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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스톤 필사 메모지 초판본 에디션 : 데미안 ㅣ 코너스톤 필사 메모지
코너스톤 편집부 지음 / 코너스톤 / 2026년 9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문장 하나가 마음에 걸려 넘어갈 때가 있다. 책장을 덮고도 한참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문장이다. 필사 메모지를 소개하는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장면보다 다른 것이 먼저 떠올랐다. 한 장에 딱 한 문장만 적는다는 규칙이었다. 마음에 남은 문장을 정성껏 옮겨 적고, 그렇게 모은 120장을 상자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 둔다는 것. 그 상자를 상상하다가 나는 문득 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미안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였다. 이 문장을 천천히 옮겨 적어 보았다. 손으로 쓰면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속도가 느려지고, 느려진 만큼 단어 하나하나가 몸에 닿는다. 알은 세계라는 대목에 이르자 이상하게도 열여덟 살 무렵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딘가에서 나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말수가 적었고, 위로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힘들다고 털어놓아도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라고 되묻는 쪽이었다. 그때는 그 질문이 서운했다. 나는 그저 "힘들었겠다"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데, 친구는 번번이 나를 다음 걸음 앞에 세워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친구 나름의 방식이었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정답을 쥐여 주지 않고 스스로 껍질을 깨 보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그 친구도 내 알을 대신 깨 주는 대신 내가 부딪쳐 볼 수 있도록 곁에서 기다려 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로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연락이 끊겼다고 말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안부를 묻는 간격은 달에서 해로, 해에서 해를 건너뛰는 쪽으로 점점 길어졌다. 사는 게 바쁘다는 말은 가장 편리하고 가장 비겁한 변명이다. 나는 그 변명 뒤에 숨어 친구의 생일을 지나치기도 했고, 보내려던 메시지를 쓰다가 지우기도 했다. 몇 줄 적다가 "갑자기 왜 연락했냐고 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지워 버린 문장들이 휴대전화 속에 얼마나 많이 쌓여 있을까.
그래서 나는 메모지 한 장을 상상해 보았다. 거기에 데미안의 문장 하나를 적고, 그 아래 짧게 한 줄을 덧붙이는 것이다. "네가 예전에 던졌던 질문, 나 아직도 생각해." 그리고 그 한 장을 책갈피처럼 책에 끼워 친구에게 보내는 것이다. 120장이 들어 있다는 상자에서 첫 장은 이 친구의 몫으로 비워 두고 싶다. 하루에 한 문장씩 120일 동안 필사하는 작은 루틴을 만들어 보라는 제안도 마음에 들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 120일 중 며칠은 문장 대신 사람을 적어 보고 싶다.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곧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