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
박영택 지음 / 심통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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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은 언제나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을 담는다. 붓 한 자루, 먹 한 방울 속에도 시대의 무게가 스며든다. 한국 근대미술이 걸어온 길은 단순한 양식의 변천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를 잃고, 전쟁을 겪으며, 그럼에도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기록이다. 1900년대 초 개화의 물결과 함께 서양 미술의 개념이 밀려들어오고, 식민지의 질곡 속에서도 화가들은 붓을 놓지 않았다. 책은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미술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피어났는지를 상세히 이야기 한다.


1910년 8월,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나라가 사라지는 그 직전의 봄, 신문 한 면에 작은 그림 하나가 실렸다. 이도영이 그린 판소리 장면이었다.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소리꾼이 부채를 들고 고수의 장단에 맞춰 소리를 내지르는 그 그림은,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로 기록되었다. 이도영의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삽화만의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뻐꾸기 소리를 '복국(復國)'으로 바꿔 부르는 소리꾼의 절절한 외침이 담겨 있었다. 나라를 되찾으라는 간절한 염원을 판소리 형식에 빌려 표현한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도 그림과 소리꾼의 몸짓만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 연재된 시사만화는 계몽의 도구이자 저항의 언어였다. 이도영은 전환국에서 인쇄술을 익히고,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통 화법을 사사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적 묘사 방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모필의 전통적인 선 감각을 살려, 인물의 동작과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오세창이 글을 쓰고 이도영이 그림을 그린 대한민보의 시사만화는, 그림이 단순한 장식이나 기록을 넘어 정치적 발언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미술계의 국보'라 불리며 서화계의 어른으로 자리 잡았으나, 1933년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조선의 산수화는 오랫동안 유교적 이상 세계를 그리는 관념의 그림이었다. 사대부 문인들이 추구한 군자의 세계를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왕조가 무너지고 성리학적 세계관이 해체되면서, 그 이념을 담던 그릇도 함께 비어갔다. 그 공백 속에서 이상범은 다른 방향을 찾아나섰다. 이상범이 추구한 것은 관념이 아닌 실경(實景), 즉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산하의 모습이었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그의 작품 '잔추(殘秋)'는 그 탐구의 결정이었다. 늦가을 어느 농촌의 황량한 풍경, 민둥산과 작은 초가집, 드문드문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 먹색 하나만으로 그려낸 그 장면은 쓸쓸하지만 거짓이 없었다. 그것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촌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 풍경이었다. 이상범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이후 실경산수의 맥을 근대적 시각으로 이어받은 작가였다. 그는 전통 화법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서구 풍경화의 시선을 결합하여, 한국 산야가 지닌 고유한 정서를 가시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갈필로 문질러나간 건조한 붓질, 농담을 달리하며 쌓아 올린 먹의 층위,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서늘하고 적막한 정서야말로 이상범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 산야에서 찾아낸 감정은 화사함이 아니라 쓸쓸함이었고, 그 쓸쓸함이 오히려 보는 이의 마음 깊이 닿았다.


정물화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인 장르였다. 역사화나 초상화에 비해 이야기도 없고, 인물에 대한 통찰도 없이 그저 사물을 그리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상봉의 정물화를 마주하면 그 편견이 흔들린다. 1930년에 그려진 그의 작품 '파와 정물'은 식탁 위에 파 한 묶음과 귤 두 개, 토마토 하나가 놓인 단출한 장면이다. 화려하거나 풍성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묵직한 존재감이 있다. 파 뿌리의 흰 빛이 눈부시고, 좌측에서 흘러드는 빛이 과일들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감은 얇고 건조하게 발려 있어 마치 오래된 벽에 스며든 것처럼 화면에 착 달라붙어 있다. 도상봉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반일의식을 품고 살았으며,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화협회전과 동문들과의 그룹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정물화가 지닌 고요하고 격조 있는 분위기는 단순한 기법의 성취가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한 인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길, 꾸밈없는 담백함, 그것이 도상봉 정물화의 진정한 힘이었다.


최재덕은 '화가들이 인정한 화가'였다.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그의 색채 감각과 조형적 순수성은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것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지워져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월북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남아 있는 작품이 채 열 점도 되지 않는 그의 그림들은, 그러나 한결같이 놀라운 감각으로 빛난다. '하얀 집의 테라스'는 정원 너머 흰 벽의 2층 집이 햇빛을 받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밝고 섬세한 붓 터치, 오돌토돌한 물감의 질감, 난간 위 작은 화분들의 앙증맞은 존재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빛의 방향을 알려주는 동시에 화면에 풍성한 이미지를 더한다. 단순한 흰 벽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색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 않다. 거창한 이념도 없고, 역사적 사건도 담겨 있지 않다. 다만 일상의 한 순간, 빛이 잠깐 머무는 자리를 예민하게 포착했을 뿐이다. 시인 김광균은 그를 '천사가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중섭과 나란히 놓인 그 말은, 최재덕의 예술이 지닌 순수성과 단명(短命)에 대한 아쉬움을 동시에 담고 있다.

전쟁 중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1951년, 광주에서 천경자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화실에 들어가 저녁 일곱 시까지 뱀을 그렸다. 여동생의 죽음, 가난, 불화했던 사랑, 그 모든 슬픔을 뱀의 형상 속에 밀어 넣었다. 25일 만에 완성한 그 작품의 이름은 '생태(生態)'였다. 뱀은 보통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천경자에게 뱀은 삶에 대한 저항이자 구원의 상징이었다. 화면 가득 뒤엉킨 뱀들의 덩어리, 무리에서 빠져나와 기어 나오는 몇 마리의 형상. 초록과 붉은색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색의 생동감. 그것은 단순한 생물의 묘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꿈틀거리고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의지였다. 천경자의 채색화는 전통 동양화의 채색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차원을 열었다. 물감을 여러 겹 올리고, 호분을 덮고, 다시 색을 얹어 만들어낸 투명하고 깊은 색층은 보는 이의 시각뿐 아니라 촉각까지 건드린다. 그녀의 그림은 아름다운 것만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해방 이후 화단이 채색화를 왜색(倭色)이라 몰아붙이던 시절에도 그녀는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그림을 일치시키는 것, 그것이 천경자의 예술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전쟁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국의 화가들은 극히 다른 방식으로 시대와 마주했다. 이도영은 붓으로 저항의 소리를 냈고, 이상범은 황량한 우리 산야를 진실하게 응시했다. 도상봉은 사물 속에 고요한 품격을 담았고, 최재덕은 일상의 빛을 감각적으로 건져 올렸으며, 천경자는 고통을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바꾸어냈다. 이들이 남긴 그림들은 어떤 거창한 선언이나 이념보다 더 깊이 시대를 증언한다. 그림은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선 하나, 먹이 스민 여백 하나가 그 시절의 공기를 지금 여기까지 전달한다.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화가들이 붓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묻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한, 혹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절실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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