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필사책 - 흔들리는 삶의 지침이 되어 줄 다산의 문장들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 유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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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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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의 마지막 밤은 언제나 조금 쓸쓸하다. 명절 내내 북적이던 집안이 하나둘 비워지고, 설거지를 마친 그릇들이 마르는 소리만 남는 시간. 내일이면 다시 평일의 얼굴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에, 이 밤은 유독 마음이 헐거워진다. 그런 밤에 다산 정약용의 문장들을 필사하며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을 손으로 옮겨 적다 보니 뜻밖에도 오늘 내가 앓고 있던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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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음에 걸린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뜻 속에서 자라나지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만둔다"는 구절이었다. 명절이란 게 원래 그런 시간 아닌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사이에서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문득 솟아오르고, 굳이 꺼내지 않아도 좋았을 비교와 서운함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난다. 나 역시 이번 연휴에 몇 번이나 그런 말들을 삼켰다가, 혹은 삼키지 못하고 뱉었다가 후회했다. 다산은 그 마음의 싹을 두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만둔다"고 했다. 필요와 불필요를 가르는 그 짧은 순간의 판단력이야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일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 역시 그만둔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숨기고 싶은 마음이란 대개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니까. 누군가 보고 있지 않다고 안심하며 슬쩍 넘어가려 했던 나의 옹졸한 순간들이 문장 위에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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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문 구절은 분노에 관한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내기는 쉬워도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이 분노"라는 말, 그리고 "분노와 원한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풀리지 않는 법"이라는 문장. 명절 연휴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사소한 일에 발끈했다. 누군가의 말투, 누군가의 무심함, 정리되지 않은 집안일들.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분노할 만큼 큰일이 아니었다. 다만 내 안에 쌓여 있던 피로와 조바심이 작은 불씨를 만나 확 타올랐을 뿐이다. 다산의 시대에도,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의 감정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다산은 그 감정을 그저 참는 것이 아니라 "제어"하라고 했다. 참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다르다. 참는 것은 언젠가 터지지만, 다스리는 것은 그 뿌리를 이해하고 흘려보내는 일이다. 오늘 밤 나는 참았던 감정들의 뿌리를 한 번쯤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위로가 된 것은 습관과 태도에 관한 문장들이었다. "사람의 겉모습은 매일의 습관으로 변하고, 그 사람이 이루는 삶의 결은 그 모습에서 비롯된다"는 말과 "땅의 기운이 어떠니, 올해 운수가 어떠니 하며 삶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거짓이다"라는 단호한 문장. 명절이면 어른들은 으레 신년 운세니, 올해는 어떻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 역시 그런 이야기에 은근히 마음을 기대곤 했다. 좋은 말이 나오면 안심하고, 나쁜 말이 나오면 괜히 위축되곤 했으니까. 그런데 다산은 이백여 년 전에 이미 그런 운명론을 "거짓"이라 잘라 말했다. 삶을 만드는 것은 별자리도 사주도 아니라 오늘 하루 반복한 작은 습관이라는 것. 이 말은 묘하게 안도감을 준다. 내 삶이 어떤 정해진 그릇에 담겨 있는 게 아니라, 매일의 선택들로 계속해서 빚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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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한 구절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가문이 몰락한 상황에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책을 읽는 것밖에 없다"는 문장. 다산은 유배지에서, 벼슬도 가족도 없는 남쪽 끝에서 이 말을 썼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이 결국 읽고 쓰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나에게도 어떤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다산만큼 큰 것을 잃어본 적은 없지만, 크고 작은 상실 앞에서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몰라 방황했던 밤들이 있었다. 그런 밤에는 텔레비전을 켜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책을 펼치고 한 줄이라도 읽고 쓰는 편이 결국 나를 덜 흔들리게 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읽기는 다산에게 삶의 길을 찾는 일이었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의미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정약용은 벼슬도, 가족도, 앞날에 대한 확신도 없이 오직 읽고 쓰는 일로 자신을 지탱했다고 한다. 회갑을 맞아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문을 쓰고, 그것을 십오 년에 걸쳐 고쳐 썼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반성을 한 번의 감정으로 소비하지 않고 평생의 수행으로 삼았다는 것.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매일 다시 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 밤 나 역시 명절 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감정들, 삼켰던 말들과 뱉었던 말들, 잠깐의 분노와 오래 남은 서운함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것을 자책으로 끝내지 않고, 다산처럼 내일 다시 고쳐 써 볼 여지로 남겨두고 싶다.


연휴가 끝나고 다시 평범한 하루들이 시작된다. 특별할 것 없는 그 하루하루가 사실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유일한 재료라는 것을, 다산의 문장들이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운명이 아니라 습관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그침과 다스림이 삶의 결을 만든다는 것. 그 단순한 진리 앞에서, 나는 오늘 밤의 헐거워진 마음을 조금은 단단히 여며본다. 내일부터는, 필요 없는 마음은 그만두고, 분노는 참는 대신 다스리고, 흔들리는 날에는 다시 책을 펼치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그것이 이 특별할 것 없는 명절의 마지막 밤이 내게 남긴 작은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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