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옛 절터 - 한국의 폐사지를 돌아보다
신정일 지음 / 디오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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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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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빛이 투명해진다. 이 계절에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함께 투명해진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어디로 가실 건가요?"라고 물어온다면, 이제 주저없이 대답할 것 같다."폐사지로 가려고 합니다"라고 신정일의 <사라진 옛 절터>를 읽고 난 후, 내 가을 여행의 목록에는 핸드폰 배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 그것은 질문이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땅 위에서 "여기 누가 서 있었을까?"라는 물음표. 오늘날 우리는 '남는 것'에만 집중한 다. SNS에 올릴 만한 사진, 손에 쥐었다고 느낄 수 있는 소유물, 기록될 만한 성과, 그러나 저자가 40여 년간 걸어온 길의 끝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 반대편에 있다. 탑 하나, 주춧돌 몇 개, 그리고 때론 지명 하나와 전설 한 줄.

처음 폐사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그곳을 단순한 '잔해'로만 이해했다. 역사가 남긴 쓸모없는 조각들이 있는 장소쯤으로, 하지만 신정일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폐사지는 사라진 것을 보는 곳이 아니라, 남은 것의 의미 를 묻는 곳이라는 것이다. 양양 진전사지에서는 "눈시울을 붉히며 지난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폐사지는 사라진 건물이 아니라,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기도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공기처럼 흩어져 있는 장소랴는 것을. 절을 잃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라가 기울어지고 시대가 변할 때, 그 절터에 남은 돌탑은 누구를 위해 서 있었을까. 완주 봉림사지의 석등과 오층석탑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약탈된 사실을 마주할 때, 그것은 한 나라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그 무력함 속에서도 돌탑을 남겨두려 했던 누군가의 저항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준다. 신정일이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상처이며, 동시에 그 상처를 견딘 사람들의 존재이다.

감동했던 대목을 자주 떠올린다. 화순 운주사지에서 한 어린아이가 투박한 석불을 보고 백성들 같다"고 말한 장면이다. "아빠, 이 부처가 백성들 같다."..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은 하나같이 굶주리고 빼앗긴 민중의 얼굴을 닮 았다. 위엄을 드러내기보다 투박하고 소박하며, 삶의 고단함을 품은 사람들의 모습에 더 가깝다. 전문가가 보면 조각 양식'과 "시대적 특징'을 먼저 살핀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다르다. 아이는 그 돌에 깃든 사람을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정일이 40여 년을 걸어가며 배운 것 아닐까. 많이 아는 사람보다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더 깊은 것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폐사지는 우리에게 이 가르침을 준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땅 위에서, 우리는 상상 하고 묻고 기억해야 한다. 그라고 그 행위 자체가 역사를 살리는 것이다.

책을 덮고 올해 가을의 일정을 다시 짰다. 경주 감은사지에 가고 싶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터를 밟고 싶다. 익산 미륵사지도 가야겠다. 백제가 꿈꿨다던 미륵의 세계가 정말로 그곳에 남 아 있는지, 돌 위에 그어진 선들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직접 보고 싶다. 혹은 아주 작은 절터도 좋을 것 같다. 유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 이름도 희미한 절이 폐사된 자리에 서서, 나는 오래 바라볼 것이 다. 그 자리의 공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발 아래 흙 속에 어떤 이야기들이 깊이 묻혀 있는지 궁금해 진다.

역사는 교과서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발 아래 있다. 폐사지를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초대장을 받는 것이다. 절은 사라졌다. 스님도, 목탁소리도, 예불하는 사람들의 향도 사라졌 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곳에 무릎 꿇고 가족의 평안을 빌었던 이름 없는 여인의 마음. 나라의 안녕을 기도했던 누군가의 간절함. 돌을 다듬으며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려 했던 사람들의 손길이다. 이 가을, 폐사지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그 마음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천 년의 시간을 빛으로 환히 투명하게 변환시키는 가을햇빛 아래에서 감성에 젖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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