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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흥미로운 클래식
송현석 지음 / 링크북스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깊이 이해하려 할 때, 그것을 잘게 쪼개어 분석하곤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단백질 함량이나 나트륨 수치를 따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이라 불리는 50대 후반에 들어서니, 세상에는 분석보다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할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무쳐주셨던 나물 무침의 맛을 화학식으로 설명할 수 없듯, 클래식 음악 또한 화성학이나 대위법이라는 딱딱한 이론 이전에 '누군가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으로 다가옵니다. 최근 읽은 클래식에 관한 기록들은 저에게 음악이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1685년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와 헨델, 그리고 샘물과 우물처럼 달랐던 모차르트와 베토벤, 마지막으로 침묵과 열정 사이를 오갔던 쇼팽과 리스트까지. 그들의 음악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내뱉은 고독한 외침이었습니다.바흐와 헨델의 대비는 마치 우리네 삶의 양면성을 보는 듯합니다. 아이제나흐의 고요한 숲길을 닮은 바흐의 삶은 경건하고 질서 정연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대위법의 세계를 구축했지요. 그의 음악이 주는 안정감은 마치 잘 정돈된 집안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닮아 있습니다. 분당의 조용한 탄천 길을 산책하며 느끼는 그 정갈한 질서가 바흐의 음악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상업 도시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대중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아는 '일타 강사' 같았습니다. 그는 청중이 언제 환호하고 언제 눈물을 흘리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바흐가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내면의 성벽을 쌓았다면, 헨델은 광장에 서서 사람들의 가슴에 직접 불을 지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의 '바흐'와 '헨델'을 화해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원칙을 지키며 내면을 가꾸는 바흐의 성실함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헨델처럼 화려한 외출복을 차려입고 세상과 뜨겁게 소통하며 박수갈채를 즐기는 용기도 필요하니까요. 투자에서도 안정적인 배당을 챙기는 전략과 성장을 기대하는 도전이 공존해야 하듯, 우리 삶의 플레이리스트에도 이 두 거장의 균형이 절실합니다.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는 '재능'과 '숙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모차르트에게 작곡은 마치 잘 익은 과일을 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악보는 수정 흔적 없이 깨끗했고, 선율은 맑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올랐습니다. 반면 베토벤에게 음악은 마른 땅을 파고 또 파서 길어 올리는 깊은 우물과 같았습니다. 청력을 잃어가는 절망 속에서도 그는 주머니에 수첩을 넣고 산책하며 떠오른 악상을 수만 번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저는 베토벤의 그 지저분한 악보에서 묘한 위로를 받습니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에게 삶은 늘 '베토벤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꾸리고, 낯선 외국어를 익히고, 노후를 위해 경제적 기반을 닦는 모든 과정은 결코 '모차르트식'으로 술술 풀리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지우고, 다시 쓰는 그 덧칠된 흔적들이 모여 결국 우리 인생의 '합창 교향곡'이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특히 16살 된 노견 토토를 돌보며 보내는 매일의 시간 속에서, 저는 베토벤이 60알의 커피 원두를 정성껏 세던 그 집요한 루틴을 떠올립니다. 비록 화려하진 않아도 반복되는 일상의 규칙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준다는 사실을 그는 음악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마음을 흔든 것은 쇼팽과 리스트였습니다. 폴란드의 흙을 은잔에 담아 평생 간직했던 이방인 쇼팽.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피아노의 쉼표 사이에 숨겨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의 내성적인 영혼은,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가장 섬세한 '피아노의 시'를 낳았습니다. 그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던 리스트는 '리사이틀'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피아노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연주하는 모습까지 예술로 승화시킨 스타였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사랑했고, 그 열정을 폭풍 같은 음표로 쏟아냈습니다. 쇼팽의 음악이 아늑한 살롱의 촛불 같다면, 리스트의 음악은 대극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같습니다. 쇼팽이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의 흙처럼, 우리에게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사는 '은잔'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청춘일 수도, 두고 온 꿈일 수도, 혹은 말하지 못한 진심일 수도 있습니다. 쇼팽은 그 그리움을 쉼표로 표현했고, 리스트는 그것을 화려한 변주로 승화시켰습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나만의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열망만큼은 같았습니다.클래식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작곡가의 상처와 나의 상처가 만나는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바흐의 경건함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고, 베토벤의 투쟁에서 용기를 얻으며, 쇼팽의 선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 저는 클래식을 감상할 때 더 이상 형식을 분석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 선율 뒤에서 땀 흘리고 눈물지었을 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18세기에 태어난 그들의 고민이 21세기를 사는 저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갑습니다. 인생의 계절이 깊어질수록,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닌 삶의 정수가 되어갑니다. 제가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도 모차르트의 샘물처럼 맑을 때도, 베토벤의 우물처럼 깊고 힘들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곁에 있어 줄 클래식이 있기에, 저의 에세이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저는 바흐의 정갈한 선율로 아침을 열고, 저녁에는 쇼팽의 쉼표 사이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저만의 교향곡을 써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