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나
주세페 카토첼라 지음, 이소영 옮김 / 군자출판사(교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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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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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카토첼라의 이탈리아나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린 것은, 이 소설이 다루는 시대가 우리가 흔히 배우는 '이탈리아 통일'의 역사와 얼마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탈리아 통일사는 대개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사보이아 왕가의 정치적 결단, 그리고 하나가 된 국가라는 서사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마리아 올리베리오, 훗날 '치칠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여성의 삶은 그 매끈한 서사의 뒷면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통일이라는 사건이 칼라브리아 산골의 가난한 소작농 가정에는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지배 구조에 맞서 싸운 이들이 훗날 역사책에는 '브리간테', 즉 산적이나 도적으로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역사라는 것이 늘 승자의 언어로 쓰인다는 오래된 진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점, 승자의 언어가 지워버린 자리에 한 여성의 이름을 다시 새겨 넣으려 한다는 점이다. 마리아가 남편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 브리간테가 되고, 그 세계 안에서 다시 '치칠라'라는 새 이름을 얻는 장면은 단순한 신분 위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 즉 가난한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삶의 궤적,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노동으로 몸이 상하고, 남편의 뜻에 순응하는 삶을 벗어나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는 선택이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저자가 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책이 전하는 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낭만적으로 미화되지 않는다. 언니 테레사의 존재조차 벽난로 옆 벽에 그려진 몇 개의 표시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는 대목, 그리고 입양이라는 단어가 아이에게 공포로 다가왔다는 서술은 가난이 가족 관계마저 재구성해버리는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먹일 입이 너무 많아서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이런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쉽게 감상에 젖기보다, 가난이란 것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인상적인 것은 이 소설이 가난 속에서도 존엄과 지혜를 잃지 않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산속 마을에서 홀로 살기를 택한 할머니 티누차는 가진 것 없이도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지배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가난해도 마음이 가볍다는 그녀의 삶의 태도는, 물질적 풍요와 자유가 반드시 함께 오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이 역설은 훗날 마리아가 산으로 들어가는 선택과 은밀하게 이어진다. 그녀 역시 물질적으로는 더 궁핍해졌을지 몰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마리아와 피에트로 모나코의 관계다. 숯쟁이였던 피에트로는 애국심에 불타 부르봉 왕가의 군인이 되었다가 다시 가리발디를 흠모하는 인물로, 전쟁이 그의 몸과 정신에 새긴 상처는 결국 그를 아내에게 폭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그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함께 나눈 이상과 사랑의 기억 앞에서 그의 거친 면모를 용서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오래 생각했다. 소설이 이 관계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전쟁과 폭력의 시대가 한 개인의 사랑조차 어떻게 변질시키는지, 그리고 그런 관계 안에 놓인 여성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복잡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에 가깝다. 사랑과 상처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존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소설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드러낸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그대로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불편함이야말로 이 소설이 진짜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실제 삶은 언제나 이야기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산으로 들어간 이후 마리아 곁을 지키는 길들여진 늑대 바카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시적인 장치로 보인다. 인간은 배신할 수 있어도 늑대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치칠라가 이제 인간 사회의 질서와 신뢰 체계 바깥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이것은 그녀가 완전히 인간성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회가 강요하는 위선적인 규범, 겉으로는 질서와 법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벗어나 더 순수한 형태의 신뢰와 연대를 늑대에게서 찾았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치칠라가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알렉상드르 뒤마의 글에까지 등장할 만큼 유명해졌다는 서평의 서술은 흥미롭다. 한 시대의 지배 질서에 저항한 여성이 동시에 대중적 신화가 되어버리는 이 아이러니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종종 목격하는 현상과 닮아 있다.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은 그 저항의 진정성과는 별개로 소비 가능한 이야기, 낭만화된 전설로 소비되기 쉽다. 카토첼라는 그런 신화화의 이면에 있던 한 인간의 두려움과 고독,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한 의지를 함께 그려냄으로써 그 낭만화에 균형을 잡으려 한 것처럼 보인다.


치칠라의 독백, 죽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순간과 자신들이 한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언젠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압축해 보여준다.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삶을 역사의 침묵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일이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의 이야기만큼은 잊히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거대한 역사나 사회 구조 앞에서 개인의 선택은 종종 사소하거나 무력해 보이지만, 그 선택들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든다. 마리아가 치칠라가 되기로 한 선택, 가난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려 했던 티누차 할머니의 선택, 그리고 폭력적인 사랑 앞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던 여러 인물들의 선택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를 향해 나아간 몸짓들이었다. 지배당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19세기 칼라브리아의 산속에서도,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똑같이 절실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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