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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 위기를 지배하라
김경준 지음 / 원앤원북스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거창한 역사 강의를 기대하고 펼쳤던 책이 어느새 지금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명제를 반복한다. 위기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위기를 어떻게 맞느냐가 조직과 개인의 운명을 가른다. 사실 '위기'라는 단어는 요즘 너무 흔하게 쓰여서 감각이 무뎌질 정도다. 경기 위기, 안보 위기, 기후 위기. 뉴스마다 넘쳐나는 위기의 수사들 속에서 정작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의 특정 사건을 분석하는 대신, 수천 년 역사 속 수많은 조직과 리더들이 위기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살핀다. 그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추려내고,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우리 앞에 놓는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강하게 박힌 문장은 의외로 거창한 전략론이 아니었다.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고, 부귀는 교만을 낳고, 교만은 방종을 낳고, 방종은 다시 빈천을 낳는다.' 오래된 경구처럼 들리지만, 이 짧은 문장이 국가의 흥망과 기업의 부침, 그리고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처럼 읽혔다. 풍요로운 시절일수록 위기는 더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책은 위기 앞에 선 리더의 내면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다. 리더는 용기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이 이야기를 역사 속 인물들과 함께 풀어내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리더십을 도덕적 덕목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 전파의 메커니즘으로 바라본다. 조직은 리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소우주라는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태양의 상태가 행성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듯, 리더의 심리 상태는 그대로 조직 전체에 퍼진다. 리더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 두려움은 공기처럼 조직에 스며든다. 반대로 리더가 확신을 품고 있을 때, 그 확신은 말이 아니라 태도와 결정으로 전달된다.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선 앞에 나선 것은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가능성의 실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낙관론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냉혹한 현실 위에 낙관을 세우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보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직면해야 할 현실을 먼저 직시하고, 그 위에서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설계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희망은 감정이 아니라 전략이다. 이 표현이 특히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위기 앞에서 막연한 희망을 파는 리더와,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구체적인 희망을 설계하는 리더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저자는 위기를 돌파하는 전략의 기술을 역사적 사례들로 풀어낸다. 이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같은 방식으로는 같은 실패만 반복된다'는 장이었다. 로마가 한니발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시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수비 전략을 버리고 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쳐들어가는 역발상을 택했다. 적의 공세에 맞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판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이 사례가 단순히 군사 전략의 영리함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끝났다면 크게 인상 깊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기업과 조직의 맥락으로 이어간다. 넷플릭스가 DVD 대여라는 기존 사업 모델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스트리밍으로 진화한 것은 단순한 업그레이드가 아니었다. 콘텐츠 제작사로까지 탈바꿈한 것은 사업의 정의 자체를 다시 쓴 것이었다.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메흐메트 2세가 난공불락의 비잔틴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거대 대포를 가져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의 규칙 안에서 더 잘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규칙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 위기가 깊을수록, 이전의 성공 방식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더 빠른 몰락의 길이 된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증언한다.
저자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 그치지 말고, 제도 개혁의 계기로 삼으라고 주문한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기득권의 저항과 관성 때문에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위기는 그 저항을 무너뜨리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케아의 창고형 매장 시스템이 화재라는 위기에서 탄생했다는 사례는 단순한 반전 드라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재난이 없었다면 아마도 기존의 매장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우리가 고객에게 정말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레고가 파산 위기를 겪으며 화려한 신기술 대신 브릭이라는 본질로 돌아간 것도 같은 이치다. 조선의 대동법이 수십 년의 논쟁 끝에 전란 이후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위기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기존 질서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 기회를 알아보는 눈과,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의지가 준비되어 있느냐다.
책을 덮으면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위기 극복의 공식이나 전략보다, 위기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모든 리더와 조직의 사례에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 위기를 자신에게 닥친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강해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이다. 물론 이것은 말하기 쉽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막상 위기 앞에 서면 냉정한 분석보다 공포가 먼저 찾아온다. 저자도 그 점을 외면하지 않는다. 리더도 인간이기 때문에 두렵다. 다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조직 앞에서 확신을 전파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정학, 기정학, 자정학이 뒤엉키며 세상의 판이 흔들리는 지금,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폭풍우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폭풍우를 통과하는 방식이 뱃사공을 위대하게 만든다. 위기는 시련이기 전에 성장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