. 리타게팅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게 리마케팅과 어떻게 다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디지털 마케팅의 세계는 일종의 외국어 습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배울 때도 단어를 모르면 문장을 이해할 수 없듯이, 마케팅 용어를 모르면 전략을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세계의 언어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점이다. 어제까지 몰랐던 용어가 오늘 갑자기 회의 테이블에 등장하고, 다음 주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사용된다. 그렇게 나는 점점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디지털 마케팅 용어 도감>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분은 마치 오랜만에 안전한 항구에 도착한 것 같았다. 256개의 주요 용어와 관련 용어를 합쳐 총 1,024개의 개념을 다룬다는 설명을 보고, 처음에는 압도당했다. 하지만 곧 이 책이 단순한 용어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각 용어마다 원어 표기, 음차, 줄임말의 원래 의미, 간단한 정의, 상세한 설명, 그리고 이해를 돕는 일러스트까지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각 용어와 연관된 세 가지 개념을 함께 소개해, 지식이 고립되지 않고 확장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용어는 DX, 즉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기업과 사업을 변혁"한다는 한 줄 정의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DX라는 말은 이미 수없이 들어왔다. 뉴스에서도 나오고, 기업 발표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막연했다. 그저 "디지털화"를 멋있게 표현한 말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책은 DX를 디지털화와 구분했다. 디지털화가 기존 업무를 디지털 도구로 옮기는 것이라면, DX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종이 서류를 전자 문서로 바꾸는 것은 디지털화다. 하지만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를 설계하고, 그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바꾸는 것이 DX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CX(고객 경험), BX(브랜드 경험), 마케팅 DX, 리스킬링(재학습)이라는 관련 용어를 함께 소개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의 진짜 가치를 발견했다. 용어만을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DX를 이해하려면 CX를 알아야 하고, CX를 알려면 BX와의 차이를 구분해야 하며, 결국 이 모든 것이 리스킬링으로 이어진다는 흐름이 명확했다. 마치 점으로 흩어져 있던 지식이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들이 모여 하나의 지도를 그리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팀장이 "고객 경험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제 그것이 단순히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안다. CX는 고객이 브랜드와 만나는 모든 접점에서의 경험을 의미하며, 웹사이트의 로딩 속도부터 고객 센터의 응대 방식, 심지어 배송 포장의 디자인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기업 내부의 시스템이 통합되어야 하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분석되어야 하며, 모든 부서가 같은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DX가 필요한 이유다.


다음은 광고와 SEO 용어를 다뤘다. 나는 여기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리타게팅, 디스플레이 광고, 검색 광고, CPA, CTR, ROI... 이 단어들은 마케팅 실무에서 매일같이 등장하지만,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전략의 핵심을 놓치기 쉽다. 예를 들어, 리타게팅과 리마케팅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리타게팅은 주로 디스플레이 광고를 통해 사용자를 다시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리마케팅은 이메일이나 다른 채널을 통해 재접근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차이를 모르면, 전략 회의에서 혼란이 생긴다. "리타게팅으로 접근하자"는 말과 "리마케팅 전략을 세우자"는 말은 결국 다른 실행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CTR, 즉 클릭률은 광고가 노출된 횟수 대비 클릭된 횟수의 비율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 숫자 하나가 캠페인의 성패를 좌우한다. CTR이 낮다면, 광고 문구가 매력적이지 않거나, 타겟팅이 잘못되었거나, 이미지가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CTR이 높다면, 사용자가 광고에 관심을 보인다는 신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클릭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은 아니라는 점이다. 클릭 후 실제 구매나 회원가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비용만 늘리는 클릭일 뿐이다. 그래서 CPA, 즉 고객 획득 비용이 중요하다. CPA는 한 명의 고객을 확보하는 데 들어간 평균 비용을 의미한다. 광고비를 전환 수로 나눈 값이다. 만약 100만 원을 광고에 쓰고 10명이 구매했다면, CPA는 10만 원이다. 이 숫자가 낮을수록 효율적인 광고다. 하지만 CPA만 보면 안 된다. 고객의 생애 가치(LTV)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한 명의 고객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구매하는지를 계산해야 CPA의 적정선을 판단할 수 있다. 책은 이런 용어들을 정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이것이 중요한지, 실무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줬다. ROI, 즉 투자 대비 수익률은 모든 마케터가 증명해야 하는 숫자다. 경영진은 항상 묻는다. "이 광고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나요?" 그 질문에 답하려면, CTR, CPA, LTV, ROI를 모두 이해하고,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한다.


SNS와 자사 미디어 관련 용어도 다뤘다. 여기서 나는 옴니채널, 콘텐츠 마케팅, 인플루언서 마케팅 같은 개념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특히 옴니채널이라는 개념은 항상 헷갈렸다. 멀티채널, 크로스채널, 옴니채널... 이 세 가지는 모두 여러 채널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략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멀티채널은 여러 채널을 운영하지만, 각각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이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크로스채널은 채널 간 연결이 있지만, 완전히 통합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본 제품을 오프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지만, 포인트는 공유되지 않는다. 반면 옴니채널은 모든 채널이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된다. 고객은 어디서든 같은 정보를 보고, 같은 혜택을 받으며, 채널을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쇼핑할 수 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나니, 최근 몇 년간 기업들이 왜 그토록 옴니채널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소비자는 더 이상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제품을 검색하고, 매장에서 실물을 확인하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근처 매장에서 픽업한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경험으로 느껴져야 한다. 그래서 옴니채널은 단순히 채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 여정 전체를 재설계하는 작업이다.

콘텐츠 마케팅도 흥미로운 개념이었다. 예전에는 광고라고 하면 직접적으로 제품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이 제품을 사세요"라는 메시지가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광고를 싫어한다. 유튜브의 광고 스킵 버튼을 누르고, 배너 광고는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콘텐츠 마케팅이다. 제품을 직접 홍보하지 않고, 유용한 정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예를 들어, 운동화 브랜드가 "우리 신발을 사세요"라고 광고하는 대신, "초보자를 위한 러닝 가이드"라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그 가이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브랜드를 기억하고, 신뢰하게 되며, 결국 구매로 이어진다. 이것이 콘텐츠 마케팅의 핵심이다. 판매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인플루언서 마케팅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통적인 광고 모델이 기업이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신뢰할 수 있는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기업의 말보다 친구나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더 믿는다. 그래서 팔로워 수십만, 수백만을 가진 인플루언서의 한 마디가 수억 원짜리 광고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각 장 말미에 있는 칼럼이었다. 용어만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지털 마케팅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특히 "새로운 용어를 학습하는 방법"이라는 칼럼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용어를 암기하려고만 하지 말고, 맥락 속에서 이해하라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SEO라는 용어를 배울 때, 그것이 "검색 엔진 최적화"라는 뜻이라고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SEO가 중요한지, 검색 엔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용자는 어떻게 검색하는지를 이해해야 진짜 SEO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의 용어를 배울 때, 관련된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공부하라고 권했다. 이 책이 바로 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른 칼럼에서는 생성형 AI의 등장과 그것이 디지털 마케터에게 주는 의미를 다뤘다. ChatGPT 같은 도구가 등장하면서, 콘텐츠 제작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블로그 글 하나를 쓰는 데 몇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AI를 활용하면 몇 분 만에 초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경고했다. AI는 도구일 뿐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여전히 사람의 전략과 창의성이라고. AI가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글인지, 어떤 메시지를 담을지는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처음 펼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물론 1,024개의 용어를 모두 외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암기가 아니라 이해였다. 이제 나는 회의실에서 팀장이 "CPA를 낮춰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히 비용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타겟팅을 정교하게 하고, 콘텐츠를 개선하고, 전환율을 높이는 종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책의 마지막 장은 디지털 마케팅 업계의 중요 인물 18명을 소개했다. 세스 고딘, 닐 파텔, 게리 베이너척 같은 이름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단순히 유명한 마케터가 아니라, 디지털 마케팅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이다. 세스 고딘은 "보랏빛 소가 온다"는 책에서 차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닐 파텔은 데이터 기반 마케팅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게리 베이너척은 소셜미디어 마케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장을 읽으면서, 나는 디지털 마케팅이 기술이나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사람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마케팅의 본질이다. 용어는 그저 그것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책은 일종의 나침반이었다.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바다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는 도구였다.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언어를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제 나는 광고를 볼 때, 그 뒤에 숨겨진 전략을 읽을 수 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할 때, 어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디지털 마케팅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실무에 있지만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혹은 그저 우리가 사는 디지털 세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유용하다. 언어의 지도를 가진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책은 바로 그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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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테니스! - 코트 위에서 찾은 삶의 원칙, 52주 멘털 트레이닝 교과서
이동혁 지음 / 이든서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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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테니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늘 같은 벽에 부딪혔다. 연습장에서는 코치의 칭찬을 받을 만큼 폼이 살아났는데, 정작 시합에 들어서면 손에 땀이 차고 몸이 굳어버렸다. 라켓을 쥔 손은 떨렸고, 평소 자신 있던 샷조차 네트에 걸리거나 아웃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나는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기술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연습량이 모자란 걸까? 그러다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이 그 답을 건네주었다. 이동혁 코치의 <인생은 테니스!>는 기술 지침서만의 의미가 아니었다. 52주에 걸쳐 펼쳐지는 멘탈 트레이닝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코트에서 겪던 문제가 사실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테니스 코트는 공을 주고받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심리적 훈련장이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테니스는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스포츠다. 포인트 하나에 기쁨과 좌절이 교차하고, 작은 실수 하나에 얼굴이 굳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서브가 연달아 실패하면 고개를 떨구고, 상대방의 강력한 리턴에 당황해 다음 샷까지 흔들렸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 경기의 흐름은 이미 상대에게 넘어가 있었다.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고. 어떤 이는 감정에 휩싸여 흐름을 잃지만, 또 다른 이는 자신만의 루틴으로 돌아와 중심을 되찾는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바로 '감정이 올라온 순간, 어떻게 다시 내 흐름을 회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이다. 나는 내 삶을 돌아보았다. 업무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을 때, 나는 얼마나 자주 감정에 휩쓸려 판단력을 잃었던가.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긴장한 나머지 준비했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순간들. 결국 테니스 코트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도는 일상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는 루틴의 부재였다.

저자는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이제 막 라켓을 잡은 지 몇 년 안 된 사람이 1년 안에 우승컵을 쥐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현실성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1년 안에 우승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훈련 방식과 경기 흐름, 나아가 태도까지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반성했다. 나는 늘 '준비가 되면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많은 일을 미뤄왔다.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결국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누군가는 준비가 부족해도 "해보겠다"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에서 실패하더라도 배우며 성장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실패는 당연히 찾아온다. 중요한 건 그 실패를 외면하거나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게 아니라, 실패 이후에 무엇을 보고 어떻게 다시 움직이느냐는 것이다. 잠시 주저앉을 수는 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장하는 중이다.


테니스를 치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든다. '저 공은 못 받을 거야.' 상대의 샷이 멀리 떨어지는 순간, 발이 움직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포기한다. 그리고 공이 바운드되고 나서야 '역시 안 되네'라고 자신에게 확인시킨다. 책은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정말 못 뛴 걸까, 아니면 그냥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한 걸까? 멘탈은 교묘하게 타협하라고 속삭인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건 어쩔 수 없어'. 그런 생각에 속다 보면,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게 되고 실력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물론 코트 저 뒤에서 네트 바로 앞에 떨어지는 공까지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못 뛰는 줄 알았는데 뛰어보면 받을 수 있는 공이 훨씬 많다. 결국 못 뛴 게 아니라 뛰지 않은 것이었다. 이 깨달음은 내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어차피 이건 내 능력 밖이야'라고 생각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혹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해봤자 소용없을 거야'라며 한 발짝도 내딛지 않았던 기억들. 안 될 거라는 확신은 사실 노력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저자는 매일 자신에게 질문하라고 권한다. '왜 나는 뛰기 전에 포기했을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안 될 거야'가 아니라 '해보자'로, '해봤자 소용없어'가 아니라 '일단 한 발이라도 뛰어보자'로 생각을 전환하는 루틴이 필요하다.

테니스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경기다. 그렇기에 매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몸이 무거운 날도 있고, 감각이 살아나는 날도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안전하게 경기를 풀어가고, 상태가 좋으면 좀 더 도전적인 샷을 시도하면 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어제의 기대를 내려두고 오늘의 나를 그대로 바라보자'는 메시지였다. 조코비치도 페더러도 완벽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프로 선수조차 매일 달라지는데, 우리가 어찌 항상 일정한 플레이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종종 어제의 성공에 집착했다. 전날 프레젠테이션이 잘 풀렸다면, 다음 날도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늘 달라진다. 청중도, 주제도, 내 컨디션도 다르다. 과거의 방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려 들면, 현재의 흐름을 놓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괜찮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라고. '오늘은 이 정도면 돼'라고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편해지면 몸도 편해지고, 자연스러운 플레이가 나온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여유가 더 큰 힘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기술을 동경한다. 강력한 서브, 예측 불가능한 드롭샷, 멋진 발리. 하지만 코치와 선수들의 실력 차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기본이다. 스플릿 스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스플릿 스텝을 하면 착지 순간 발이 자연스럽게 나뉘며, 어느 방향이든 몸이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다. 중심이 낮아지고 자세가 안정된다. 공이 오기 전에 이미 몸이 준비되어 있으니, 급할 이유가 없다. 여유 있게 포지션을 잡고, 중심을 유지하며, 시선이 흔들리지 않는다. 임팩트 이후 팔로우 스루까지 자신 있게 이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게 스플릿 스텝에서 시작된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높은 건물일수록 기초가 중요하다고. 기초가 부실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화려한 기술을 익히기 전에,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기본 동작을 몸에 새겨야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기초를 돌아보았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큰 계획을 짜는 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매일 지켜야 할 작은 루틴들은 소홀히 했다. 아침 스트레칭도 건너뛰고, 규칙적인 수면도 무시하고, 정리정돈도 미뤘다. 그러면서 큰 성과만 바랐다. 저자의 말처럼, 잘못된 길로 계속 가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린 셈이다.

경기는 전쟁이다. 이기고 있다고 방심하는 순간 흐름을 빼앗기고, 지고 있을 때는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경기 중에는 잔인하게 임하라고. 이길 수 있다면 그렇게 끝내야 한다고.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다르다. 네트 앞에서 만났을 때는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존중을 보여야 한다. 함께 최선을 다해 싸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 경기 중에는 치열하게, 파트너와는 끈끈하게, 경기를 마치면 존중을 표하는 것. 매너가 곧 실력이다. 이 대목은 내게 삶의 균형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일할 때는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퇴근 후에는 동료를 경쟁자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로 대할 수 있는가. 프로젝트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서로의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가. 승부보다 중요한 건 결국 나의 태도다.

저자는 남의 자세를 무작정 따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에게 맞는 자세는 한 번 찾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몸은 계속 변한다. 컨디션도 달라지고, 근력도 바뀌고, 감각도 달라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점검하고, 조정하고,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누군가의 자세에 현혹되지 말라는 조언이 특히 와닿았다. 그 사람의 10년이 나의 하루가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내 몸이 기억하는 감각, 내가 느끼는 편안함, 내 안에서 울리는 리듬. 그 속에서 진짜 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자주 타인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려 했다. 유명한 사람의 루틴을 따라 하고, 베스트셀러가 권하는 방법론을 적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맞지 않을 때, 나는 좌절했다. '왜 나는 안 될까'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진정한 실력은 남의 것을 베끼는 게 아니라, 나만의 것을 만드는 데서 나온다.


타깃을 정해 두고 연습해도 처음부터 꽂히는 샷은 드물다. 콘 옆으로 빗나가거나, 방향은 맞는데 거리감이 들쭉날쭉하다. 저자는 여기서 '영점 조준'의 개념을 소개한다. 사격에서 조준선과 실제 탄착점을 일치시키는 과정처럼, 테니스에서도 타깃을 설정하고 실제 샷의 궤적을 관찰한 뒤, 그 어긋남의 원인을 찾아내고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사이드로 서브를 넣으려 했는데 자꾸 바디로만 간다면, 자세는 어땠는지, 팔로우 스루는 어디로 향했는지, 토스의 위치와 높이, 라켓 면의 각도는 어땠는지 하나씩 추적해야 한다. '많이 치면 언젠가 맞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몸의 어느 부분이 틀어졌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미세하게 조정하는 루틴이 필요하다. 나는 이 개념을 일상에 적용해보았다.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다음엔 잘되겠지'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순간들. 회의에서 항상 같은 지적을 받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지 않았던 태도. 영점 조준이란, 결국 자기 점검과 미세 조정의 반복이다. 몇 번이나 성공했는지, 어떤 자세일 때 정확히 들어갔는지, 실패는 어떤 패턴으로 반복되는지 복기하는 습관. 이것이 막연한 노력을 구체적인 성장으로 바꾸는 비결이다.

테니스는 공만 주고받는 운동이 아니다. 눈빛이 오가고, 말이 오가고, 감정이 오간다. 그 안에서 흐름이 만들어지고, 경기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코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라켓도, 공도 아닌 바로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늘 편하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감정이 부딪히기도 하고, 괜히 기분이 상할 때도 있다. 그럴 땐 혼자 훈련하는 편이 속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매일 좋을 수는 없다고. 모든 날이 뜨겁고 완벽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흔들릴 때, 옆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나를 일으켜 주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또 누군가를 붙잡아 줄 수 있다면, 그 관계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름만 들어도 수준과 품격,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가고,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라. 함께해야 오래 버틸 수 있다. 함께해야 멀리 갈 수 있다. 책을 덮고 나니 테니스는 삶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트 위의 작은 공 하나하나가 내 삶의 결정처럼 느껴졌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 실패 이후 다시 일어서는 법, 기본에 충실한 태도,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관계의 소중함. 이 모든 것이 테니스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인생의 원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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