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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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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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학의 역사가 사실은 '용기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몬디노가 교회의 금기를 무릅쓰고 시체를 열었을 때부터, 카할이 스페인이라는 변방에서 홀로 신경세포를 그렸을 때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당대의 권위와 상식을 거스르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용기의 본질은 대단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내 눈으로 직접 보겠다'는,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몬디노가 남긴 문구 videre ad sensum, 즉 '직접 보고 이해하라'는 말은 그래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처럼 읽힌다.


베살리우스의 이야기는 그 태도가 어떻게 제도를 뒤엎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조수의 손에서 해부용 메스를 빼앗아 직접 시신을 열었을 때, 중세 내내 분리되어 있던 '읽는 머리'와 '자르는 손'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묘한 감동을 느꼈다. 새로운 발견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권위와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을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메워버릴 때 온다는 사실을 이 장면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레노스의 오류는 1,400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게 아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확인할 용기, 혹은 확인해도 된다는 허락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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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의 순환 이론에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용기를 본다. 그는 관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심장이 한 시간에 내보내는 혈액의 양을 계산해 갈레노스의 이론이 산술적으로 불가능함을 증명해냈다. "나는 책이 아니라 자연을 해부했다"는 그의 말은, 관찰에 숫자라는 잣대를 더했을 때 비로소 낡은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비의 계산 자체는 완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추론은 훌륭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과학이란 처음부터 정답을 내는 일이 아니라, 틀릴 수 있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태도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데카르트와 의리학파를 지나며 이 책은 균형 잡힌 시선을 잃지 않는다. 몸을 기계로, 숫자로 환원하려던 시도는 근육과 혈관을 설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통증과 감정, 질병의 경과 앞에서는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다. 산토리오가 30년간 저울 위에서 살았던 집착, 보렐리가 근육을 지렛대로 계산했던 시도는 당대에는 "그래서 환자에게 무엇을 해주면 되느냐"는 냉소적인 질문 앞에 무력했다. 그러나 이 실패들이 결국 오늘날 중환자실의 모니터와 웨어러블 기기로 이어졌다는 서술을 보며, 나는 과학의 실패란 종종 시대를 앞서간 질문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시점의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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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한 대목은 제멜바이스였다. 그는 손 씻기라는, 지금이라면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 하나로 산모 사망률을 10퍼센트대에서 1~2퍼센트대로 낮췄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인정이 아니라 해고와 조롱, 그리고 정신병원에서의 죽음이었다. 데이터는 이미 답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의사의 손이 산모를 죽인다니 말도 안 된다"는 자존심이 그 데이터를 가로막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의과학사가 단순히 발견의 연속이 아니라, 발견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에 관한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실이 이긴 것은 진실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코흐와 리스터라는 후속 세대가 같은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증명해냈기 때문이었다. 옳은 답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때로 한 사람의 생애로도 부족하다.


존 스노의 콜레라 지도 역시 인상적이다. 그는 세균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지도 위에 환자 수를 표시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오염된 펌프 하나를 정확히 짚어냈다. 이는 원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패턴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만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리에 대한 이해와 문제 해결은 반드시 같은 속도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스노는 몸소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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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과 카할의 신경세포 스케치를 나란히 읽으면서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란트슈타이너는 화려한 실험 대신 응집 여부를 기록한 표만으로 ABO 혈액형이라는 규칙을 찾아냈고, 카할은 과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감각을 동시에 지닌 손으로 신경세포라는 '보이지 않던 세계'를 그려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발견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정작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 인상 깊다. 위대함은 반드시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권위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측정으로, 측정에서 다시 겸손으로 이어지는 순환이다. 파레가 "나는 단지 붕대를 감았을 뿐, 신이 그를 낫게 하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전진한 순간들은 언제나 인간이 자연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순간과 맞닿아 있었다. 갈레노스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은 더 큰 권위가 아니라, 그저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는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방대한 생체 데이터를 분석하고, 재활 로봇이 인간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것 역시, 결국은 "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산토리오와 보렐리의 질문이 형태를 바꾸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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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니, 의과학사는 '누가 먼저 의심했는가'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의심은 언제나 대가를 치렀다. 몬디노는 금기를 깨야 했고, 베살리우스는 평생 비난에 시달렸으며, 제멜바이스는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손 씻기, 혈액형 검사, 마취와 소독은 모두 누군가 자신의 시대와 불화한 결과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중에도, 언젠가 새로운 몬디노와 제멜바이스가 다시 열어야 할 금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결국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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