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 쇼펜하우어와 함께 이겨내는 삶의 고통
강산 지음 / 알토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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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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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나는 이 질문 앞에 멈춰 서게 되었다. 왜 회사가 바뀌어도, 팀이 바뀌어도, 심지어 나 자신이 꽤 많이 달라졌다고 느낄 때조차 비슷한 갈등이 되풀이되는 것인가. 처음에는 스스로를 탓했다. 내가 좀 더 유연했더라면, 좀 더 참았더라면, 좀 더 영리하게 처신했더라면 하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자책의 반복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문제의 뿌리는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위로의 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을 낙관하지 않았고,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냉정하고,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솔직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냉정함이 어떤 위로보다 더 깊은 안도감을 준다. 왜냐하면 그는 고통이 우리의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선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무대가 아니라, 각자의 주관이 인식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성립하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회의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수만큼 서로 다른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협력의 자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경쟁의 장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저 견뎌야 할 시간일 수 있다. 이 통찰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갈등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이 '틀렸다'거나 '나쁘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념에서 보면, 그 사람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 안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충돌은 악의보다 인식의 차이에서 더 자주 태어난다. 관계의 상처가 반드시 누군가의 잘못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마주친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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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기심을 도덕적 결함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교정해야 할 병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가 개체로 발현된 자연스러운 형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속을 원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직장이라는 공간은 이 욕망들이 좁은 장 안에서 동시에 충돌하는 곳이다. 역할이 주어지고, 평가가 이루어지며,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이 구조 안에서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특히 뛰어난 누군가가 등장할 때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생각해 보라. 탁월함은 환영받기보다 억제되는 경우가 많다. 성과를 축소하거나, 평가를 흐리거나,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행동들은 단순한 시기심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자신의 평균적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낀 존재가 그 기준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시도다. 이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그 반응들이 덜 개인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나를 향한 공격이라기보다 구조가 만들어 낸 반응에 가깝다.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은 질투에서 비롯된다. 카인은 아벨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해서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벨이 인정받았다는 사실, 그 비교의 결과가 카인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질투는 외부 대상에 대한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내면의 불균형에서 증폭된다. 우리는 타인의 성공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이 드러내는 자신의 결핍에 반응하는 것이다. 현대 직장인의 삶은 이 열등감의 구조를 더욱 정교하게 작동시킨다. SNS는 타인의 삶을 끝없이 비교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고, 조직은 평가와 순위를 통해 사람을 서열화한다. 평균이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평균을 벗어난 존재는 불안을 일으킨다. 쇼펜하우어는 이 불안의 해소 방법이 종종 타인을 끌어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예견된 반응임을 알게 되면, 비로소 그 안에서 자신을 덜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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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시간에 대해서도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준비 공간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작동하는 유일한 자리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현재를 유예하며 사는가. 승진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이직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조금만 더 버티면 다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지금 이 순간을 통과 지점으로만 취급한다. 퇴근 후에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의 회의를 걱정하며 오늘 저녁을 소비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현재를 미래의 하위 개념으로 격하시킨 습관의 결과다. 쇼펜하우어의 언어로 말하자면, 의지가 충족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금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이며, 이후의 시간은 그것을 수정해 주지 않는다. 지금을 살지 않으면, 그 어떤 미래도 우리를 구해 주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비관주의로 분류되는 것은 그가 삶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관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해방이다. 고통이 우연히 찾아온 불운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 피할 수 없이 수반되는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고통 앞에서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을 먼저 찾지 않아도 된다. 직장에서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바뀌어도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구조가 만들어 내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관계의 마찰을 개인적 실패로 받아들이는 대신, 예측 가능한 변수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감정적 소모가 줄어들고, 판단이 조금 더 냉정해진다.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지혜의 시작이다.


나는 이 철학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정확히는 위로보다 조금 다른 무언가였다. 그것은 납득이었다. 왜 이렇게 살아도 늘 어딘가 부족하고, 왜 열심히 해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지에 대한 납득. 삶이 괴로운 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납득이다. 지금의 환경이 나의 인생 전체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지금의 평가가 나라는 존재의 값어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갈등은 내가 틀렸거나 약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구조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그 구조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은, 그 안에서 조금 더 가볍게 숨을 쉴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의지가 잠시 쉬는 순간에 가깝다. 그것은 작고 조용한 것이다. 크게 흥분하거나 환호하는 순간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 있는 순간.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삶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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