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가고싶다 - 빡센 사회생활 버티기와 행복 찾기 노하우
이동애.이동희 지음 / 말하는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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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월요일 아침, 사무실 한복판의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검은색 매직펜으로 적어놓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 주말 근무를 마친 누군가가 남긴 이 짧은 고백은 며칠 사이 일곱 명의 공감을 얻으며 작은 연대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사건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은밀한 감정의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MBC에서 30년 가까이 기자와 PD로 활약해온 쌍둥이 자매, 이동애와 이동희는 이 문장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30분 차이로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두 사람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똑같은 감정을 마주했습니다. 겉으로는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직장에서의 압박과 가족 문제로 지쳐가고 있었던 그들에게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은 단순한 퇴근 욕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였고, 진짜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실한 갈망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무기력함이나 현실 도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감정의 본질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은 끊임없이 가동 상태를 요구받는 현대사회에서, 배터리가 바닥나버린 우리가 보내는 구조 신호입니다. 그것은 회사에 장악당한 하루로부터 나를 되찾고 싶다는 현명한 본능이며, 일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꿈꾸는 외침입니다. 80대 화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집은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은유"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물리적 공간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가면을 벗고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상태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받고, 감시당하며, 소통을 강요받습니다. 개방형 사무실은 우리에게 숨을 곳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속삭이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아를 지키기 위한 은밀한 저항입니다.

저자들은 책을 통해 위로만을 건네지 않습니다. 대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합니다. 요가나 명상, 취미생활 같은 일시적 해법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삶의 재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동희 PD는 브레인 포그와 번아웃을 경험하며 '이렇게 살다가는 죽는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일상을 뒤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나 자신을 위해 몰입하는 한 시간을 만들었고, 회사 일 외에 정말 하고 싶었던 책 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습관과 시간 관리를 통해 지속 가능한 삶의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현실적인 방법론이 되어줍니다. 중요한 것은 회사 생활의 목표를 '성공'이 아닌 '무수히 많은 시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승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프로젝트가 빛을 보든 좌절하든, 그 모든 경험의 축적이 진짜 나를 만들어갑니다. 회사를 탐구하고 적절히 활용하되, 그곳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지 않는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빌런'들에게서도 가치를 발견합니다. 인생에서 경로를 바꾸고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것은 뜻밖에도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는 강력한 동기부여의 원천이 되고, 위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연료를 제공합니다. 직급이 올라가고 책임이 커지면서 때로는 전략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합니다.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이 말한 '될 때까지 그런 척하면 그렇게 된다'는 초긍정의 자세도 상황에 따라서는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힘이 되려면 용기와 끈질긴 노력, 실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쓸모 있는 허세와 빈 껍데기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발자크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창조하며 한계를 뛰어넘었고, 100세가 넘어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간 예술가들은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법을 알았습니다. 이들로부터 우리는 현재의 지위와 소유에 집착하기보다, 덜어내고 줄이면서 자유를 찾아가는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직 전성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을 아끼며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질적 전환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불꽃놀이처럼 팡팡 터지는 전성기의 순간은 그렇게 준비되는 것입니다. 작아도 진정한 내 일을 찾아서 과감히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의 '추구미'는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저자들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지브리 영화의 산실, 지브리 스튜디오를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며 직장인 페르소나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을 찾고자 했습니다. 양양 해변에서 거친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서퍼들을 보며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좌절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기존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순간을 인정하고 나만의 혁신적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추구했던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문학을 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하루 중 나를 위해 확보한 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누려온 삶을 송두리째 버리고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일주일에 하루, 하루에 한 시간쯤은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회복하는 베이스캠프이자, 진정한 의미의 '집'입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 속에는 휴식에 대한 갈망, 안전함에 대한 욕구, 그리고 나답게 살고 싶은 작은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온(ON) 상태를 요구받으며 저전력 모드로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감각입니다. 지금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이미 퇴직한 사람도, 손주를 돌보며 집에 머무는 사람도 종종 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그 집이 부산의 바닷가인지, 여행지의 어디쯤인지, 아니면 추억 속 어느 순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집'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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