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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5월의 첫날, 창밖으로 보이는 탄천의 연둣빛이 유난히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거실 한편에 놓인 구슬픈 마리 로랑생의 그림 도록 옆으로, 오늘은 조금 묵직한 제목의 책 한 권을 놓아봅니다. 작가 은유의 인터뷰집 <생업>. 매년 돌아오는 노동절이지만, 올해는 유독 이 단어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남편의 뒷모습이나, 이제 막 사회라는 거친 파도에 올라탄 아들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책장을 넘기자마자 조지 오웰의 문장이 마음을 툭 건드립니다. 대용량 음식을 제시간에 내놓기 위해 '인생이 단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움직이는 파리 호텔 주방의 풍경. 그것은 단순히 '바쁘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일종의 장대한 협주곡과도 같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곧바로 서울의 한 초등학교 급식실로 이어집니다. 매일 1,700인분의 밥을 짓는 김규희 님의 이야기는 제게 묘한 동질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저 역시 수십 년간 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며 '돌밥돌밥(돌아서면 밥)'의 회오리 속에서 지쳐본 경험이 있기에, "해방 삼아 집을 떠나고 싶었다"는 그녀의 고백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밥 짓기'는 제가 집에서 정성스레 구워내는 빵이나 정갈하게 차려내는 반찬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치솟는 불길 앞에서의 사투, 거대한 솥을 젓는 삽질,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국수를 건져 올려야 하는 찰나의 판단들. 그녀는 말합니다. "요리는 과학이고, 판단이며,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고요. 누군가는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하찮은 일'이라 치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아이들의 점심시간을 지켜내는 숭고한 임무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뜨거운 튀김 솥 앞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애들 뜨끈하게 먹이려고" 배식 직전까지 튀겨내는 그 마음. 그것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타인의 생을 지탱하는 '존엄의 기술'이었습니다.책은 또 다른 '밥 장군' 김주휘 님의 이야기로 흐릅니다. 세월호 유가족부터 해고자 농성장까지, 아픈 현장마다 따뜻한 밥을 싣고 달려가는 그녀의 무기는 쇠붙이가 아닌 '따끈따끈한 밥상'입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특히 가슴에 박혔던 이유는 '대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대충 때우는 밥이 아니라,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양념을 좋아하는지 집요하게 물어 차려내는 아홉 가지 반찬들. 얼어붙은 고기반찬 대신 따뜻하게 올린 시래기밥 한 그릇이 주는 위로. "음식은 추억이 7할이다" 그녀의 이 말은 우리가 왜 그토록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줍니다.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강력한 연결고리이며, 무너진 일상을 되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의례입니다. 관절 마디마디가 닳도록 밥을 짓고도 "그분들에게 밥을 해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꼿꼿한 자존감 앞에서, 제가 가졌던 소소한 고단함은 어느덧 경건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마음을 머물게 한 것은 가수 안예은 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을 '예술업계 노동자'로 정의하는 그녀의 태도는 신선하고도 단단했습니다. 영감을 기다리기보다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고, 동료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프로의 모습. 자신의 아토피 흉터와 우울증마저 숨기지 않고 "내 몸은 나의 역사책"이라 말하는 용기는, 나이 듦의 흔적이나 삶의 생채기를 애써 가리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기부는 '엄청난 가오'이자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당연한 행위였습니다. 선천적인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녀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위로는, 마치 잘 구워진 빵처럼 담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일 때는 당연해 보이지만, 그들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일순간 마비되고 맙니다. 급식 노동자, 활동가, 뮤지션...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악기를 들고 '생업'이라는 거대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노동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거리를 걷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수고로움 뒤에 숨겨진 땀방울과 긍지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눈을 갖고 싶습니다. 5월의 햇살 아래, 오늘도 각자의 현장에서 묵묵히 삽을 들고, 펜을 쥐고, 솥을 젓는 모든 '장군'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이 차려준 이 세상이라는 밥상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