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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 탄생 - 한 조각씩 꺼내 보는, 14가지 약 이야기
김효정 지음 / 반니출판 / 2026년 10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두통이 올 때면 서랍에서 타이레놀을 꺼내 은박 껍질을 뜯고 물과 함께 삼킨다.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약은 늘 거기 있었고, 아프면 먹는 것이었고, 먹으면 낫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효정 교수의 <약의 탄생>을 읽고 나서 그 익숙한 동작이 조금 낯설어졌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어 온 것이 약의 성질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함이 만들어 낸 느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편의점에서 파는 타이레놀에는 500mg 알약이 여덟 알 들어 있다. 약국의 열 알짜리보다 두 알 적은데, 한 통을 다 먹어도 하루 최대 권장 용량을 넘지 않게 정한 양이라고 한다. 구하기 쉬운 약일수록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설계한 것이다. 쉽게 떠오르는 정보에 기대어 판단하는 이런 경향을 행동경제학에서는 '가용성 휴리스틱'이라 부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약 한 알에 약학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과 제도의 계산도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껌처럼 쉽게 사는 약이 한때 60년 가까이 누명을 쓰고 외면받았다는 사실도, 과음한 다음 날 먹으면 간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사실도 나는 몰랐다. 저자의 표현대로 약과 독을 가르는 것은 성분이 아니라 용량과 그것을 다루는 경계심이다. 은박 껍질을 뜯는 번거로움은 약을 캔디처럼 여기는 우리의 인지적 지름길 앞에 국가와 제약사가 세워 둔 작은 방어선이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다룬 장이 흥미로웠다. 지구상의 수십만 종 식물 가운데 인간의 통증을 이토록 강하게 잠재우는 성분을 가진 것은 사실상 양귀비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진실이 정반대라고 말한다. 우리 뇌에는 통증을 다스리는 '엔도르핀'이라는 체계가 이미 있고, 양귀비의 모르핀은 그 정교한 체계에 우연히 들어맞은 가짜 열쇠일 뿐이라는 것이다. 설명을 읽고 나는 약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 약은 자연이나 과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정답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몸의 시스템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외부의 열쇠다. 그 열쇠를 극한까지 갈아 더 강력한 마스터키로 만든 것이 펜타닐이고, 고통을 지우려던 그 효율적인 칼날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책이 '코브라 효과'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문제를 없애려는 해법이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일은 약의 역사에서도 되풀이되어 왔다. 고통이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그 마음이 어디까지 정당한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남는다.
저자는 질병과의 싸움을 한 편의 수사 기록으로 읽는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의 바이러스를 되살리기 위해 연구자들은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의 얼어붙은 땅까지 파고들었다. 범인의 몽타주를 복원하고 그 발목을 묶을 수갑의 원리를 찾아내는 과정을 읽으며, 나는 약학이 책상 위의 지식이 아니라 집요한 추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코로나19를 지나온 지금의 우리는 이 비유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안다. 적의 이름을 정확히 부를 수 있어야 비로소 싸울 수 있다는 말은, 모르는 채 두려워하기만 했던 그 시기를 돌아보게 한다. 인슐린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결로 마음에 남았다. 당뇨병은 죽음을 기다리는 병에서 삶을 스스로 관리하는 병으로 바뀌었다. 인류애에서 출발한 약이 산업의 힘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했고, 동시에 그 산업의 논리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을 낳았다는 것이 '인슐린의 역설'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과 돈이 되는 일이 한 약 안에서 만난다. 나는 이것을 어느 한쪽의 잘못으로 단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약값이 누군가에게는 치료의 지속 여부를 가르는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약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아마 서랍에서 약을 꺼내 먹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그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된다는 점이다. 이 약은 어떤 열쇠인가, 누가 어떤 실패를 거쳐 이것을 만들었는가, 나는 지금 용량과 경계심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약을 끊고 믿음을 거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약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라도 약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약 한 알의 무게는 그 안의 성분 몇 밀리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쓰고 해석해 온 사람들의 긴 시간에서 나온다.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 나는 은박 껍질을 뜯는 일이 전과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