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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존재들의 생태학 - 지구 교양인이 알면 반할 수밖에 없는 열 편의 소중한 생물의 세계
미겔 델리베스 데 카스트로 지음, 남진희 옮김 / 두시의나무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다. 이 모든 일상이 너무나 당연해서 그 이면에 작동하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노(老) 생물학자는 평생의 연구 끝에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많은 존재들의 덕분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땅속 깊은 곳에서 유기물을 분해하는 미생물, 꽃과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곤충들, 밤하늘을 가르는 박쥐, 바다 표면에서 보이지 않게 떠다니는 플랑크톤. 이들은 우리의 시선 밖에 존재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작가였던 아버지와 환경 문제를 논의하던 중 흥미로운 갈등을 경험한다. 기후변화, 오염, 불평등 같은 주제에는 공감하던 아버지가, 생물종의 멸종 문제만큼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다고 여긴 것이다. 한 종의 소멸이 슬프기는 하지만 인류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에 저자는 평생의 과제를 떠안는다. 생물다양성의 감소가 단순히 감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생존의 핵심 조건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 증명은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구체적 사례들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생명체들의 역할을 하나하나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흔히 '잡초'라는 말로 쓸모없는 식물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 잡초들 중 상당수는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약물의 원천이었다. 혈중 콜레스테롤을 조절하는 스타틴계 약물은 균류에서 추출되었고, 장기이식 수술에 필수적인 면역억제제 역시 토양 박테리아로부터 얻어졌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특허를 받은 의약품의 절반 가까이가 야생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인공지능으로 신약을 합성하는 시대가 왔지만,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완성한 화학구조의 정교함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치료법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들판 어딘가에서, 숲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무엇일까? 대왕고래도, 세쿼이아 나무도 아니다. 오리건 주의 한 숲에서 발견된 균류는 축구장 1,500개 면적에 걸쳐 퍼져 있으며, 그 나이는 수천 년에 이른다. 이 거대한 존재는 우리 발밑에서 말 그대로 끓어오르고 있지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균류는 땅속에서 식물의 뿌리와 공생하며 영양분을 교환하고, 죽은 유기물을 분해하여 토양을 풍요롭게 만든다. 이들 없이는 육상 생태계의 물질 순환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작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들판에서 죽은 동물의 사체를 처리하는 콘도르와 독수리들. 이들의 역할은 단순한 청소를 넘어선다. 스페인의 한 연구는 가축 사체를 화장터로 운반할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계산했는데, 연간 수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만약 자연의 청소부들이 제 역할을 한다면, 이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질병 예방이다. 사체를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병원균의 확산을 막고,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한다. 우리가 혐오하거나 불길하다고 여기는 맹금류들이 실은 공중보건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박쥐는 전 세계적으로 악마화되었다. 바이러스의 기원이라는 혐의를 받으며 수십만 마리가 도살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특정 박쥐 종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파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박쥐와 진화적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박쥐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박쥐들이 농업 해충을 조절하고 식물의 수분을 돕는 등 생태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책의 한 장 제목을 처음엔 '거미 덕분에'로 하려 했지만, 박쥐가 받은 부당한 처우를 생각해 '박쥐 덕분에'로 바꿨다고 한다. 오해받고 핍박받는 존재에게 마땅한 자리를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칠레 출신의 한 연구자가 스페인 국립공원에서 여우의 배설물을 채집해 분석하던 중 우연한 발견을 했다. 종이봉투에 담아둔 배설물 표본을 잊고 있었는데, 3개월 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서 수십 그루의 어린 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비나나무와 노간주나무 묘목들이었다. 여우가 열매를 먹고 발아 가능한 씨앗을 배설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직접 목격하는 순간의 감동은 달랐다. 여우는 단순히 숲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 숲을 만드는 존재였다. 이들이 영역을 돌아다니며 배설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미래의 숲을 심는 일이었다.
저자는 냉정한 진단을 내린다. 우리는 자연에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생물다양성과 화석연료 같은 자원을 수탈하여 그 대가를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부의 창출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우리는 점점 가난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환경을 희생시키는 성장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성장 이후의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책은 여든을 바라보는 학자가 평생의 연구 끝에 도달한 깨달음은 결국 감사와 경외의 마음이다. 칠레의 가수 비올레타 파라가 노래했듯이, "삶에 감사를"이라고 말하되, 그 감사의 대상을 인간 너머의 광대한 생명세계로 확장한다. 벌레, 잡초, 균류, 미생물, 박쥐, 여우, 콘도르, 플랑크톤, 굴. 우리가 하찮게 여기거나 징그러워하거나 아예 관심을 주지 않는 이 존재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주역들이다. 이들 없이 인간은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생물다양성의 위기는 환경 위기의 부수적 문제가 아니라 그 핵심이다. 한 종의 멸종은 단지 슬픈 일이 아니라 우리 생존의 그물망에 생긴 구멍이다. 그 구멍이 점점 커지면, 언젠가 그물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저자가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던 것처럼, 책은 우리를 설득한다. 논리가 아닌 구체적 사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생명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라고. 그것이 우리가 계속 숨 쉬고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