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현대, LG와 같은 재벌(chaebol), 즉 가족 지배 대기업 집단이 혁신의 핵심 주체였다. 군사 독재 시절부터 국가 주도 경제 성장 전략의 일환으로 육성된 이 재벌들은 저기술 대량 생산에서 고부가가치 첨단 전자 산업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삼성이라는 기업 하나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생애 전반에 걸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거대 기업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 모델은 역설적 이게도, 기술 혁신이 기존의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작동했 다는 점에서 비판적 성찰의 여지를 남긴다.
동아시아의 혁신이 국가의 강력한 의지와 전략적 개입에 의해 추동되었다면, 서구의 혁신은 문화와 제도적 환경의 산물이 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실리콘밸리는 혁신 생태계의 원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아나 리 색세니언의 연구가 밝혔듯, 실리 콘밸리의 핵심 경쟁력은 보스턴과 같은 다른 기술 도시들에 비해 훨씬 유연하고 개방적인 문화에 있다. 이 문화는 세 가지 특징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혁신을 촉진한다. 첫째, 기업 간 활발한 이직이 아이디어의 교차 수분(cross-pollination)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지분을 현금화하는 능력, 즉 주식 상장을 통한 유동성 확보가 새로운 스타트업 창업의 자본을 제공 한다. 셋째, 실패에 대한 낙인이 없는 문화가 도전을 장려한다. 이에 더해, 저널리스트 세바스찬 말라비가 강조한 벤처 캐 피탈의 발달은 실리콘밸리에 독특한 리스크 수용 문화를 심어주었고, '문샷(moonshot), 즉 성공 확률이 낮지만 성공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담한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 스위스의 혁신은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스위스는 글로벌 혁신 지수 1위 국가임에도, 유니콘 스타트업의 수로만 혁신을 측정하는 협소한 시각으로는 그 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