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박수 칠 때 떠나라
송인창 지음 / 미류책방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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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10년 5월, 플로리다의 한 남자가 피자 두 판을 사면서 비트코인 1만 개를 건넸다.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거래였다. 디지털 토큰 몇 개와 따뜻한 피자를 맞바꾸는 일이 역사적 사건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14년이 지나 비트코인 한 개의 가격이 1억 원을 넘어서면서, 그 피자 두 판의 가격은 소급적으로 1조 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비트코인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읽는다. 피자의 가치가 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오른 것이라는 사실.


비트코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잿더미 위에서 태어났다. 타이밍은 절묘했다. 대형 금융 기관들이 탐욕으로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정부는 그 기관들을 공적 자금으로 구제했으며,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 시장에 뿌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저축 가치는 조용히 녹아내렸다. 바로 그 순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존재가 아홉 쪽짜리 논문을 내놓았다. 핵심은 단순했다. 중앙은행도, 정부도, 은행도 필요 없는 화폐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수학적 규칙에 의해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고, 누구도 임의로 늘릴 수 없는 화폐. 불신의 시대에 던져진 신뢰의 코드였다. 이 출발점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했다. 기술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탈중앙화된 신뢰라는 개념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고, 블록체인이라는 분산 장부 기술은 실제로 작동했다. 문제는 이 기술적 가능성이 어느 순간부터 투기적 열망과 뒤섞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뒤섞임을 가속한 것이 바로 '서사'였다.


비트코인을 둘러싼 서사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바뀌어 왔다. 처음에는 '미래의 화폐'였다. 기존 법정 화폐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 수단이라는 이야기. 그런데 비트코인은 화폐가 되지 못했다. 초당 3건에서 7건의 거래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비자카드의 초당 2만 4천 건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숫자의 문제이기 전에 설계의 한계였다. 그러자 서사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디지털 금'이다. 화폐는 아니지만 금처럼 희소하고 가치를 저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전환이 이루어진 방식이 흥미롭다. 실패의 고백이 아니라 진화의 선언처럼 포장되었다. 처음부터 가치 저장 수단을 지향했다는 듯이 역사가 다시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맨해튼'이라는 서사가 나돌고, 머지않아 'AI 시대의 기축 자산'이라는 서사가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서사가 자주 바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산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읽는다. 어떤 하나의 서사도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다음 서사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진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이야기를 자주 바꾸지 않는다. 전기는 발명된 이래 줄곧 전기였고, 인터넷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이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효용이 서사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의 서사가 계속 새로 써진다는 것은, 이전 서사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디지털 금'이라는 비유가 있다. 먼저 금이 수천 년간 가치를 인정받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 내구성, 희소성, 분할 가능성이라는 물리적 특성에 더해, 보석으로서의 심미적 가치와 산업적 쓸모가 있다. 누군가 금반지를 끼고 있을 때, 그것은 결혼의 기억이고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다. 금의 가격이 하락해도 금반지를 팔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가격 외의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코드가 아름다워서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없다. 비트코인을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산다. 가격이 오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살 이유도 없다. 이것이 금과 비트코인의 본질적 차이다. 금은 가격이 하락해도 금이지만, 비트코인은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보유할 이유를 잃는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을 살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사는가. 주식을 살 때 우리는 기업의 미래 이익에 대한 청구권을 산다. 채권을 살 때는 약속된 이자와 원금을 산다. 부동산을 살 때는 공간이라는 실물 자산과 임대 수익 가능성을 산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을 살 때 우리가 사는 것은, 솔직하게 말하면, '나보다 더 비싸게 사줄 다음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더 큰 바보 이론이라 부른다. 내가 지금 비싸게 사더라도 나보다 더 비싸게 살 더 큰 바보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 이 믿음이 유지되는 동안은 가격이 오른다. 그리고 이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역사는 이 구조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에서 사람들은 구근이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가능성으로 포장했다. 18세기 미시시피 회사와 사우스시 회사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신대륙의 황금을 미래 가치로 팔았다. 20세기 말 닷컴 버블은 인터넷이라는 실재하는 기술을 근거로, 실재하지 않는 수익 모델을 가진 기업들을 천문학적으로 평가했다.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가 등장하고, 그것을 검증할 역량이 없는 대중이 남들의 행동을 따라가며, 오른 가격이 또 다른 매수자를 불러들이고, 결국 누군가가 가장 비싼 가격에 사서 손실을 떠안는다. 비트코인이 이 구조에서 얼마나 다른지는 아직 역사가 쓰는 중이다. 그러나 구조의 유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오해를 짚어야 한다. 비트코인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이 던진 질문들은 진지하다. 중앙은행의 통화 발행 권한을 누가 감시하는가.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신뢰는 제도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금융 위기 이후 더욱 절실해졌고, 비트코인은 그 질문들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실제로 금융, 물류, 의료 기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가능성과 특정 코인에 대한 투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맞았다고 해서 1999년에 망한 닷컴 기업들에 투자한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블록체인 기술의 미래를 믿는다는 것이 비트코인의 현재 가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기술의 수혜는 그 기술을 상업화하는 기업에게 돌아가지, 기술 위에서 돌아가는 코인을 보유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 앞에서 특히 취약한 위치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연결되고, 빠르게 유행을 흡수하며, 빠르게 결과를 요구하는 문화. 24시간 열려 있는 거래소, 즉각적인 수익을 가능하게 하는 모바일 환경, 그리고 노력보다 운이 인생을 바꿔줄 수 있다는 피로한 믿음. 1천만 명 이상이 가상자산 계좌를 보유하고, 연간 거래 규모가 2,500조 원에 달한다는 숫자는 활력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충격이 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투기의 피해는 언제나 정보와 자금을 먼저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결국 나는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서사가 또 한 번 바뀔 때, 우리는 그것을 진화라 부를 것인가, 도피라 부를 것인가. 화폐가 되지 못했을 때 금이 되었고, 금이 설득력을 잃을 때 맨해튼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 유연함이 비트코인의 강점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어떤 하나의 정체성도 확고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체가 단단한 것은 이야기를 자주 바꿀 필요가 없다.


모든 버블의 역사가 일관되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버블은 터지기 직전까지 버블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들이 넘쳐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 그리고 터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이 자산을 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샀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고 있는 것이 자산인지 서사인지를 묻는 일. 그것이 불편하고 분위기를 깨는 질문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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