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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영혼의 미술관 - 우리가 사랑한 화가들의 삶이 담긴 낯선 그림들
김원형 지음 / 지콜론북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뭉크 하면 '절규'가, 고흐하면 '해바라기'가, 클림트하면 '키스'가 떠오른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이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토록 단순할 리 없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내면의 풍경, 세상과 맺는 복잡다단한 관계들을 어떻게 단 하나의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책은 우리가 ' 안다고 ' 생각했던 거장들의 이면, 대표작의 그늘에 가려진 또 다른 작 품들을 조명함으로써, 예술가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책이 소개하는 작품들은 유명세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작가의 내밀한 영혼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된다.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풍경화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였다. 이전에는 풍경화를 아름다운 자연이나 도시의 재현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저자는 풍경화 속에도 작가의 감정이, 시대의 분위기가, 사회적 변화가 스며들어 있음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모네의 파리 풍경화는 도시 스케치가 아니라 근대성의 발견이었고, 고흐의 글루아 다리는 향수와 예술적 실험의 결합이었으며, 실레의 풍경화는 불안과 고독이 투영된 영혼의 지도였다. 건물에도 감정이 있다는 표현처럼, 풍경화는 결코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는가가 모두 화폭에 담긴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세 명의 음악가들'에 대한 해설은 사실주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다. 사실주의란 단순히 대상을 정확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과 삶의 태도까지 작품 안에 담아내는 것 이라는 통찰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깊이를 한층 더해준다.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가만큼이나, 왜 그것을 선택했고 어떻 게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대표작'이라는 프레임에서 예술가를 해방시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한 작가를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이 단 하나의 순간으로 설명될 수 없듯, 예술가의 세계 역시 대표작 하나 로 요약될 수 없다. 오히려 덜 알려진 작품들, 실험적인 시도들, 개인적인 동기로 그린 작품들이 작가의 진면목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뭉크에게 절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도 있었고, 클림트에게 화려한 인물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풍경화도 있었으며, 마네에게 파리의 세련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해변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술가를 한 명의 살아있는 인간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녀를 고통받는 여성 화가로만 기억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생명의 찬가라 할 만한 '생명의 과실'을 그렸다. 탐스러운 과일, 선명한 색채, 터져 나오는 생명력. 이것이 평생을 사고 후유증과 유산의 아픔으로 고통받은 그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역설적인지를 보여준다. 고통 속에서도 생명을 찬미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작품의 표면적 아름다움이나 기술적 완성도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작가가 왜 이것을 그렸을까, 어떤 심리 상태에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당시의 사회적 맥락은 무엇이었을까를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모네가 루브르 발코니에 선 순간의 의미, 고흐가 글루아 다리를 반복해서 그린 이유, 키르히너가 다보스의 빛을 담아낸 배경. 이러한 맥락을 이해할 때 작품은 시각적 대상을 넘어 작가와의 대화가 되고, 한 시대와의 만남이 되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된다. 특히 르누아르의 꽃 정물화가 아내 알린의 꽃꽂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마티스가 딸 마르그리 트를 그리며 야수파의 폭력적 색채를 절제했다는 점 같은 구체적인 일화들은 작품에 인간적 온기를 더해준다. 예술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사람의 삶과 관계, 감정이 고스란히 작품에 스며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영혼의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빛나는 순간의 방에 있고, 어떤 때는 어둠의 방에서 고통을 견디며, 때로는 치유의 방에서 회복하고, 탐구의 방에서 의미를 찾으며, 교감의 방에서 세상과 연결된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생 동안 이 방들을 오가며 작품을 남겼고,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 다. 대표작만 보는 것은 그 미술관의 가장 화려한 방 하나만 구경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방도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다른 방들을 보지 않고서는 그 미술관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다. 이 책은 우리를 숨겨진 방들로 안내하며, 거장들의 영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의 영혼과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타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뭉크의 태양을 보며 절망 너머의 희망을 발견하고, 클림트의 호수를 보며 고요함의 가치를 깨닫고, 모네의 발코니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용기를 배운다. 이것이 바로 숨겨진 작품들을 찾아 나서는 이유이며, 명성 너머 거장들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