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이 구조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에서 사람들은 구근이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가능성으로 포장했다. 18세기 미시시피 회사와 사우스시 회사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신대륙의 황금을 미래 가치로 팔았다. 20세기 말 닷컴 버블은 인터넷이라는 실재하는 기술을 근거로, 실재하지 않는 수익 모델을 가진 기업들을 천문학적으로 평가했다.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가 등장하고, 그것을 검증할 역량이 없는 대중이 남들의 행동을 따라가며, 오른 가격이 또 다른 매수자를 불러들이고, 결국 누군가가 가장 비싼 가격에 사서 손실을 떠안는다. 비트코인이 이 구조에서 얼마나 다른지는 아직 역사가 쓰는 중이다. 그러나 구조의 유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오해를 짚어야 한다. 비트코인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이 던진 질문들은 진지하다. 중앙은행의 통화 발행 권한을 누가 감시하는가.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신뢰는 제도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금융 위기 이후 더욱 절실해졌고, 비트코인은 그 질문들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실제로 금융, 물류, 의료 기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가능성과 특정 코인에 대한 투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맞았다고 해서 1999년에 망한 닷컴 기업들에 투자한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블록체인 기술의 미래를 믿는다는 것이 비트코인의 현재 가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기술의 수혜는 그 기술을 상업화하는 기업에게 돌아가지, 기술 위에서 돌아가는 코인을 보유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 앞에서 특히 취약한 위치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연결되고, 빠르게 유행을 흡수하며, 빠르게 결과를 요구하는 문화. 24시간 열려 있는 거래소, 즉각적인 수익을 가능하게 하는 모바일 환경, 그리고 노력보다 운이 인생을 바꿔줄 수 있다는 피로한 믿음. 1천만 명 이상이 가상자산 계좌를 보유하고, 연간 거래 규모가 2,500조 원에 달한다는 숫자는 활력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충격이 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투기의 피해는 언제나 정보와 자금을 먼저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결국 나는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서사가 또 한 번 바뀔 때, 우리는 그것을 진화라 부를 것인가, 도피라 부를 것인가. 화폐가 되지 못했을 때 금이 되었고, 금이 설득력을 잃을 때 맨해튼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 유연함이 비트코인의 강점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어떤 하나의 정체성도 확고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체가 단단한 것은 이야기를 자주 바꿀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