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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미술 - 연기 사상의 조형적 표현
김문정 지음 / 예술시대 / 2026년 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 햇살이 비친 거미줄을 본 적이 있다. 이슬방울이 맺힌 가느다란 실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그 광경이다. 이 실들이 얽혀있는 것을 우리 인생사에서 바라보면서 우리는 인연이라고 한다. 불교를 생각하면 먼저 인연이라는 단 아가 생각난다. 불교의 이론은 이해하기 참 어렵다. 연기라는 불교의 핵심 사상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지만, 실상 우리의 존재는 무수한 관계 의 교차점에서 잠시 빛나는 별과 같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스승에게서 배운 지식, 친구와 나눈 대화, 심지어 길 에서 스쳐 지나간 낯선 이의 미소까지도 우리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조건들이다. 이 불교의 이론을 미술에서 그 의미를 찾 으면 어떨까... 책을 읽으면서 불교와 미술의 교감을 생각해 본다.
동양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여백이다. 서양화가 캔버스를 빈틈없이 채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면, 동양화는 의도적으로 비워둔 공간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가 숨 쉬는 자리"이며, "새로운 관계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공사상은 종종 허무주의로 오해받는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존재의 무의미함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결코 허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다. 물이 특정한 형태를 고집하지 않기에 어떤 그릇에든 담길 수 있듯이, 존재의 공항은 곧 자유와 가능성을 의미한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정, 서로를 배려하며 남겨 두는 거리, 혹은 상처 때문에 비워둔 자리." 우리의 관계에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연인 사이의 편안한 침묵, 오랜 친구와 나누는 말없는 공감. 여백은 바로 그러한 관계의 깊이를 담는 그릇이다. 또한 겹침의 기법은 시간의 층위를 보여준다. 한지의 투명성을 활용한 겹칠은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현재와 공존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과거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층으로 남아 있다.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의 기억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작가는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며 이러한 시간의 축적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밑에 깔린 색은 완전히 덮이지 않고 은은하게 배어나온다. 마치 우 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기억들처럼.
현대 사회는 빠름을 추구한다. 빠른 배송, 빠른 응답, 인스턴트 문화. 그러나 김문정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한지죽을 만들고, 바르고, 말리고, 다시 채색하는 과정은 결코 서두를 수 없는 시간의 예술이다. 미술에서 작가는 붓을 들고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번뇌는 씻겨 나가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이는 선사상과 맞닿아 있다. 선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 속에서 진리를 체득하는 실천적 방법론 이다. 수행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일상의 모든 행위가 깨달음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선의 핵심이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평범한 일상이 모두 수행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문정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수행적 실천이다. 개념미술이 지배하는 현 대미술에서 물질적 노동은 때로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그 노동의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을 발견한다. 손끝의 감각, 재료와의 대화, 시간의 축적. 이러한 것들은 개념으로 대체될 수 없는 창작의 핵심이다.
현대는 역설적인 시대다. 우리는 SNS를 통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깊은 고립감을 느낀다. 수백 명의 친구 목록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기술은 우리를 연결했지만, 동시에 피상적인 관계의 늪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에 김문정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인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삶은 지속됩니다." 작가는 관객이 작품 앞에서 "나도 혼자가 아니구나, 모든 것이 연결되어 흐르고 있구나"라는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관계는 항상 조화롭지만은 않다. 오해와 상처, 단절과 배신도 관계의 일부다. 그러나 연기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끊어짐 역시 하나의 조건이며, 그 조건이 변하면 다시 이어질 가능성도 열려 있다. 관계의 전체 스펙트럼을 포착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그의 예술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불교와 미술의 만남은 종교적 주제의 미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연기, 공, 선이라는 불교의 핵심 사상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를 담고 있다. 특히 생태 위기, 사회적 양극화, 정신적 고립이라는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상호의존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연기 사상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미술 작품 속 수천 번 덧칠된 색처럼, 우리의 삶도 무수한 만남과 인연이 쌓여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때로 고되지만, 바로 그 노동 속에서 삶의 의미가 피어난다. 미술 작가는 붓을 들고 그 진리를 증명한다. 한 선, 한 선 그 어가며 세계를 엮어내는 그의 수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화폭 앞에 선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를 둘러싼 보이 지 않는 인연의 그물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