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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아사이 료의 <생식기>를 읽는 내내, 나는 마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 유리창 안쪽에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자각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정욕>에 이어 또다시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이다. 하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이것은 신체 기관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인간이 아니다. 주인공 쇼세이의 몸속에 깃든 '무언가'가 냉정하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인간이라는 종을 관찰한다. 그 시선은 때로 잔인할 만큼 객관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울 만큼 정직하다. 마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동물 생태를 관찰하듯, 인간의 행동 패턴과 집단 심리를 분석하는 이 존재의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쇼세이는 33세의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의태'하며 살아간다. 회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어떤 소속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동성애자인 그는 이미 사회가 규정한 '정상'의 범주 밖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그는, 어떤 정치인의 말처럼 '생산성이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가면을 쓴다. 친절하게 미소 짓고, 동료의 말을 경청하고, 적당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그 어떤 공동체의 논리에도 잠식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생산하지 않으면 정말 가치가 없는가?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은 불완전한가?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는 개인은 비난받아 마땅한가? 이 질문들은 비단 동성애자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한 부부들, 사회가 정한 성공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지는 날카로운 화살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평가받으며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직장에서는 실적으로, 가정에서는 자녀의 수와 성취로 말이다.
쇼세이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승진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다. 판단하고 결단하고 선택하고 선도하는 자리에 오르기를 거부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낼 뿐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만의 작은 행복을 쌓아간다. 체중과 체지방률을 관리하고, 새로운 베이킹 레시피에 도전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친구들과 함께 디저트를 나눠 먹는다. 이것이 그의 '성장'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확대와 팽창이 아니라, 내면의 충만함을 향한 조용한 전진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쇼세이가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의태'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족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대되는 역할을 연기한다. 좋은 학생, 성실한 직원, 효도하는 자녀, 사랑하는 부모. 그 역할들 사이에서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가면을 벗었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쇼세이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개체'임을 잊지 않는다. 공동체 감각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지켜낸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화자가 던지는 관찰이었다. "인간이란, 그냥 살 수 있다는 상태에 가까워지면 바로 그 이상을 원한다." 이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우리는 왜 충분함에 만족하지 못할까? 왜 끊임없이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일까? 다른 동물들은 생존과 번식에 충실할 뿐인데, 인간만이 삶의 의미를 묻고, 가치를 따지고, 목적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린다. 죽음을 알기에, 시간의 유한함을 깨닫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역산하며 산다. '이 나이에는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이쯤에서는 이런 성취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화자는 또한 흥미로운 상상을 펼친다. 만약 모든 인간이 일제히 이 '놀이'를 멈춘다면 어떨까? 사회인 놀이, 가족 놀이, 성장 놀이를 멈추고 두 팔을 툭 떨어뜨린다면? 사실은 모두가 내려놓고 싶은 것은 아닐까? '지금보다 더'를 강요하는 이 세계의 구조로부터.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지쳐 있다. 끝없는 경쟁과 비교, 평가와 심판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정말로 원하는 것이 이것일까? 쇼세이는 다른 세계를 산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만, 그의 내면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에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 이것이 이 소설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른 기준으로,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을 향해 살아갈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결혼과 출산이 행복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행복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승진과 성공이 의미 있는 목표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새로운 레시피를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성취일 수 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았다. 나는 어떤 세계를 살고 있을까? 나의 행복 기준은 정말로 나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주입한 것일까? 나는 얼마나 '의태'하며 살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쇼세이처럼, 나도 나만의 작은 '온전함'을 쌓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과 다른 속도로 가도 괜찮다. 공동체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뿐이다. 아사이 료는 <정욕>에 이어 또다시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품게 하고, 억눌려 있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하고, 숨겨져 있던 나 자신과 마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