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비테이 -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 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
최재천 지음 / 지식서재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로마의 정치 사상가 키케로는 "Historia Magistra Vitae", 즉 "역사는 삶의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생태학자 최재천은 이 고전적 경구를 책의 제목으로 삼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확장을 시도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가 아니라, 46억 년에 걸친 지구 생명 전체의 역사다. 인간이 기록하기 시작한 수천 년이 아니라, 최초의 화학물질이 자기복제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대서사를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것이 이 책의 근본 목적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관찰학자'라 부른다. 수십 년간 동물의 행동을 관찰해 온 그의 눈에, 가장 신기한 동물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이 책은 그 오랜 관찰의 집대성이자, 자연과학에서 출발하여 인문학과 사회 문제로까지 뻗어 나간 그의 학문적 궤적 전체를 담아낸 역작이다.


책은 46억 년 전 우주의 성운이 뭉쳐 지구가 탄생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그로부터 8억 년 뒤, 어딘가 물이 있는 환경에서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화학물질이 우연히 탄생했다. DNA이든 RNA이든, 그 물질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의 생명 다양성이 펼쳐졌다. 수중 생물이 육지로 올라와 파충류, 조류, 포유류가 되었고, 포유류 중 일부가 영장류가 되었으며, 그 영장류의 한 가지 끝에서 약 3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진화에 방향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진화를 '발전'이나 '진보'로 이해하지만, 다윈 자신은 어떤 생물이 고등하거나 하등하다고 말하기를 거부했다. 진화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가 유전될 뿐이며, 그 선택이 미래에도 최선이라는 보장은 없다. 공룡은 못났기 때문에 멸종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기 때문에 사라졌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명제는, 힘과 지능을 앞세우는 인간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처럼 들린다. 인간의 눈에 맹점이 있고, 음식과 공기가 교차하는 목구멍의 구조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 결함들은 척추동물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설계의 흔적이다. 완벽해 보이는 인체조차 '그때그때 최선의 타협'이 쌓인 결과물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오만을 내려놓게 된다.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단 하나로 압축된다. 공생(共生)이다. 나무는 뿌리 아래 균근균과 박테리아가 형성한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을 통해 서로 영양분과 위험 신호를 나누며 살아간다. 곤충의 공격을 받은 사탕단풍나무가 페놀과 탄닌을 분비하면, 아직 공격받지 않은 이웃 나무들도 즉각 같은 방어 물질을 만들어 낸다. 개미는 페로몬으로 정교한 의사소통 체계를 구축하며 집단 지성을 발휘한다. 파리지옥은 먹이가 감각모를 건드리는 횟수를 기억하고 계산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생의 지혜는 생물 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균류는 나무에게 정보를 배달하고, 나무는 균류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꽃은 벌에게 꿀을 내어 주고, 벌은 꽃가루를 옮겨 번식을 돕는다. 이 상호 의존의 망이 끊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저자는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 엇박자' 현상을 통해 보여 준다. 꽃의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면서 꿀벌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게 되면, 벌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 죽고 꽃은 수분을 받지 못해 번식하지 못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100대 작물 중 71종이 꿀벌의 수분 활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이 작은 엇박자가 얼마나 거대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46억 년의 생명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불과 30만 년 전에 등장한 막내다. 그런데 이 막내는 진화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저자는 인류를 '생태계 교란종'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열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 지구 전역에 퍼져 사는 유일한 종인 인간은, 지금 사는 곳이 오염되어도 달리 옮겨 갈 곳이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자신의 생존 기반을 파괴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기후 변화는 그 교란의 가장 심각한 결과 중 하나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 기온은 약 1.5도 상승했으며, 2024년에 이미 IPCC가 재조정한 1.5도 목표를 넘어섰다. 1도 남짓한 상승이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저자는 이 수치가 폭염, 집중 호우, 빙하 융해로 이어지며, 2도를 넘어서면 생태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고 경고한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신종 전염병의 창궐 역시 인간이 야생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다. 박쥐와 천산갑을 거쳐 인간에게 전달된 바이러스의 경로는, 공생의 균형을 깨뜨린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아오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다. 동물원에 갇혀 무기력한 눈빛을 잃어버린 고릴라, 수족관에서 쇼를 강요당하다 우울증에 걸린 돌고래, 좁은 카페에서 수천 번의 낯선 손길에 이상 행동을 보이는 야생동물들. 저자가 목격하고 기록한 이 장면들은 단순한 동물 복지의 문제를 넘어, 인간이 자연과 맺어온 관계 방식 전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다.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낸 경험에서 저자가 찾은 것은 단순한 보람이 아니라, 공생의 회복이 가져오는 진정한 풍요였다.

저자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힘세고 강한 것이 생존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이웃과 함께 생존력을 높이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략임을 46억 년의 생명 역사가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명한 인간)에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하는 인간)로 거듭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명들이 공통적으로 채택한 전략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자는 진화적 통찰이다. 저출생 문제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다. 갈매기가 바깥일과 집안일을 정확히 반반씩 분담하며 자식을 기르는 모습에서 그는 인간 사회의 해법을 끌어낸다. 돈으로 출산을 독려하는 정책보다, 남성이 육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구조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갈매기의 생태에서 배운 지혜다. 자연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 영감을 주는 스승이다.


책은 방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다. 개미의 냄새길 페로몬 이야기, 파리지옥의 셈 능력, 고릴라 하람베의 비극적 죽음, 제돌이의 귀환까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들이 거대한 논지를 받쳐 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경이로움과 반성을 오가며, 자신이 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 안에 속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과학자로서 저자는 신의 창조를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생명의 기원에 대한 믿음의 영역을 존중한다. 그가 다윈주의자이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46억 년의 역사가 가르쳐 준 것은, 어떤 존재도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심오한 진리다. 팬데믹,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의 급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지금,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울린다. 결국 묻는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막내로서, 수십억 년 먼저 이 땅에서 공생의 법칙을 체득한 선배 생명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 답을 찾는 일이 바로 '히스토리아 비테이', 생명의 역사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