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하게 한 것은 오로지 사람이었다
문윤수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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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병원 복도의 형광등은 24시간 꺼지지 않지만, 정작 그곳을 걷는 사람들의 눈빛은 때로 깜깜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중환자실 앞에서, 누군가의 가족들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 그 복도 저편에서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걸어 나온다. 피로에 지친 얼굴이지만, 환자 가족을 향해 건네는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말 한마디는 어둠 속 작은 빛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 반딧불이 ' 라는 단어였다. 화려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존재.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빛이 되어주는 존재. 외상외과 의사라는 직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직업을 만난다. 그중에는 화려하고 주목받는 일도 있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일도 있다. 하지만 생명을 다루는 일, 그것도 죽음의 문턱에서 누군가를 다시 삶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일은 '직업'이라는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소명이고, 사명이며, 동시에 끝없 는 자기희생의 연속이다.

저자는 달리기를 한다. 마라톤을 하면서 전날의 과식을 반성하기도 하고,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 어느 순간 러너스하이를 경험한다. 그 순간부터는 감사한 것들이 떠오르고, 앞으로 더 잘 해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우리의 인생도 마라톤과 닮아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힘차게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숨이 차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의외로 편안한 리듬을 찾게 되고, 그때부터 진짜 중요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사해야 할 것들, 소중한 사람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저자에게 달리기는 성찰의 시간이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지만, 달리는 동안만큼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어제 환자에게 한 말이 적절했는지, 수술은 최선이었는지, 만약 내가 환자라면 어떤 치료를 받고 싶었을지를 곱씹어본다. 이런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반성이 결국 더 나은 의사로 성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을 돌아보는가,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앞만 보고 달리다가, 정작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저자의 달리기는 체력을 기르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점검하는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의 현실에서 산다"는 저자의 고백은 묵직하게 다가왔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과감한 베팅으로 일확 천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보상은 기대하기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는 자조 섞인 표현. 하지만 그 속에는 동시에 깊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외상외과 의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한다. 자정에 응급환자가 실려 오면 잠을 설치며 수술에 임해야 하고, 수술이 성공해도 회복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환자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의사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린다. 내가 조금 더 빨리 판단했더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더라면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길을 계속 걷는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는 보람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한 '바이탈뽕'이라는 표현처럼, 죽어가던 사람이 며칠 뒤 멀쩡하게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금전적 보상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종종 '가성비'를 따진다. 투입한 노력과 시간에 비해 얼마나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계산한다. 하지만 진짜 가치 있는 일들은 대부분 그런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일,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일. 이 모든 것은 하이 리스크이면서도 때로는 로우 리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이 담겨 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슬램덩크의 안 감독 명대사를 떠올리며 저자는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에서 비롯된다. 책 속에는 기적처럼 회복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2톤 철근에 깔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환자, 거즈 9정을 배 안에 넣고 전원되어 왔던 환자. 의학적으로 보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의료진과 환자 그리고 가족이 함께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기적들이다. 반대로 끝내 살리지 못한 환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뇌사 판정을 받았지만 장기기증으로 여섯 명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청년, 이국 땅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다 간 외국인 노동자. 이런 이야기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존엄함과,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포기한다. 조금 힘들면 그만두고, 조금 어려우면 다른 길을 찾는다. 물론 때로는 그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 지켜야 할 것 앞에서까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배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책의 제목처럼, 저자를 성장하게 한 것은 오로지 사람이었다. 교과서나 논문에서 배운 지식도 중요하지만, 진짜 배움은 환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환자들은 저자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고, 끝내 떠나간 환자들은 겸손함과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환자 가족들의 간절한 눈빛은 책임감을 더해주었고, 동료 의료진들의 헌신은 함께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우리 모두는 사람 속에서 성장한다.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누군가의 격려, 누군가의 비판,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저자가 환자들에게서 배웠듯이,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때로는 스승처럼, 때로는 거울처럼,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안전하게 살아가길.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 힘든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때 곁에서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이 책은 그런 마음을 품게 만드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울림을 가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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