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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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은 질문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묻지 않듯이, 나는 왜 나이를 먼저 묻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국인 친구와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 그 친구가 내 나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요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물었다. 그 대화는 이상하게도 훨씬 가벼웠고, 동시에 훨씬 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숫자로 분류되지 않은 채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 앞에서 나는 선배가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는 후배가 된다. 이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한다. 참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효율과 인간다움은 종종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나이가 위치를 결정하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서른 살의 누군가는 그가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왔는지, 무엇에 웃음을 터뜨리는지, 새벽 세 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서른 살'이 된다. 예순 살의 누군가는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 여전히 뛰고 있는 욕망과 꿈과 무관하게, 그냥 '예순 살'이 된다.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두 자리 숫자로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나이 대신 다른 무언가를 먼저 물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인지. 그랬다면 우리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훨씬 많은 의외의 연결을 발견했을 것이다.

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결과 중 하나는, 모든 나이대가 차별받는다는 역설이다. 어린이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빼앗기고, 청년은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훈계를 듣고, 중년은 시대를 모른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노인은 이미 늙었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어느 나이대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한다. 모두가 차별받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모두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더 씁쓸한 것은, 이 차별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어린 사람에게 기특하다고 말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사람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특하다'는 말 속에는 그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전제가 숨어 있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공동체의 중심에서 그를 밀어내는 거리감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차별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한 초등학생이 헌법재판소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또렷하게 발언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절박함과 진지함을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대견하다는 것이었다면, 그 아이의 메시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내용이 아닌 그 나이가 먼저 읽힌 것이다. 우리는 말의 내용 앞에 나이를 먼저 세워두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이에 맞는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얼마나 조여왔는지,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이십대에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삼십대에는 안정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사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그것이 나이가 들어서 용감해진 덕인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들을 어느 정도 해냈기 때문에 허락된 자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에 맞는 직업, 나이에 맞는 결혼, 나이에 맞는 언어, 나이에 맞는 태도. 이 목록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촘촘하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목록에 자신을 대입하며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그 확인의 시선은 때로 타인의 것이고, 때로 나 자신의 것이다. 안으로 내면화된 나이의 감옥은 외부에서 잠그는 감옥보다 훨씬 빠져나오기 어렵다. 육십에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팔십에도 사랑이 찾아오고, 열두 살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한,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증거들을 종종 예외나 이변으로 처리한다. 예순의 열정은 감동적인 뉴스가 되고, 열두 살의 용기는 기특한 해프닝이 된다. 예외는 기억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나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것들이 있고, 나이는 그 축적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사람을 설명하는 일차적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는 그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지를 알려줄 뿐,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어떤 예순 살은 서른처럼 뜨겁고, 어떤 서른 살은 예순처럼 지쳐있다. 어떤 열 살은 어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보고, 어떤 어른은 평생 그 진실을 마주하기를 피한다. 역연령과 기능적 연령이 다르다는 말은 단지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 대신 다른 것을 먼저 묻게 되길 바란다. 그 변화는 작은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보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나이를 먼저 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몇 살인지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하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나이를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늙어가는 그 과정을. 그 공통의 취약함 앞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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