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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열두 번의 대전환
김태수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6년 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교양'을 쌓으려는 마음이었다. 세계사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함, 그리고 '열두 번의 대전환'이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주는 안정감. 하지만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내가 찾던 건 지식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자 김태수는 이렇게 묻는다. "수많은 과거의 사건 중에서 무엇을 '역사적 사건'으로 선택해야 할까?" 이 질 문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었고, 동시에 내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 에 일어난 사실들의 집합'으로 이해한다. 연표를 외우고,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사건의 순서를 맞추는 것. 그런데 저자는 극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이 반드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네로 황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수금을 탄 일화는 분명 강렬하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 제국의 흐름을 바꾸지는 않았다. 역사란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엇을 기억 할 것인가, 무엇을 현재와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 말이다. 책은 그 선택을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수행한다.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저자가 고른 열두 개의 사건은 단순히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뼈대를 이루는 사건들이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종교적 관용, 노동의 의미, 국가와 시민의 관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모든 개념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피와 선택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저자가 역사를 '승리의 서사'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유로워졌고, 평등해졌고, 합리적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낙관을 조심스럽게 해체한다. 미국독립혁명을 다른 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쓴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쟁취한 독립이 정작 노예제라는 불평등한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은 미국독립혁명이 지닌 가장 깊은 아이러니였다."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모든 인간'에는 여성도, 흑인도 포함되지 않았다. 자유를 외친 사람들이 동시에 노예를 소유했고, 평등을 말한 사회가 차별을 법으로 명문화했다.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시작된 혁명은 결국 공포정치와 단두대로 귀결되었다. 불과 10년 사이에 입헌군주제, 공화정, 독재가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졌다. 인간은 이상을 실현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을 멈추지 못했다. 이 책은 그 모순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보게 만든다. 십자군 전쟁을 다룬 장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통찰이 등장한다. 예루살렘은 11세기 이슬람 세계에서 메카나 메디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도시였다. 그런데 십자군의 침공 이후, 외부의 위협이라는 역설적인 계기를 통해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계에서 상징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역사는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신념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신념을 만 들어낸다. 이 순환 속에서 역사는 쓰인다.책은 과거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를 해석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 뉴스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복잡한 동맹 관계가 떠올랐고, 중동 분쟁을 접하면서 십자군 전쟁 이후 뿌리 깊게 형성된 정체성의 충돌이 떠올랐다. AI로 인한 노동 시장의 변화를 고민할 때면,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재배치했던 과정이 겹쳐 보였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인간은 여전히 신념을 위해 싸우고, 이상을 실현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배제한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그 기술이 만드는 부와 권력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런 패턴을 읽는 법을 가르쳐준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인간은 신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진보와 해방을 외치며 투쟁하고 피 흘려 왔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성취를 남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역사는 성취와 상처가 겹겹이 쌓인 자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간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건, 역사는 '아는 것'이 아니라 '연결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건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를 이해하는 것.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진짜 역사 공부다.책은 총 열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궁금한 주제부터 읽어도 된다. 중동 문제가 궁금하면 십자군 전쟁부터, 민주주의의 기원이 궁금하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부터, 노동 문제가 궁금하면 산업혁 명부터 시작하면 된다. 각 장은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장을 읽으면 다른 장이 궁금해지고, 그렇게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런 세계에 살게 되었을까? 자유와 평등은 어떻게 탄생했고, 왜 여전히 완전하지 않을까? 종교는 왜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원인이 되었을까? 혁명은 왜 이상으로 시작해서 폭력으로 끝나는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과거 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다.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역사는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쓰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라는 것. 우리가 오늘 내리는 선택,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사건들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역사'가 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남길 것인가? 오늘의 세계는 그 상처와 성취가 겹겹이 쌓인 자리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