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 - 청빈과 이익 사이, 조선 선비들의 머니 스토리
곽재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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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가 알던 조선은 유교적 명분과 신분 질서로 굳어진 사회였다. 하지만 그 틈새에는 끊임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책상머리에서 고전을 외우기만 한 학자가 아니라, 땅과 돈과 사람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바꾸려 했던 실천적 사유자들이었다. 정도전이 <경국전>에서 토지 겸병 문제를 지적할 때, 그는 단지 도덕적 비난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부자는 수확물로 다시 땅을 사들여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는 조금씩 땅을 팔아 더욱 궁핍해지는 악순환. 소작농은 수확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가혹한 현실. 그는 이 구조적 모순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개혁은 감상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륜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경제의 혈액인 화폐가 제대로 순환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빈혈에 걸린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1401년, 조선은 그의 제안으로 저화라는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비록 유통에는 실패했지만, 홍제역 근처 어딘가에서 한국 최초의 화폐가 인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 경제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지함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선비가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할 때, 그는 직접 노를 저으며 품삯을 벌었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관찰한 것도 고상한 자연 관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학습이었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지식은 책에서 배운 이론보다 훨씬 강렬했고, 실용적이었다. 상업을 천시하던 시대에 그는 장사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굴러가며 스스로 터득했다. 노비 신분에서 시작해 재산을 축적하고, 결국 아산 현감이라는 관직까지 얻은 그의 궤적은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경제 활동의 가능성을 백성들에게도 열어주고자 했다.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유형원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분 제도 자체가 과연 정당한가? 1670년에 노비 제도 폐지를 주장했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는 사람의 가치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고 믿던 시대였다. 그런 사회에서 노비 해방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혁 제안이 아니라 체제 전복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그는 부안에서 홀로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맹자의 정전법을 참고하되, 현실에 맞게 변형한 공전제를 설계했다. 땅을 아홉 조각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공동 경작하는 고대 방식이 아니라, 각자에게 일정 면적을 배분하고 수확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는 방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실행 가능성을 고민했다.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801년 6만 명이 넘는 공노비가 해방되는 역사적 순간으로 이어졌다. 유수원은 유형원과 닮았지만 또 달랐다. 그 역시 <우서>에서 중상주의를 주장했지만, 직접 조정에서 일하며 현실의 벽을 체감했다. 유형원이 시골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유수원은 벼슬살이를 하며 정치의 냉혹함을 경험했다. 영조는 붕당 간 싸움을 줄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경제 개혁 따위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학문적 열정으로 청력까지 잃은 그가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비극이었다. 그의 냉소적 어조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약용의 삶을 보면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의 전성기는 정조와 함께 화성을 건설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18년간의 유배 기간이었다. 거중기를 발명해 성을 쌓는 것도 훌륭하지만, 홀로 귀양살이를 하며 500권의 책을 저술한 것은 경이롭다. <경세유표>는 입법에 관한 지침서다. 나라를 경영하려면 어떤 제도가 필요한가를 다룬다. <목민심서>는 행정에 관한 것으로, 지방관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담았다. <흠흠신서>는 사법, 즉 범죄 수사와 판결의 원리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세 권의 책은 현대 국가의 삼권분립 구조를 선취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자신의 두뇌 속에 담으려 했던 것 같다. 유배지는 그에게 감옥이 아니라 연구실이었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을 때, 그는 오히려 가장 깊은 사유에 도달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을 때 비로소 권력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책이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궁리'의 사람들이었다. 궁리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파고들어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를 재화의 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땅의 분배, 화폐의 유통, 노동의 가치, 신분의 구속, 소비의 역할까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체계로 바라봤다. 조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장터는 지역마다 다른 양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화폐 부족은 만성적 문제였으며, 기술 혁신은 조용하지만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경제를 궁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 모두 실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좌절했다. 저화는 유통에 실패했고, 유형원의 공전제는 생전에 채택되지 못했으며, 유수원과 박제가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대의 학자들이 그것을 읽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변화했다. 경제를 궁리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궁리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땅은 어떻게 나눠야 공정할까. 돈은 어떻게 흘러야 경제가 살아날까. 신분은 정말 정당한가. 소비는 사치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이런 질문들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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