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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닝 - 끝없이 나를 타인에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
잉그리드 클레이튼 지음, 최시은 옮김, 김현수 감수 / 센시오 / 2026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회의실 안에서 팀장이 별로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나는 웃었다. 크게, 자연스럽게. 마치 그 말이 정말 재치 있었던 것처럼. 자리로 돌아오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웃었을까? 공포 때문도 아니었고, 아부를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상대방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어쩌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 무의식적인 반응에 요즘 심리 학계와 소셜미디어는 하나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포닝(fawning), 아첨하듯 비위를 맞추는 반응, 혹은 '새끼 사 슴 반응' 이다. 포닝이라는 개념은 원래 심리치료사 피트 워커(Pete Walker)가 트라우마 반응의 한 유형으로 제안한 것이다. 우리가 위협을 마주했을 때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위험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힘 있는 사람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혹은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혹은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기 위해, 이것이 포닝이다.
포닝이 트라우마 반응이다. 폭력적이거나 불안정한 양육자 밑에서 자란 아이는 일찍부터 배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 기쁨조차도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의 내면을 지우고, 상대방의 기분을 읽는 데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이 생존 전략은 놀랍도록 효율적이다. 폭풍우를 예측하고, 상대방의 미소 뒤에 숨은 냉기를 감지하며, 분위기가 나빠지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문제는 이 전략이 위기 상황을 벗어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몸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도 경보를 울린다. 직장 동료의 한숨 소리, 연인의 짧은 문자 답장, 친구의 표정 변화. 뇌는 이것들을 위협으로 등록하고, 몸은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달래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싫어하는 선물에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든, 가기 싫은 자리에 "당연히 가야지"라고 답하는 것이든. 흥미로운 것은 포닝이 참거나 억누르는 행동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종종 진심처럼 느껴진다. 포닝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상대방을 위한다고 믿고, 배려한다고 느끼며, 자신의 바람이 사라진 자리에 타인의 바람을 채워 넣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린다. 좋아하는 색깔조차 떠올릴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포닝 개념이 요즘 이토록 공명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역할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웃어야 할 것 같아서 웃고, 도와야 할 것 같아서 돕고, 좋아해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누 적된 피로감 속에서 "사실 당신은 괜찮아. 당신이 지쳐있는 건 트라우마 때문이야"라는 말은 엄청난 해방감을 준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개념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드디어 내가 설명됐다는 안도감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닝에서 벗어나는 것', 즉 언포닝(unfawning)의 처방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먼저 살피고, 하기 싫은 것을 거절하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은 분명 건강한 지향이다. 그러나 이 처방이 지나치게 확장될 때, 이상한 역설이 생겨난다. 자선 기부조차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점검하라는 조언, 남의 강아지를 봐주는 것도 진심으로 원하는지 되물어야 한다는 권고. 모든 이타적 행동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친절이 병의 증상이 된다. 이는 개인주의와 자기계 발 담론이 익숙하게 걸어온 길이다. 스스로를 돌보라는 메시지는 언제부터인가 타인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로 미끄러진다. 소셜미디어에는 약속을 취소하는 것을 자기돌봄이라 정당화하는 인포그래픽이 넘쳐나고, 공감 능력을 '연약함의 징표'로 비하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포닝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이 흐름에 합류할 때,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고립이 된다. 나라는 주인공만 남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배경으로 흐릿해진다.
포닝 개념이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미리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관리하려 한다. 포닝은 연결에 대한 갈망이 뒤틀린 형태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받을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연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 정직한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진짜로 느끼는 것을 내보이는 것. 친절이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흘러나오도록 내면의 원천을 다시 찾는 것. 상대방의 농담이 재미없을 때, 웃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는 것이다.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은 사랑이란 "자신 이외의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지극히 어려운 과정"이라고 했다. 포닝에서 벗어나는 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타인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지우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지우지도 않으면서, 둘 다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렵고도 필요한 연습. 그것이 사슴이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