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를 부리는 아이들 - AI 사교육 시대, 격차가 벌어지는 진짜 이유
김선형 지음 / 리프레시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둔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애가 숙제를 너무 빨리 끝내요. 처음엔 기특했는데, 알고 보니 전부 AI가 써준 거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아이가 AI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가 그 결과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느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지금 매우 낯선 시대를 살고 있다. 모르는 것이 생겨도 30초면 정제된 답변이 화면 위에 펼쳐진다. 복잡한 수학 문제도, 긴 독후감도, 영어 에세이도 AI 앞에서는 순식간에 해결된다. 아이들은 이 편리함 속에서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불안해한다. AI가 아이들의 사고력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나 나는 이 불안의 방향이 조금 어긋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AI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아이가 AI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있다.
생각해보면, 생각의 외주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참고서의 해설지를 베껴 숙제를 낸 아이도 있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답을 찾아 제출한 학생도 있었다. 도구만 바뀌었을 뿐, 불편한 사고의 과정을 피하려는 욕구는 늘 존재해왔다. 다만 AI는 그 욕구를 전례 없이 완벽하고 빠르게 충족시켜 준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예전의 도구들이 의존성에 적당한 마찰을 가했다면, AI는 그 마찰을 완전히 제거해버린다. 문제는 바로 이 '마찰의 소멸'에 있다. 학습은 본질적으로 불편한 과정이다. 모르는 것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연습장을 가득 채우는 시행착오, 흩어진 정보를 자신의 논리로 엮어내는 수고로움. 이 과정들이 뇌의 회로를 연결하고 사고의 근육을 만든다. 편리한 도구가 이 과정을 대신해줄수록, 아이의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공장이 아니라 결과를 확인하는 검수창구로 조금씩 퇴화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유창성의 착각'이라고 부른다. 타인이 정리한 논리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마치 자신이 이해한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아이가 AI의 풀이를 보며 "나도 알고 있었어"라고 느끼는 순간이 바로 그 착각의 순간이다. 화면이 꺼지면 그 이해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된 적 없는 지식은 뇌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기를 빼앗는 것이 답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구를 금지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그 도구 앞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를 가르치는 일이다. AI를 잘 활용하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AI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사고를 검증해달라고 요청한다. "내가 이렇게 풀었는데 논리적으로 맞는지 봐줘", "내가 쓴 글에서 어색한 부분이 어딘지 찾아줘"라고 묻는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학습의 주도권을 어디에 두느냐를 결정한다. 전자는 AI가 운전하는 차에 탑승한 승객이고, 후자는 AI를 조수석에 태운 운전자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백지 앞에서 굳어버리는 아이에게 "처음부터 혼자 써봐"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AI가 쓴 초안을 건네며 "이 글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볼래? 네 말투로 다시 고쳐줄 수 있어?"라고 요청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이는 수동적인 작성자가 아니라 비판적인 편집자가 된다. 기계적인 문장과 살아있는 문장의 차이를 감별하고, 자신만의 경험과 감정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진짜 문해력이 자란다. AI가 만들어낸 매끄러운 문장에서 "논리는 맞는데 재미가 없어요"라고 느끼는 순간, 그 아이는 이미 작가의 눈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더 선명하다.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에서 멈추는 아이와, 정답 이후에 "이 풀이가 최선일까? 더 간단한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 아이는 결국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한다. 계산은 기계가 압도적으로 잘한다. 그러나 풀이의 방향을 설계하고, 여러 해법을 비교하며, 어떤 접근이 더 우아한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부모의 역할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한국 교육에서 좋은 부모의 표상은 지식을 가르치고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AI 튜터는 어떤 부모보다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며,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지치지 않는다. 스케줄 관리 역시 앱이 더 정확하다. 부모가 AI가 잘하는 영역에서 AI와 경쟁하려 할 때 갈등이 시작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숙제 다 했니?"가 아니라 "오늘 공부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뭐였어?"라고 묻는 것이다. "AI가 그렇게 말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한 문장이 아이의 뇌를 다시 깨운다. 결과를 확인하는 관리자에서, 사고의 과정을 응원하는 코치로 자리를 옮기는 것. 그것이 이 시대 부모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전환이다. AI는 아이의 마음이 무너진 날 곁에 앉아 함께 있어줄 수 없다. 시험을 망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온 아이에게, 성적표보다 먼저 눈을 맞추는 것은 부모만이 할 수 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아이가 다시 일어서도록 마음을 붙들어주는 일, 그 일만큼은 어떤 AI도 대신할 수 없다.
결국 이 시대의 교육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하나다. 아이가 AI를 쓰는 사람으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AI를 부리는 사람으로 자랄 것인가. 그 차이는 도구의 성능에 달려 있지 않다. 아이가 도구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화면이 꺼지고, 인터넷이 끊기고, AI가 침묵한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꺼낼 수 있는 아이.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교육의 본질이다. 편리함은 계속해서 더 완벽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아이에게 불편함을 견디는 힘을 물려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